1화.  제1장 위험한 거래 1

등록 2026.10.13 1.1만자 조회 3 좋아요 0 댓글 0 15세 이상 이용가
하프 블러드 : 1권 - 오우거의 피를 깨우지 마라
1화. 제1장 위험한 거래 1


잔뜩 찌푸린 날씨였다. 두터운 구름에 가려 태양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을씨년스러웠다.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들판 사이로 거칠게 깔린 도로가 보였는데, 그 위를 마차 한 대가 질주하고 있었다. 급한 용무라도 있는지 마차는 거침없이 속도를 내고 있었다.
두두두두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들판의 짐승들은 이미 보금자리 깊숙이 파고든 후였다. 짐승들의 본능을 증명하려는 듯 금세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상당기간 메말라 있던 대지는 기쁘다는 듯 비를 빨아들였다. 하지만 마차를 몰고 가는 사내에게는 비가 그리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상황이 별로 좋지 않군."
서서히 진창이 되어 가는 관도를 쳐다보는 사내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이런 진창에서 마차가 제 속도를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물론 추적자들 역시 곤란하긴 마찬가지이겠지만.
"관도 꼬락서니 하고는…. 역시 식민지다운 모습이로군."
지극히 평범한, 어디에서나 쉽사리 볼 수 있을 듯한 용모를 한 사내는 전형적인 용병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무두질한 가죽갑옷에 거무튀튀한 가슴보호대[護心鏡]를 두른 사내는 동의를 얻어내려는 듯 옆에 앉은 청년을 쳐다보았다.
"임무가 아니라면 결코 오고 싶지 않은 곳이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단테스님?"
단테스라 불린 청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사가 좋지 않은 듯 대답은 하지 않았다.
청년은 눈에 확 띌 정도의 훌륭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갈색 머리칼과 그 아래 자리 잡은 눈동자 또한 짙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조각해 놓은 듯한 콧날과 굳게 닫힌 입술은 그가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미남자임을 증명해주었다.
몸에 두른 은빛 갑옷이 청년의 용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는데, 풀 플레이트 메일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제법 신분이 높은 귀족인 듯했다.
그런데 갑옷의 가슴팍에 새겨진 문장이 조금 독특했다.
두 마리의 사자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상.
그것은 이곳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왕국의 것이었다. 범선으로 백 일 이상 항해해야만 닿을 수 있는 머나먼 대륙에 위치한 왕국. 신분 높은 귀족으로 보이는 청년이 어째서 호위기사 한 명 없이 이 머나먼 곳에 와 있는지는 오직 본인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단테스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빗방울이 얼굴에 들이쳤지만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동자에 짙은 결의의 빛이 어려 있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후회는 없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 단테스는 지난 삼 개월 동안의 험준한 여정을 떠올렸다. 한 나라의 고위 귀족으로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뒤 이곳까지 도망쳐 오게 된 경위를 말이다.
그의 풀네임은 단테스 드 라인하르트. 풍요하고도 부강한 신대륙 아르카디아에서도 알아주는 강대국인 펜슬럿의 지체 높은 귀족이다.
그의 아버지인 네리우스 공작은 펜슬럿이 가진 세 개의 군단 중 하나의 통수권을 맡고 있는 최고위급 귀족이었는데, 단테스는 그 당당한 권세를 자랑하는 공작의 세 번째 아들이었다.
막강한 권세를 가진 네리우스 공작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은 한 마디로 엄청난 행운을 타고난 것이나 다름없다. 비록 3공자라서 작위와 영지를 이어받지는 못하겠지만 그 대신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을 터였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단테스는 그것이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모든 것이 허울 좋은 껍데기일 뿐이지."
입술을 비집고 냉소가 튀어나왔다. 한순간 단테스의 눈동자는 세상을 모두 태워버릴 듯한 분노로 불타올랐다. 그러나 눈빛은 오래지 않아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는 복합적인 것으로 변했다. 분명 아버지인 네리우스 백작은 단테스 자신이 벌인 일로 인해 고초를 겪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단테스는 네리우스 공작의 안위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느끼는 것은 부자간의 정이 아니라 한없는 증오심뿐이었다. 다만 자신이 택한 결정으로 인해 어머니를 잃어야 한다는 사실이 슬플 뿐이었다.
'어쩔 수 없다. 내몸에 마루스의 피가 흐르고 있는 한 나는 결코 펜슬럿의 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다.'
