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제1장 위험한 거래 2

등록 2026.10.13 1.4만자 조회 3 좋아요 0 댓글 0 15세 이상 이용가
하프 블러드 : 1권 - 오우거의 피를 깨우지 마라
2화. 제1장 위험한 거래 2


크로센 제국은 육백 년의 아르카디아 역사동안 단 한 번도 최강의 자리를 내준 적이 없는 강대국이다. 그리고 아르카디아에서는 오직 크로센 제국의 주인만이 황제라 칭할수 있다.
구국의 영웅 크로센 대제의 후손들이 다스리는 나라, 자타가 공인하는 아르카디아 최강대국, 그것이 바로 크로센 제국이다.
또한 크로센 제국은 최강국이란 자리에 걸맞게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특히 막강한 크로센 기사단의 위용에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었다. 크로센 제국은 무려 이백 명의 소드 마스터(Sword master, 名人)로 구성된 사상 최대의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독자적인 마나연공법으로 키워낸 크로센 제국의 기사들은 타국의 기사들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보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센 제국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른 왕국을 침공한 일이 없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단숨에 아르카디아 대륙 절반을 병탄할 수 있지만 역대 크로센 황제들은 그저 구국의 영웅 크로센 대제의 유언에 따라 여러 왕국들 사이를 조율하는 데 힘써왔을 뿐이었다.
종주국답게 크로센 제국은 아르카디아에 산재한 수많은 왕국들의 전쟁에 간섭하며 대규모 전면전이 벌어지는 것을 막아왔다. 아무리 격렬하게 싸우던 왕국들도 크로센 제국이 개입할 경우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전쟁을 멈추어야 했다.
극히 호전적인 왕국 마루스가 펜슬럿과 대놓고 전면전을 벌이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크로센 황제의 명령에 거역하는 왕국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테제로스를 마루스의 영토로 완전히 병탄시키는 데 무려 사십 년이 걸렸다. 1왕자와 4왕자사이의 내전으로 완전히 초토화된 테제로스였지만 우리로서는 크로센 제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강력한 기사단과 군대를 가지고 있지만 감히 크로센 제국의 비위를 거스를 수는 없다."
콘쥬러스의 설명에 단테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떡였다. 거기까지는 단테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말을 이어가는 콘쥬러스의 얼굴에 서서히 침통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너도 알다시피 마루스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영토 대부분이 사막과 산지로 이루어진 척박한 땅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펜슬럿의 중앙 평원의 일부분을 병탄해야만 수백만 마루스 국민들을 걱정없이 먹여 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과 레오니아 왕녀를 납치하는 것과 대관절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분명히 관계가 있다."
콘쥬러스의 설명이 다시 이어졌다. 그의 말에 의하면 문제의 시초는 레오니아 공주 때문에 생겨났다고 한다.
크로센 제국의 수도 펠젠틴에는 엄청난 규모의 학부가 위치하고 있다. 제국의 위용에 어울리는 훌륭한 학부였다. 규모도 규모였지만 교육의 질이 현저히 높았기에 각지의 왕국에서는 왕자나 왕녀를 펠젠틴으로 보내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 될 정도였다. 작금에 와서는 크로센 제국으로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귀족은 귀족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레오니아 왕녀 역시 그런 경향에 따라 펠젠틴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녀가 들어간 학부에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가 다니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분란의 씨앗은 바로 거기에서 잉태되었다.
남녀 관계란 본시 아무도 알 수 없는 법. 제위를 이어받을 네트로만 황태자는 레오니아를 보자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이후 그는 수많은 여인들 중 유독 레오니아에게만 관심을 가졌고, 그녀 역시 황태자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둘의 사이는 서서히 무르익어 갔고, 그들의 사랑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펜슬럿 왕가로서는 크로센 제국을 물려받을 황태자를 사쉿감으로 마다할 리가 없었으며, 크로센 황실 역시 황태자비 감으로 강대국 펜슬럿의 왕녀를 반대할 만한 구실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둘은 장래를 굳게 약속했고 그 사실은 만천하에 공표되었다.
