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제3장 잉태(孕胎) 2
하프 블러드 : 1권 - 오우거의 피를 깨우지 마라
6화. 제3장 잉태(孕胎) 2
"왕녀님을 구했는가?"
기사단장의 질문에 수색에 나선 기사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뭔가를 내밀었다. 레오니아가 떨어뜨린 바로 그 서클릿이었다.
"이, 이건…."
기사단장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들이 찾아온 것은 추적마법이 걸린 서를릿뿐이었다. 수색에 나섰던 기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흔적을 찾아 추적을 거듭지만 찾아낸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오우거의 속도가 워낙 빨랐기에 저희들로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현기증이 치밀어 오른 듯 기사단장의 몸이 휘청거렸다. 석 달이나 걸린 추격전 끝에 이 먼 트루베니아까지 추적해 왔건만 결국 왕녀를 구해내지 못한 것이다. 기사단장의 머릿속엔 극도로 상심한 네트로만 황태자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 이 일을 어찌해야 할꼬. 그것도 흉포한 오우거에게 약혼녀를 잃었으니…."
옆에 서 있던 기사들의 얼굴 역시 창백하긴 마찬가지였다. 차려입은 복색과 가슴팍에 새겨진 문장이 크로센 제국과 다른 기사들. 그들은 바로 펜슬럿에서 파견된 기사들이었다.
용병대에 발목이 잡힌 탓에 조금 늦게 도착한 그들을 기다린 것은 레오니아 왕녀가 오우거에게 잡혀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기사단장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로써 레오니아 왕녀님에 대한 수색을 종결지어야 할 것 같소."
"안됩니다. 우리 왕녀님을 이대로 포기할 순 없습니다."
펜슬럿의 기사들을 지휘하던 기사가 완강히 고개를 흔들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기사였는데 굳은 얼굴에는 절박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도 이어진 크로센 기사단장의 말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대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소. 오우거가 어디로 도주했는지도 모르거니와 결정적으로 왕녀님이 계신 곳을 알아낼 방도가 없소. 무엇보다도 왕녀님께서 아직까지 살아 계실 것이라 장담하지도 못하오."
"…."
"오우거가 도대제 어떤 몬스터요? 서클릿이 발견된 이상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이면 왕녀님은…."
크로센 기사단장은 뒷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연한 표정의 펜슬럿 기사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떨궜다. 그들 중에서도 레오니아 왕녀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크로센 기사단장이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 돌아들 갑시다. 더 이상 있어봐야 할 일도 없지 않겠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슬럿 기사들은 누구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펜슬럿 국왕의 진노를 염려하고 있었다. 딸을 잃은 데 이어 크로센 황가와 혼인관계를 맺어 국방을 튼튼하게 하려는 계획이 여지없이 물거품이 되었으니 펜슬럿 국왕의 상심은 안봐도 뻔했다.
백발의 노기사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여전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펜슬럿 기사들을 두고 크로센 제국에서 파견된 기사들이 하나둘씩 철수하기 시작했다.
두 시간 반을 쉬지 않고 달리던 로보는 숨이 턱에 차오를 무렵에야 마침내 달리는 것을 멈췄다. 무려 백 킬로미터 가까이를 달렸으니 제 아무리 체력이 좋은 로보라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해가 져서 어둑어둑했다. 몬스터의 가장 절친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어둠을 만나자 로보는 서서히 흥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는 본능적으로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장소를 찾아갔다.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고 바닥에 낙엽이 수북이 깔려 있었기에 휴식을 취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레오니아를 팔에 낀 채로 로보는 계속해서 숨을 헐떡거렸다.
"허억, 허억."
완전히 혼절했는지 레오니아는 축 늘어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로보가 마침내 팔을 풀었다.
풀썩
레오니아의 가녀린 몸이 무성하게 깔린 낙엽 위로 맥없이 쓰러졌다. 그 상태로 로보는 계속해서 호흡을 골랐다.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식욕조차 일지 않았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던 로보가 몸의 이상을 느낀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크락?