단테스는 서자였다. 그나마 평범한 첩의 자식도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펜슬럿과는 양립할 수 없는 적국 마루스 인이었다.
펜슬럿 왕국은 지극히 풍요로운 대지를 가진 강대국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흠이라면 바로 옆에 지극히 호전적인 신생 왕국 마루스가 인접해 있다는 점이었다.
20년 전 내전으로 힘을 잃은 테제로스 왕국을 병합해 급격히 부강해진 마루스 왕국은 펜슬럿의 기름지고 풍요로운 중앙 평원을 호시탐탐 노려왔다. 마루스엔 백성들을 충분히 먹여 살릴 만큼 영토가 풍요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루스는 오래 전부터 방대한 식량을 펜슬럿에서 수입해왔다. 중앙 평원에서 나는 곡물은 펜슬럿의 전 국민을 먹여 살리고도 남아 수출할 정도로 넉넉했으니까.
그러나 마루스가 테제로스 왕국을 침공하여 병탄하는 일이 발생하자 사정은 뒤바뀌었다. 경각심을 가진 펜슬럿 왕가에서 마루스로 수출하는 식량의 양으로 반으로 줄려버린 것이다.
하루아침에 식량부족 사태에 처해버린 마루스. 호전적인 국가답게 마루스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외교적인 노력은 일체 생략한 채 경고도 없이 펜슬럿을 침공하여 중앙 평원의 일부를 점령해버린 것이다.
"저런 고얀…."
펜슬럿의 국왕이 부랴부랴 영토를 탈환할 것을 명했지만 테제로스와의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마루스 병사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오랜 공방전 끝에 국경선이 다시 그려졌고, 이후 두 왕국은 양립할 수 없는 적국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더 많은 영토를 점령하기 위한 마루스 왕국의 산발적인 침공은 이제 펜슬럿의 연례행사가 되어버렸다.
단테스의 아버지는 바로 그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공작의 작위를 얻었다.
당시 백작이었던 네리우스 공작은 마루스의 주요 침공로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침공해 들어오는 마루스의 군대와 헤아릴 수도 없는 전투를 치러야 했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은 무려 십 년 동안 이어졌고, 용감무쌍한 마루스 병사들로 인해 펜슬럿 방어군은 여러 곳에서 패전을 거듭해야 했다. 하지만 여러 방면의 방어군 중에서도 네리우스 백작이 지휘하는 병사들반은 한 번도 마루스군에게 패하지 않았다.
그는 휘하의 병사들을 일사불란하게 진두지휘해서 맡은 영토를 한 치도 빼앗기지 않고 당당히 지켜냈다. 그의 뛰어난 지모와 용맹성으로 침공해 온 마루스 병사들은 거듭해서 패배의 쓴잔을 들이켜야 했다.
그리하여 네리우스 백작은 마루스 병사들조차도 달게 인정하는 명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 공을 인정받아 네리우스 백작은 펜슬럿이 자랑하는 3대 군단장 중 하나가 되었고,공작의 작위 또한 펜슬럿 국왕으로부터 직접 하사받았다. 작위가 대대로 세습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영광은 당연히 네리우스 공작의 아들들에게도 이어질 터였다.
그 사실을 떠올린 단테스의 입가에 냉소가 맺혔다.
'"애당초 나와 상관없는 일이지. 아니, 더욱 최악이라고 해야 하나."
단테스의 어머니 크리스틴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전쟁에서 사로잡힌 포로 출신이기 때문이다.
마루스의 유명한 무가에서 기사로 자라난 크리스틴은 펜슬럿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다가 그만 전쟁 초반에 포로가 되고 만다. 심문과정에서 크리스틴의 젊음과 미모에 반한 네리우스 공작은 그녀를 포로 명단에서 삭제한 뒤 자신의 첩으로 삼아버렸다.
통상적인 국가관계를 생각하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네리우스 공작의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십 년 이상 이어진 전쟁은 펜슬럿 인과 마루스 사람을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크리스틴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네리우스 공작의 두 번째 아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적국 포로 출신의 첩이 펜슬럿 귀족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전무했다.