레오니아 공주가 학부를 수료하는 대로 크로센의 황태자비로 맞아들여질 것이란 사실이 전해지자 펜슬럿 궁정은 잔치 분위기에 휩싸였다. 초강대국 크로센 제국과 혼인관계를 맺는데 그 어떤 왕국이 기뻐하지 않을 손가.
하지만 밝은 곳에 드러난 양지가 있으면 의당 그늘에 가려진 음지가 있는 법.
그 소식을 들은 마루스의 궁정은 발칵 뒤집혔다. 만약 크로센 제국과 펜슬럿 왕국이 혼인관계로 맺어진다면 마루스의 야망은 그날로 끝장이었다. 이미 마루스는 여러 차례 전쟁을 도발해서 펜슬럿 중앙 평원의 4분지 1정도를 집어먹은 상태였다. 그런 까닭에 두 나라 사이의 감정은 사상 최악을 치달리고 있었다.
"그 혼인이 이루어질 경우 우린 더 이상 펜슬럿을 공략할 수 없다. 최악의 경우 지금까지 겨우겨우 점령한 영토를 모두 토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우린 더 이상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 없다. 악감정을 품은 펜슬럿이 우리에게 순순히 식량을 공급해줄 리가 만무하니 말이다. 내가 이곳으로 온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우린 어떻게 해서든 그 혼인을 막아야 한다. 반드시 레오니아 왕녀를 납치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모든 사실을 들은 단테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극비에 붙여야 할 일급비밀 같군요. 그런데 그것을 왜 저에게 털어놓으시는 것입니까? 기껏해야 소드 엑스퍼트 중급인 제가 도대체 뭘 할 수 있다고…."
콘쥬러스는 타오르는듯한 눈빛으로 단테스를 직시했다.
"이것은 오로지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 중 의심받지 않고 레오니아 왕녀에게 접근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너뿐이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자 단테스는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이미 저에 대한 조사를 모두 마치셨군요."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마. 그러나 그만큼 우리 마루스의 상황이 절박하다는 사실만은 알아다오."
갈등으로 인해 단테스의 머릿속은 심하게 헝클어져갔다.
물론 콘쥬러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의심받지않고 레오니아 왕녀에게 접근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자신밖에 없었다. 단테스는 한때 레오니아 왕녀의 류트 선생이었다.
태생의 한계로 인해 좌절을 거듭해야 했던 단테스는 가슴속에 잠재되어 있던 울분을 음악을 통해 표출했다. 어릴 때부터 류트를 연주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랬던 것이다.
다행히 그의 음악적 재능은 검술에 비해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단테스의 슬픈 심정은 여과 없이 음악으로 발현되었고, 그의 연주는 점차 술(術)을 넘어 예(藝)의 단계로 발전되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완숙해진 류트 실력. 그로 말미암아 단테스는 오래지 않아 펜슬럿 귀족사회에서 손꼽히는 류트 연주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최고 수준에 오른 류트 연주로도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순 없었다. 그저 연회에 나가 귀족들의 여흥을 돋구어 주는 것만이 단테스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아무리 아름답게 연주를 하더라도 적국의 피가 섞인 단테스에게 관심 가져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여흥을 위해 불러놓은 악사 정도로만 간주했던 것이다.
물론 성과가 전혀 없진 않았다. 류트 연주에 매료된 몇몇 귀부인들이 단테스에게 딸의 류트 교습을 부탁해 왔고, 단테스는 그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았다. 혹시라도 권세 있는 가문의 공녀와 정분이 든다면 태생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한 가닥 희망을 품은 단테스는 성심껏 류트 교습을 해주며 그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단테스가 거둔 결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류트에 대해서만 배울 뿐 단테스에게 관심를 가지는 공녀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단테스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들은 이미 속한 가문으로부터 단단히 교육받은 후였다. 어떠한 경우에도 단테스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말이다. 레오니아 왕녀 역시 단테스에게 류트 교습을 받은 여인들 중 하나였다.