뭔가 이상하다는 듯 로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고 아랫배에서 뭔가가 묵직하게 치밀어 올랐다.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한 뒤라서 진정될 만도 한데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뛰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오른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놀랍게도 지금 로보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욕정이었다. 떨쳐버리려는 듯 연신 고개를 흔들었지만 이상한 기운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은 오우거의 번식기가 아니다. 게다가 로보는 아직까지 교미(交尾)를 해 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정은 시시각각 로보를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오우거는 원래 철저히 본능에 기초해 살아가는 몬스터다. 그러나 본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순 없다. 어미에게 사냥기술 등등 여러 가지를 전수 받아야만 제대로 된 오우거의 삶을 살 수 있다.
전수받아야 하는 지식 중에는 종족번식의 방법도 있다. 그러나 로보의 삶에는 바로 그 과정이 생략되어 있었다. 때문에 로보는 암컷을 유인하는 방법이라든지 구애절차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상태였다.
그 탓에 로보는 지름까지 단 한 번도 교미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우연히 암컷 오우거를 만나더라도 그저 소 닭 보듯 무심히 지나치기 일쑤였고, 번식기에는 아예 보금자리 깊숙이 파고들어 치밀어 오르는 욕정을 달래야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곳에서 욕정이 치밀어 오르다니….
"크워어억."
마침내 로보는 정신 없이 몸을 배배꼬기 시작했다. 지금 그를 괴롭히고 있는 욕정은 번식기의 그것보다 수십 배 이상 강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보는 지금 강력한 약물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였다.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 콘쥬러스는 단테스에게 치사량의 두 배에 달하는 흥분제를 복용시켰다.
그런데 단테스는 약효가 몸에 퍼진 상태에서 로보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의 육신은 대부분 로보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단테스가 복용한 흥분제 역시 로보의 몸에 파고든 상태라고 봐야 했다.
그래도 다행이라 볼 수 있는 점은 독이나 약물에 대한 오우거의 내성이 엄청나다는 점이다. 어지간한 독으로는 오우거를 중독시키기 힘들다. 그 탓에 로보가 포위망을 탈출할 때까지 몸속의 약효가 발동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로보는 거의 세 시간 가까이를 전력 질주했고 약효는 이미 혈액의 흐름을 따라 몸 구석구석까지 퍼져있었다.
"캬아아악."
급기야 로보는 나무에 대고 머리를 짓찧기 시작했다. 확확 타오르는 욕화로 인해 반쯤 이성을 잃은 듯했다.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욕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참다못한 로보는 고개를 최대한 들고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오우거 특유의 예민한 후각을 이용해서 부근에 살고 있는 암컷을 찾아내려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심산유곡에서 적당한 짝을 찾아내는 것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었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을 만치 뛰고 있었고 훅훅 내뿜은 숨결에는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핏발선 눈동자에서는 이미 초점이 사라진 후였다.
"콰륵?"
정신 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로보의 눈에 맥없이 늘어진 레오니아의 모습이 들어왔다.
걸친 옷이 대부분 찢어발겨져 원초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인간 암컷.
망설이던 로보는 마침내 몸을 움직였다. 단련될 대로 단련된 그의 생존본능은 당장 욕정을 풀지 않을 경우 생명이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로보에게 레오니아는 단순한 먹잇감이 아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줄 생명줄로 인식되고 있었다.
레오니아에게 다가간 로보는 한참을 망설였다. 하지만 망설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고 급기야 거대한 동체를 레오니아의 몸에 실었다. 다행히 교미의 행위는 본능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으응?"
몸을 뒤덮는 묵직한 무게감에 레오니아가 눈을 떴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핏발이 서 있는 한 쌍의 눈동자였다. 짙은 구릿빛 피부, 귀밑까지 찢어져 사람 머리통을 한 입에 삼킬 수 있을 법한 커다란 입 속으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질서정연하게 돋아나 있었다.
바로 지척에서 오우거의 끔찍한 얼굴을 본 레오니아는 또다시 까무러쳤다. 어찌 보면 그녀에겐 기절한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후 이어질 끔찍한 일을 인지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헉, 헉."