그 때문에 크리스틴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처지가 되어 네리우스 공작의 저택 깊숙이 숨어살아야 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단테스였다. 그래서 그는 환영받지 못하고 태어난 태생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네리우스 공작가의 입장에서도 단테스가 처한 상황이 미묘하긴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공작가의 당당한 3공자였지만 실상은 적국의 피가 섞여 분란의 소지를 간직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픈 과거를 떠올리자 단테스의 눈가에 잔 떨림이 스쳐지나갔다.
"그토록 극복하려고 애썼건만…."
유난히 눈치가 빠르고 명석했던 단테스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둘러싼 미묘한 기운을 눈치 챘다. 그래서 그는 나이가 들자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검술을 익혔던 것이다.
검술 연마에 들어간 그의 노력은 같은 또래의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그 때문에 단테스는 열여덟이라는 나이에 초급 소드 엑스퍼트(Sword expert, 達人)가 될 수 있었다.
하늘의 축복으로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검객(劍客)의 경지. 여타의 귀족자제가 그 경지에 을랐다면 어렵지 않게 수련기사로 임용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기사단에 들어가서 모시는 기사에게 고급 검술을 전수받은 다음 만인의 축복 하에 당당한 정규기사로 발돋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테스에게 그 과정은 말 그대로 그림의 떡에 블과했다. 몸 속에 흐르고 있는 마루스의 저주받은 피는 단테스의 출세를 철저히 가로막았다. 스물다섯을 훌쩍 넘겨 소드 엑스퍼트 중급의 경지에 오른 지금에도 그에겐 기사가 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비로소 단테스는 알 수 있었다. 태생의 한계로 인해 자신은 죽을 때까지 펜슬럿에서 기사서임을 받을 수 없다는사실을.
바로 그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가문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엄청난 일을.
생각에 잠겨 있는 단테스의 귓전으로 굵직한 음성이 스쳐지나갔다.
"무슨 생각을 그토록 골똘히 하십니까?"
슬며시 고개를 돌린 단테스의 시선에 마차를 모는 용병의 모습이 들어왔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지극히 평범한 용모의 사내였다. 하지만 평범한 얼굴 속에서 번뜩이는 날카로운 눈빛은 그가 예사 용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서둘러 생각을 접은 단테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오. 그저 지나간 일들을 회상해 본 것 뿐이오."
"너무 과거에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단테스 님은 이제 당당한 마루스의 기사로서 널리 명성을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리타분한 펜슬럿과는 달리 마루스에서는 실력만이 모든 것을 좌우합니다. 단순히 펜슬럿의 피가 섞인 것 정도는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콘쥬러스 님의 언질이 있으셨습니다.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단테스 님을 수도기사단의 정규기사로 임명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말을 마친 뒤 또다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사내. 차림새와는 달리 사내는 당당한 기사였다.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마루스의 기사로 원활한 임무수행을 위해 파견되어 자신을 보좌하고 있는 것이다.
인상을 찡그리는 단테스의 귓전에 또 다른 사내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후우, 정말 끝내주는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리로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사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트러진 차림새를 수습한 사내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와 고삐를 건네받았다.
"이제부턴 내가 마차를 몰지."
말을 몰던 사내와 마찬가지로 용병 차림새를 하고 있었고, 표시나지 않는 평범한 용모를 가진 사내였다. 하지만 그 역시 뛰어난 실력을 가진 마루스의 기사이긴 마찬가지였다.
여태껏 말을 몰던 사내가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단테스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제가 일을 좀 보겠습니다."
단테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차 안애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 또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한때 펜슬럿의 기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던 그에겐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꼭 그리 해야겠소?"
"무슨 말씀이신지?"
"비록 납치되었다 해도 그녀는 당당한 펜슬럿의 왕녀요. 기사들이 목숨을 바쳐 보호해야 할 레이디란 뜻이지. 비록 적국의 왕녀라고 해도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소?"
하지만 이어진 사내의 말에 단테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야했다.
"어머니께서 가증스런 네리우스 공작에게 무슨 꼴을 당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
"단테스 님은 이미 펜슬럿과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가 되셨습니다. 펜슬럿은 이제 명백한 단테스 님의 적국입니다. 그런데 적국의 왕녀 따위에게 지킬 기사도가 어디 있습니까?"
단테스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었다. 사내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임무를 수행하는 중입니다. 만약 레오니아 왕녀가 예정대로 크로센 제국의 태자비가 된다면 크리스틴 님의 원한을 갚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해집니다. 그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린 레오니아 왕녀를 철저히 망가뜨려야 합니다. 부디 크리스틴 님의 희생을 헛되이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짧게 말을 마친 사내는 머뭇거림 없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단테스는 공허한 눈빛으로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결심을 굳힌 단테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어머님의 희생을 헛되게 할 순 없어."