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단테스의 귓전으로 콘쥬러스의 말이 이어졌다.
"레오니아 왕녀는 학부의 방학을 맞이하여 펜슬럿으로 돌아와 있다. 당연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경호를 받고 있지. 하지만 너라면 아무런 의심 없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너는 아직까지 그녀의 류트 선생이니까."
단테스는 얼굴 근육을 푸들푸들 떨며 웃었다.
"후훗. 우습군요."
"…."
"지금껏 신경도 쓰지 않고 내버려두었다가 막상 제가 필요해지자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하니 말입니다. 지금껏 어머니와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전혀 관심 갖지 않았으면서…."
콘쥬러스는 얼굴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네가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우린 독자적으로 작전에 돌입할 것이다. 물론 성공여부는 더욱 불투명해지겠지. 하지만 네 앞길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일러주는 길로 가면 무사히 마루스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소드 엑스퍼트 중급이라면 충분히 수습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써준 소개장을 가지고 간다면 틀림없을 테니까. 하지만…."
말을 잠시 끊은 콘쥬러스는 단테스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것은 너에게 두 번 다시 찾아오기 힘든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넌 조국 마루스를 구해낸 영웅이 되는 것이다."
"…."
"생각해 보거라. 네가 세운 공적이라면 국왕 전하의 치하는 물론이고 최소한 백작 이상의 작위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수습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곧바로 주력기사단의 일원이 될 수도 있다. 근위기사단에 들어가는 것도 전혀 불가능하진 않지. 물론 단테스란 이름은 버려야 할 테지. 철저히 비밀리에 처리되어야 하는 임무이니 네 공적을 외부로 드러낼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넌 전혀 새로운 신분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신분이라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네가 원한다면 펜슬럿의 피가 섞인 것마저도 감쪽같이 은폐시킬 수도 있다. 쉽게 말해 처음부터 마루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고위급 귀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영웅으로서 당당히 마루스 귀족사회에 편입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지금 네 앞에 펼쳐져 있다. 그런 기회를 네 발로 차버리고 싶으냐?"
망설이던 단테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어떻게 되시는 것입니까?"
콘쥬러스의 얼굴이 별안간 어두워졌다.
"네 어머니는 어쩔 수 없다. 이미 얼굴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마루스로 데리고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크리스틴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오로지 자결뿐이다."
하얗게 질린 단테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콘쥬러스가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굴욕스런 삶보다는 명예를, 그리고 너의 장래를 택하겠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난 미리 준비해 온 독약을 그녀에게 건넸다."
단테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라면 분명히 그렇게 행동할 터였다.
"이제 대답하거라. 어떻게 하겠느냐?"
단테스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마음은 펜슬럿을 떠나있었다. 그의 앞에 남은 것은 마루스에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단테스는 밑바닥부터 시작하고 싶진 않았다. 콘쥬러스의 말대로 레오니아 공주에게 접근이 가능한 자는 오직 자신뿐이었다. 자신이 맡는다면 임무를 성공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임무를 완수한다면 자신은 영웅으로서 당당히 마루스 귀족사회에 입성할 수 있다. 단테스는 그것을 해낼 자신이 있었다.
일단 마루스 인이 되겠다고 작정한 이상 할 수 있는 선택은 뻔한 것이었다.
단테스는 나직이 각오를 다졌다.
'어차피 인생은 도박이다. 이번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마음을 정한 단테스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를 맡겠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일러주십시오."
"훌륭한 선택이었다. 역시 크리스틴의 아들이자 마루스의 자식답구나."
콘쥬러스가 미소를 지으며 단테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태도를 보니 단테스가 승낙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옆에 서 있던, 평범한 상인이나 용병 차림새를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마루스의 기사들이라 짐작되는 사내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역시 마루스의 의기를 가지고 계시군요!"
"단테스 님께 경의를!"