의식을 잃고 늘어진 레오니아의 몸 위로 로보의 격한 숨소리가 퍼져나갔다. 그 숨소리는 밤새도록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짹 짹 짹
어디선가 산새 소리가 들려왔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햇살 아래 어렴풋이 드러나는 실루엣 하나가 있었다. 적갈색 피부를 가진 거대한 몬스터, 오우거였다.
로보는 쭈그리고 앉아 한없이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슬이 전신을 뒤덮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참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로보의 눈은 발치를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피투성이가 된 여인 하나가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쿠우우우."
로보가 나지막이 포효를 내질렀다. 마치 여인을 불러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숨결은 금방이라도 끊길 듯 가냘팠고, 기식이 엄엄한 것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애가 타는지 로보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꼬로록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보는 지금 심각한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다. 어제 인간 하나를 먹긴 했지만 오우거의 먹성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개다가 무려 세 시간이나 전력으로 도주한 탓에 위장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하지만 레오니아를 들여다보는 로보의 머릿속에는 식욕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인 인간이 무방비상태로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젯밤의 일로 그녀는 이미 로보에게 단순한 먹잇감이 아닌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 있었다.
물끄러미 레오니아를 지켜보던 로보가 마침내 몸을 폈다. 그가 가진 맹수의 본능은 레오니아의 몸 상태가 극히 위험하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왠지는 몰랐지만 인간 암컷을 이대로 죽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방치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로보는 조심스럽게 레오니아의 몸을 안아들었다.
쿠우우우
결심을 굳힌 듯 로보는 한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치료를 위해 어디론가 옮기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미 그는 멀리서 풍겨오는 인간 특유의 냄새를 포착한 상태였다. 여러 가지 냄새가 복합적으로 풍겨오는 것을 보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부근에 있음이 분명했다.
마음을 정하자 로보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품속의 인간 여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로보의 육중한 동체가 빠른 속력으로 숲 속을 질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니아의 몸은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로보가 레오니아를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아우."
나무로 거칠게 짜 맞춘 망루에서 기지개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망루의 창문으로 한 사내의 머리통이 튀어나왔다. 좁은 곳에서 밤새 새우잠을 잔 탓에 얼굴이 푸석푸석해진 사내는 주먹을 들어 눈곱이 낀 눈을 문질렀다.
"이제 슬슬 마을로 돌아가야겠군."
사내의 역할은 파수꾼이었다. 행여나 있을 몬스터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마을 외곽에 설치된 망루에서 파수를 서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가 사는 곳은 대략 이백 명 가량이 모여 사는 개척 마을이었다. 외진 곳에 있었기에 몬스터의 침입이 잦을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마을사람들이 순번대로 밤을 새워 파수를 서곤 했다.
사내 역시 차례가 되어 망루에서 밤새도록 파수를 선 처지였다. 하지만 근무는 이제 끝났다.
잠을 쫓으려는 듯 고개를 뒤흔든 사내가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줄사다리의 끝 부분을 잡고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런 다음 무심코 숲 쪽을 쳐다보았다. 순간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니?"
뭔가가 빠른 걸음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페론 마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의 시선은 마을로 다가오는 적갈색 물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잠시 후 사내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작정한 듯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몬스터는 다름 아닌 오우거였다.
"세상에… 오, 오우거야!"
사내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이곳에 오우거라니?"
지금껏 오우거처럼 강력한 몬스터가 마을을 습격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기껏해야 오크 산적이나 고블린들이 침입해 소란을 피우는 것이 전부였고 그나마 기습은 대부분 야간에 이루어졌다. 몬스터들이 이처럼 아침 일찍부더 마을을 기습하는 경우는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을을 향해 달려오는 것은 한눈에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오우거였다.
"마, 마을에 알려야 해."
사내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종에 매달려 있는 줄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예감하고 있었다. 육상 몬스터 중 최강이라는 존재, 오우거. 그로 인해 헤아릴 수 없는 마을사람들이 죽어나갈 것이란 사실을.