마차 속에서 연신 묘한 소리가 흩러나왔지만 단테스의 상념을 방해할 순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단테스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복수!
독이 든 병을 받아든 뒤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어머니 크리스틴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자신의 원한을 백 배, 천 배로 갚아달라는 원한 어린 눈빛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임무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결심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영원히 세상을 등졌을 것이다.
"펜슬럿에서 보낸 수십 년의 세월도 어머니의 한을 희석시킬 수는 없었지."
단테스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만약 어머님께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기만 했었다면…. 그랬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진 않았을덴데…."
네리우스 공작가에서 그들 모자는 철저히 찬밥이었다. 심지어 하인들조차 크리스틴과 단테스를 대놓고 무시했다. 그러니 지금 네리우스 공작가에 닥친 위기는 인과응보라 할 수 있었다.
단테스는 조용히 몇 개월 전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던 문제의 인물, 콘쥬러스를 만나던 그 순간을.
"누, 누구신지?"
모친의 부름을 받고 방에 들어선 단테스 앞에 낯선 사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난히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중년의 사내였다.
어머니와 나란히 서 있는 사내는 뺨을 길게 가로지른 흉터가 인상적인 강퍅한 얼굴이었다. 상인 차림새를 하고 있었지만 눈빛을 보니 결코 장사꾼이 아니었다.
뜻 모를 미소를 흘리며 단테스를 쳐다보던 사내가 느닷없이 손을 내밀었다.
"네가 단테스로구나. 만나서 반갑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악수를 한 단테스의 귀로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마루스의 정보부장이다. 이 어미와는 기사학부 동기이기도 하고."
단테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설마 어머니의 침소에서 적국 마루스의 정보부장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갈피를 잡지 못한 단테스는 자신도 모르게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하지만 검을 들어올리기도 전에 어머니의 노성이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검을 집어넣지 못하겠느냐? 네 어미의 옛 동료에게 어찌 이런 무례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이냐?"
"하, 하지만 저자는 적인데…."
"누가 적이란 말이냐? 비록 이 꼴이 되었지만 난 아직까지 마루스의 기사라 자부한다. 나에겐 이 어미를 강제로 범한 네리우스와 펜슬럿 놈들이 죽어 마땅할 적일 뿐이다."
망설이던 단테스는 힘없이 검을 늘어뜨렸다. 그 역시 어머니의 생각에 공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태도에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이미 마루스의 정보부장에게 단단히 설득되어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단테스는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펜슬럿과 마루스의 피가 반씩 섞인 그와는 달리 어머니는 온전한 마루스 인이었으니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성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기사학부에서의 대련에서 매섭개 날 몰아붙이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그 말을 듣자 크리스틴의 얼굴에서 짙은 회한이 배어 나왔다.
"27년 전, 그때의 저주받을 일만 아니었다면…."
그녀의 뒷말을 사내가 받았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기사단 하나 정도는 맡고 있을 테지. 네 검술실력은 동기들 중에서도 발군이었으니 말이야."
"그만 해, 콘쥬러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프니까."
나직이 사내의 이름을 부른 크리스틴은 조용히 단테스를 응시했다.
"단테스."
"네, 어머니."
"지금 네 처지에 만족하느냐?"
"…."
"실력이 있어도 기사 서임을 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네리우스 공작가의 3공자로 제대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 단지 마루스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끝없이 천대받는 네 처지에 만족하느냔 말이다."
눈치 빠른 단테스는 대번에 어머니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마루스로 전향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네가 응낙하기만 하면 마루스로 건너갈 수 있다. 이미 콘쥬러스가 뒤를 봐주기로 했다. 물론 자격시험을 치러야겠지만 네 실력이라면 충분히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테스는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아버지인 네리우스 공작에게 정이 있을 리가 없었고, 배다른 형제들과는 원수나 마찬가지인 사이였다. 물려받을 재산 따위가 아쉬운 것도 아니었다.
단지 몸을 담고 있는 왕국을 하루아침에 등지고 적국으로 건너간다는 결정을 그리 쉽게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테스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이대로 펜슬럿에 남아봐야 뾰쪽한 희망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말에 크리스틴의 안색이 환히 밝아졌다.