사내 하나가 단테스에게 다가와서 상자 하나를 내려놓았다. 상자를 열어젖힌 콘쥬러스가 내용물을 하나씩 꺼내어 단테스에게 건넸다.
단테스가 제일 처음 받아든 것은 룬 문자가 빽빽이 새겨진 두루마리였다.
"이것은 공간이동을 실현시키는 스크롤이다. 넌 레오니아 왕녀를 끌어안은 상태로 스크롤을 찢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어렵지 않게 왕궁을 탈출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펜슬럿 왕궁의 요소요소에는 틀림없이 공간이동을 방해하는 마법이 걸려 있을 것이다. 따라서 넌 반드시 공간이동 왜곡장이 미치지 않는 장소를 찾아가서 스크롤을 찢어야 한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파견된 마법사들이 열심히 조사하고 있으니 며칠 내로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콘쥬러스가 두 번째로 꺼낸 것은 매우 고급스러워 보이는 류트였다. 통상적인 류트보다 길이가 조금 길어 보이기는 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품으로 보였기에 단테스는 서둘러 류트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현을 한 번 퉁겨본 단테스의 얼굴에는 실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외형과는 달리 음감이 썩 좋지 못하군요."
"물론 그럴 것이다. 단순한 악기가 아니니까. 이 류트를 만든 목적은 따로 있다."
류트의 아랫부분을 움켜쥔 콘쥬러스가 손에 힘을 주었다.
스르릉
놀랍게도 예기를 발하는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60센티미터 정도 길이의 중검이었다. 그것을 본 단테스는 깜짝 놀랐다.
"류트 속에 검이 숨겨져 있다니…."
거기에서 단테스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콘쥬러스가 마루스를 떠날 때부터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마음을 먹고 왔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반드시 임무를 성공시키갰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태생의 한계를 감춘 채 당당히 마루스에 입성할 수 있을 테니까.
단테스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콘쥬러스가 빙긋이 웃으며 검을 다시 류트 속에 끼워 넣었다.
"아마도 레오니아 왕녀에겐 최소 오십 명 이상의 친위기사가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접거리에서 경호하는 자는 오직 여기사 둘뿐이다. 기습으로 그들을 먼저 처치한 뒤 다른 놈들이 달려오기 전에 스크롤을 찢어야한다. 알겠느냐?"
단테스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스크롤을 품속에 집어넣으려 하자 콘쥬러스가 손을 흔들어 만류했다.
"궁정에 들어갈 경우 소지품 검사를 당한다는 사실을 잊었느냐? 류트 속에 스크롤을 숨길 수 있는 곳을 만들어 두었다. 세 번째 현의 잠금쇠를 돌려보아라."
콘쥬러스의 말대로 하자 팅 하는 소리와 함께 류트의 윗부분이 열렸다. 단테스는 스크롤을 조심스레 류트 속에 집어넣었다.
"마법사의 조사가 끝나는 대로 너에게 통보해 주겠다. 그러니 일단은 집에 가서 대기하도록 해라. 궁정에 들어가서 레오니아 왕녀를 만나는 과정은 전적으로 너에게 일임하겠다."
"알겠습니다."
단테스는 말없이 류트를 집어 들었다. 몸을 돌리는 그의 눈동자는 모종의 결심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당시를 떠올린 단테스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려있었다.
"콘쥬러스가 날 끌어들이기로 한 것은 정말 훌륭한 선택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결코 레오니아 왕녀를 납치할 수 없었을 테니."
크로센 황태자와 장래를 약속한 뒤 펜슬럿으로 돌아온 레오니아 왕녀에겐 엄청난 경호가 붙어 있었다. 콘쥬러스가 예상한 인원의 두 배가 넘는, 무려 백 명이 넘는 친위기사들이 레오니아 왕녀의 경호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경호대상이 왕녀였기 때문에 근접경호를 할 수 있는 기사는 엄연히 한정되어 있었다.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데 감히 남자 기사들이 옆에 붙어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고, 또한 공주의 침소에 들어가 경호할 수도 없었다. 오직 같은 여성만이 그녀의 밀착경호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마루스의 정보부에서는 단 두 명의 여기사가 레오니아 왕녀를 지척에서 경호한다는 사실을 파악해 둔 상태였다. 이틀 후 단테스는 콘쥬러스가 보낸 마법사를 만나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수고했소."