땡땡땡땡
비상 종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방책 안쪽으로 늘어선 통나무집의 문이 차례대로 열리며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 보았는지 하나같이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지?"
"몬스터가 아침 일쩍부터 기습할 리는 없을텐데…."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의 귓전으로 다급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파수를 보던 사내의 음성이었다.
"오우거다! 오우거 한 마리가 마을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사람들의 얼글에 아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오우거가…."
불신 어린 표정을 지은 것은 잠시였다. 사람들은 곧 무기를 꼬나쥐고 방책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대부분 건장한 사내들이었다. 여자들과 어린아이는 통나무집 속으로 다시 들어가 문을 단단히 틀어 잠궜다.
개척마을답게 마을 주변에는 튼튼한 방책이 빙 둘러가며 세워져 있었다. 통나무를 엮어 세운 방책은 높이가 삼 미터 가까이 되었기에 어지간한 몬스터는 넘어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을의 문 역시 방책과 마찬가지로 육중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오우거를 상대로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활을 쏴야해."
활과 화살을 든 몇몇 사내들이 방책 위로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나이 지긋한 노인에 의해 이내 제지당했다.
"이미 늦었어. 올라가 봐야 개죽음만 당할 뿐이야. 오우거의 키는 4.5미터가 넘어가니 그만 포기하게. 놈에게 낚아 채이기 딱 좋은 높이이니 말일세."
결국 사람들은 방책의 문 옆에 포진한 채 두근대는 가슴을 달래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을이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마을 구성원 전체가 몰살당할 수도 있다. 오우거의 위력은 그 정도로 강력했다. 한 사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발 그냥 지나가는 놈이어야 할 텐데…."
"망루에 있는 캐리가 제일 먼저 당하겠군. 오우거는 나무를 잘 탄다고 들었는데…."
사람들은 파수꾼을 염려하고 있었다. 저 임무를 완수한 대가로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할 테니 말이다.
"뭐 우리들도 대부분 캐리의 뒤를 따라갈 테지만…."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은 여지없이 어긋나버렸다. 달려오던 기세와는 달리 오우거는 흙먼지를 거칠게 일으키며 방책의 문 앞에 멈춰 섰다.
달려온 오우거의 정체는 로보였다.
계획했던 대로 인간들이 사는 마을에 도착한 로보는 가장 먼저 레오니아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그녀는 아직까지 가냘프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가녀린 몸을 살며시 바닥에 내려놓은 로보가 몸을 폈다. 이미 그는 방책 안쪽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캬오오오
로보가 주먹 쥔 두 팔을 양쪽으로 벌린 채 포효성을 내질렀다. 맹수가 자신의 영역권을 알리고 적의 기세를 제압하기 위해 내지르는 포효였다.
그 소리에 사람들은 쩔끔했다. 깜짝 놀라 뒤로 나뒹구는 사람들도 있었다. 포효를 마친 로보는 치켜세운 팔뚝에 불끈 힘을 주어 방책의 문을 냅다 내려쳤다.
우두두둑
견고해 보이는 방책의 문이 그대로 부서져나갔다. 통나무로 짜여진 방책이 단 한 방에 박살나버린 것이다. 그 뒤로 놀란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보였다. 방책의 문이 이처럼 허무하게 부서질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무기를 단단히 꼬나쥐고 있었지만 공포감으로 인해 하나같이 얼굴이 퍼렇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물러서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이 물러날 경우 대신 집 안에 있는 가족들이 오우거의 손에 갈기갈기 찢어질 터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며 오우거가 난입할 때를 기다렸다. 한꺼번에 달려들어 오우거를 덮칠 생각이었다. 물론 모인 사람들 중 반 이상이 희생될 것을 감수하고 벌이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오우거는 사람들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크우. 크우."
한 방에 문을 박살내긴 했지만 오우거는 마을 안으로 난입하지 않았다. 그저 괴성을 내지르며 자신의 발치를 연이어 가리킬 뿐이었다. 부들부들 떨던 사람들의 시선이 오우거의 발치로 향했다.