"훌륭한 결정이다. 이미 난 네가 이럴 줄 알고 있었다."
미소를 지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콘쥬러스가 단테스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마루스 인이 된 것을 환영한다. 우린 고리타분한 펜슬럿 놈들과는 달리 피가 섞였다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모든 것은…."
콘쥬러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로지 실력으로 증명 받을 뿐이다. 네 어머니에게 듣기로 이미 소드 엑스퍼트 중급에 올라섰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아무 문제없이 기사 서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직접 네 후견인이 되어 줄 것이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거라."
그 말에 단테스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사(Knight)!
그 얼마나 원했던 이름이었던가?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검을 휘두르고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수련에 몰두했던 것은 모두 기사가 되기 위한 일념에서였다.
하지만 단테스의 가슴속에는 항상 먹구름이 끼어있었다. 그는 자신이 영원히 기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불과 얼마 전에 깨달았다. 모든 게 태생의 한계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테스는 수련을 접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검술 수련 뿐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마침내 기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비록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이 적국인 마루스라고 하나 꺼릴 것은 없었다. 어차피 그의 몸에 흐르는 피의 반은 엄연히 마루스의 것이니까.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단테스에게 콘쥬러스가 조용히 주의를 주었다.
"이곳에서는 세세한 얘기를 나눌 수 없다. 그러니 오늘 저녁 이곳으로 나오너라. 내 그곳에서 너에게 자세한 것을 가르쳐 주마."
단테스는 묵묵히 콘쥬러스가 내민 쪽지를 받아들었다. 쪽지에는 모종의 장소를 암시하는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눈빛을 거둔 콘쥬러스는 한 쪽에 놓인 짐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다, 크리스틴."
"모쪼록 잘 부탁해, 콘쥬러스."
"걱정하지 마."
고개를 끄덕인 콘쥬러스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단지 날카롭던 눈빛이 사라졌을 뿐인데 분위기가 판이하게 변해버린 것이다. 짐꾸러미를 짊어진 그의 모습은 시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떠돌이 장사꾼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몸을 돌린 콘쥬러스의 뒷모습을 크리스틴이 복잡 미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문을 열고 나선 콘쥬러스가 몸을 돌려 깊숙이 절을 했다.
"그럼 마님,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수고했다. 물품들이 꽤 마음에 들더구나. 앞으로도 종종 들러주기 바란다."
"알겠사옵니다, 마님"
콘쥬러스가 나가자마자 문이 닫혔다. 한숨을 쉬며 의자에 걸터앉는 크리스틴의 옆에서 단테스는 열심히 쪽지의 약도를 머릿속에 새겨 넣고 있었다.
약속장소에 나간 단테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입을 딱 벌렸다. 콘쥬러스가 상상도 못해 본 제의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레, 레오니아 공주를 납치하다니…."
"쉿! 목소리가 크다."
단테스가 찾아간 곳은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흉가였다. 그곳에는 콘쥬러스 말고도 십여 명의 인물들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하나같이 정체를 숨기고 잠입한 마루스의 정보부 요원들이었다. 대부분 기사로 보였지만 두세 명 정도는 마법사인 듯했다.
그곳에서 콘쥬러스는 자신이 펜슬럿으로 숨어 들어온 목적을 밝혔다. 그러고 나서 단테스에게 펜슬럿의 공주를 납치하는 데 동참하라는 제의를 해온 것이다. 단테스로서는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제, 제가 그런 엄청난 일을 어떻게…."
"네가 응낙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우린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이곳에 잠입한 것이니까."
잠시 얼떨떨해 하던 단테스의 눈동자에 분노의 빛이 화락 일어났다.
"그렇다면 어머니와 제게 접근하신 것은 다분히 계획적이었군요."
"굳이 부인하진 않겠다. 하지만 명심하거라. 이것은 우리 마루스의 국운이 걸린 일이다. 정보부 수장인 나로서는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야 했었다."
콘쥬러스는 조용한 어조로 펜슬럿과 마루스가 얽힌 국가 간의 역학관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펜슬럿과 마루스.
자타가 공인하는 강대국인 것은 분명하지만 애석하게도 두 왕국 모두 아르카디아 최강국이라 할 순 없었다. 모든 왕국들의 종주국이 되는 크로센 제국이 있기 때문이다.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