마법사를 돌려보낸 뒤 단테스는 곧장 궁정으로 들어갔다. 평상시에는 쉽사리 궁정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이번만은 근위병들이 단테스가 출입하는 것을 통제했다.
"들어갈 수 없소."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려진 명령이었다. 단테스는 할 수 없이 레오니아 왕녀에게 보내는 서신을 써서 근위병들에게 맡겼다. 서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단테스입니다. 새로 만들어낸 곡이 있어 공주님께 연주해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부디 제 류트 연주를 들어주십시오.'
다행히 레오니아 왕녀는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 여인이었다.
"그래요? 한번 만나 보겠어요."
삼엄한 경호에 답답해하던 레오니아 왕녀는 서신을 보자마자 두말 하지 않고 단테스를 들여보내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단테스는 의도대로 궁정에 들어올 수 있었다.
당연히 몸수색을 받았지만 류트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테스는 백여 명의 기사들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은 공간이동 왜곡장이 설치된 장소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레오니아 왕녀를 만난 단테스는 류트를 타기 시작했다. 무기로 만들어진 류트라 그리 훌륭한 연주를 할 수는 없었다. 예상대로 레오니아 왕녀는 불평을 터뜨렸다.
"잔뜩 기대했건만 그리 만족스럽지는 못하군요."
단테스는 천연덕스럽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사방이 막힌 장소라서 그렇습니다. 이 연주는 사방이 트여 있어야만 음감이 생생히 살아나지요."
"그럼 테라스로 가서 연주를 들려줘요."
귀가 솥깃해진 레오니아 왕녀는 너무나 쉽게 단테스의 꼬임에 넘어오고 말았다. 친위기사들이 만류했지만 그녀는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렸다. 그리하여 단테스는 생각했던 대로 레오니아 왕녀를 공간이동 왜곡장이 미치지 않는 범위인 테라스로 유인해 낼 수 있었다.
단테스의 활약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테라스는 그리 넓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었다. 오직 레오니아 왕녀와 그녀를 밀착 경호하는 두 명의 여기사, 그리고 단테스만이 테라스에 나갈 수 있었다. 그 외의 기사들은 모두 실내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지금이다.'
호흡을 가다듬은 단테스는 연주에 들어가는 척 하다가 류트 속에 감춰진 검을 번개처럼 뽑아들었다.
"크흑…."
좌측 여기사의 목덜미,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부위에 검을 쑤셔 넣은 단테스는 몸을 빙글 돌리며 레오니아 왕녀의 복부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꺅!"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레오니아 왕녀가 몸을 웅크렸다. 그와 동시에 단테스는 푸들푸들 떠는 여기사의 목덜미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치명상을 입은 여기사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이 때를 위해 수십, 수백 번 연습했던 만큼 실수는 없었다.
"이런 발칙한 놈."
"감히 왕녀님을…."
비로소 상황을 알아차린 우측의 여기사가 검을 뽑아들고 휘둘렀다. 실내의 기사들 역시 흉흉한 기세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테스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챵챵챵
흉흉한 공세를 막아나가던 단테스는 몇 합 지나지 않아 나머지 여기사마저 쓰러뜨릴 수 있었다. 그동안 갈고 닦은 검술실력이 제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내에 있던 기사들이 가까이 접근한 상황. 하나같이 단테스를 능가하는 실력자들이었다.
위기에서 모면하기 위해 단테스는 레오니아 왕녀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들어올렸다. 그리곤 검을 들어 그녀의 가녀린 목덜미에 대었다.
"거기서 조금이라도 다가온다면 레오니아 왕녀의 목 없는 시체를 보게 될 것이다."
예상대로 친위기사들은 움찔했다. 확실한 협박을 위해 단테스는 레오니아 왕녀의 목을 살짝그었다.
"악!"
비명소리와 함께 피가 살짝 배어 나오자 친위기사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워, 원하는 것이 뭐냐?"
책임자로 보이는 기사가 나서서 뭔가 말을 걸려 했다. 하지만 단테스는 그따위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기사들의 공세가 잠시 멈춘 틈을 타서 그는 류트 속의 스크롤을 꺼내들었다.
"헉! 스, 스크롤…."
"마, 막아라!"
대경실색한 기사들이 앞 다투어 덤벼들었다. 하지만 무정하게도 스크롤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찢어지고 있었다.
화아아악
스크롤이 찢어지는 순간 둘의 몸은 눈부신 광휘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연한 표정을 한 기사들만을 그곳에 남긴 채.
단테스는 눈빛을 빛냈다.
"공간이동이 이루어진 곳은 콘쥬러스를 만난 바로 그 폐가였었지. 하지만 채 십 분도 되기 전에 추격대가 몰려올 줄은 몰랐어. 그때부터 난 끝없는 도주를 시작해야 했다."
추격의 손길은 끈질기게 그를 따라왔다. 계속해서 행로를 바꾸며 추격대를 교란시키지 않았다면 벌써 오래 전에 체포되었을 터였다.
단테스가 도주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콘쥬러스의 도움이었다. 왕녀의 납치에 마루스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나서진 못했지만 콘쥬러스는 끊임없이 용병들을 고용하여 추격의 손길을 막았다.
동일한 모습의 마차에 올라 탄 용병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사방으로 흩어지며 추격대의 이목을 분산시켰다. 그들 대부분은 체포되어 참혹한 고문을 받았지만 콘쥬러스가 신분을 노출시키기 않았기에 용병들의 입에서 나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레오니아 왕녀를 납치한 단테스 일행은 동쪽을 향해 정신 없이 말을 달렸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수면도 거의 취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필사적인 도주를 거듭한 것이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로 동쪽 해안에 위치한 조그만 마을에 도착한 단테스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거대한 범선 한 척이었다. 그곳에서 콘쥬러스는 단테스에게 트루베니아로 건너가라는 지령을 내렸다.
"트, 트루베니아라면 식민지 대륙이 아닙니까?"
"그렇다. 이곳에서는 도저히 집요한 추적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넌 레오니아 왕녀와 함께 트루베니아로 건너가야만 한다."
"그냥 마루스로 잠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까?"
"그것은 자살행위다. 이미 왕녀의 납치소식이 퍼진 상황이라 크로센 제국에서도 오래지 않아 추적대가 파견될 것이다. 그들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트루베니아로 건너가야 한다."
단테스 일행은 어쩔 수 없이 배에 올랐다. 그리고 트루베니아를 향한 백 일간의 항해에 들어갔다.
동쪽 해변에 도착한 추적대는 그 사실을 알고 대대적으로 전선을 동원했다. 그러나 먼저 출발한 단테스 일행의 배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바다에 뜬 배는 마법으로도 잡을 수 없다. 그리하여 단테스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백 일간의 항해를 마치고 트루베니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처절한 도주였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는 경험이었어."
지금까지의 처절한 여정을 떠올린 단테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 콘쥬러스를 만나 레오니아 왕녀를 건넨다면 이 지긋지긋한 도주가 모두 끝나리라.
그는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마차 속에서는 계속해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바보조차도 알 수 있을 터였다. 단테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쯔쯔.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비로 간택된 왕녀치고는 정말 기구한 처지로군."
레오니아 왕녀를 흠집 내기 위한 마루스의 음모는 범선 속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행여나 돌아가더라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도록 콘쥬러스는 작전에 나선 기사들로 하여금 레오니아 왕녀를 매일매일 겁탈하도록 시켰다. 몸과 마음을 철저히 망가뜨리겠다는 의도였다.
그것은 항해에 나선 백 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배에서 내려 육로로 도주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조금 전까지 마차를 몰던 사내 역시 마차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임무수행에 열중하고 있을 터였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상관없이 말이다.
하지만 단테스에겐 그리 유쾌하지 못한 일임에는 분명했다. 적어도 한때 자신이 모시던 왕녀였으며 무려 2년간이나 류트 교습을 해 주었다는 인연이 있는 여자니까.
그런 사실 때문에 단테스는 지금껏 단 한 차례도 레오니아 왕녀의 몸을 건드리지 않았다. 물론 그가 나서든 나서지 않든 간에 레오니아 왕녀의 심신은 여지없이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겠지만.
단테스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그나저나 마법사의 연락이 올 때가 되었는데…."
충분히 비를 뿌렸는지 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한창 열락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는 마차 속.
벌거벗은 사내 하나가 격한 숨소리와 함께 정신 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나신의 여인 하나가 깔려 있었다.
사내의 움직임에 따라 맥없이 사지를 꿈틀거리는 여인. 그녀가 바로 비운의 왕녀 레오니아였다.
몸 한쪽에서 치밀어 오르는 통증으로 인해 그녀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무려 백 일간이나 겪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고 크게 뜨여진 눈동자에는 초점이 전혀 잡혀 있지 않았다.
'시, 신이시여….'
애타게 신을 찾아보았지만 음성은 입술 밖으로 터져 나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지금 고도의 마법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눈꺼풀에는 블라인드(Blind) 마법이 걸려 있었고, 귀에는 데프니스(deafness)가 걸려 있었다. 심지어 쉴 새 없이 들썩거리는 입술에도 침묵(silence)의 마법이 걸려 단 한 마디의 말도 입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한마디로 보지도 듣지도, 그리고 말하지도 못하는 처지인 것이다.
마법은 범선에 올라탄 직후 발현되었다. 검은 로브를 걸친 늙수그레한 마법사의 주문영창이 작용한 후 사라진 그녀의 감각은 지금까지도 마비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그녀는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지금 누군가가 자신을 능욕하고 있다는 사실뿐.
그녀는 지금 자신을 능욕하는 사내를 단테스로 오인하고 있었다.
'단테스 네놈이 감히 날…'
하지만 역시 말은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만 저주를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런 처지에 직면할 것이라곤 꿈에서나 상상했을까? 절망감에 그녀는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네트로만 황태자님, 제발 절 구해주세요. 더 이상 버, 버틸 수 없어요…."
지금껏 수백, 수천 번 이상 불러보았던 이름이었다. 펠젠틴의 학부에서 만난 네트로만 황태자는 그녀에게 완벽한 이성으로 다가왔다. 용모, 신분 어디 하나 모자람이 없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처음 관심을 가져 주었을 때 레오니아는 마치 하늘에 붕 뜬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더 없이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지극히 순종적인 그녀의 성격은 네트로만 황태자의 호감을 샀다. 지금껏 황태자가 만난 여인들 중에서 레오니아만큼 헌신적인 여성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급속도로 발전되었고 둘은 오래지 않아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장래를 약속했다. 방학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네트로만 황태자가 자신을 불러주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기쁜 마음으로 신부 수업을 쌓아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은 단테스란 천하의 무도한 놈 때문에 단숨에 깨져버렸다.
'그놈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니, 애초부터 그놈에게 류트 교습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껏 수없이 되풀이해온 후회였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놈의 더러운 욕정에 시달려야 했다. 수도 없이 후회하고 단테스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지만 구원의 손길은 닿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심신은 극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반드시 죽여 버릴 것이다. 전신을 갈가리 찢어 죽여 버릴 것이다. 아니, 돌아가기만 하면 저주받은 네리우스 공작가를 완벽히 멸문시켜 버릴 것이다!'
사내의 움직임에 의해 간헐적으로 경련하는 몸을 추스르며 레오니아 왕녀는 단테스를 향해 끝없이 저주를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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