"사, 사람이잖아?"
"여자야. 벌거벗은 여자."
오우거의 발치에 놓여 있는 것은 피투성이가 된 젊은 여자였다. 오우거는 계속해서 발치의 여자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다. 공포의 대명사인 오우거에게 섣불리 접근할 정도로 담이 큰 사람은 그들 중에서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저 부들부들 떨며 오우거의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로보의 외양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살아온 과정이 험난한 만큼 로보는 같은 나이의 오우거보다 훨씬 덩치도 크고 기세도 강렬했다.
건장한 어른의 몸통보다도 두꺼운 팔뚝, 마치 나무등걸과도 같은 허벅지와 다리, 툭 불거져 나온 근육이 연신 꿈틀거렸고, 핏발선 눈동자와 그 아래 자리한 큼지막한 입과 비어져 나은 송곳니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레오니아를 가리키던 로보는 오래지 않아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저들은 자신이 두려워서 다가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파악하자 로보는 조용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저들이라면 자신과 몸을 섞은 인간 암컷을 잘 돌봐줄 수 있으리라.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크가 오크 무리에서 살아가야 하듯 인간 역시 인간들 틈에서 살아야하는 법이다.
로보가 뒤로 물러나자 사람들은 마침내 용기를 얻었다. 무기를 꼬나쥔 사내들이 조금씩 전진했고 그 틈을 타서 서너 명의 사람들이 레오니아에게로 다가가서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아직까지 살아있습니다."
"휴. 지독하게 당했군. 어쩌다가 이런 상처를…."
혀를 쯔쯔 내찬 중년 사내 하나가 마을 안쪽으로 손짓을 했다. 곧 청년 두 명이 다급히 들것을 들고 달려왔다. 나머지 사내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아직까지 물러나고 있는 오우거를 주시했다.
"저 흉악하고 잔인한 몬스터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상황을 보니 우리에게 이 여인의 치료를 맡기려고 데리고 온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려. 영문은 모르지만 일단 여인을 치료하기로 합시다."
촌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년들이 레오니아를 조심스럽게 들것에 옮겨 실었다. 실려 가는 레오니아를 쳐다보는 로보의 눈망울에는 기이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레오니아의 모습이 마을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로보는 체념한 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크우우우
고개를 든 상태로 한참동안 기성을 내저르던 로보가 이윽고 몸을 돌려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인간 암컷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헤어지는 것이 섭섭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그리고 자신은 오우거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과 오우거는 결코 함게 살 수 있는 종족이 아니었다.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로보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의심 섞인 눈빛으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6화. 제3장 잉태(孕胎) 2
"왕녀님을 구했는가?"
기사단장의 질문에 수색에 나선 기사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뭔가를 내밀었다. 레오니아가 떨어뜨린 바로 그 서클릿이었다.
"이, 이건…."
기사단장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들이 찾아온 것은 추적마법이 걸린 서를릿뿐이었다. 수색에 나섰던 기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흔적을 찾아 추적을 거듭지만 찾아낸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오우거의 속도가 워낙 빨랐기에 저희들로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현기증이 치밀어 오른 듯 기사단장의 몸이 휘청거렸다. 석 달이나 걸린 추격전 끝에 이 먼 트루베니아까지 추적해 왔건만 결국 왕녀를 구해내지 못한 것이다. 기사단장의 머릿속엔 극도로 상심한 네트로만 황태자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 이 일을 어찌해야 할꼬. 그것도 흉포한 오우거에게 약혼녀를 잃었으니…."
옆에 서 있던 기사들의 얼굴 역시 창백하긴 마찬가지였다. 차려입은 복색과 가슴팍에 새겨진 문장이 크로센 제국과 다른 기사들. 그들은 바로 펜슬럿에서 파견된 기사들이었다.
용병대에 발목이 잡힌 탓에 조금 늦게 도착한 그들을 기다린 것은 레오니아 왕녀가 오우거에게 잡혀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기사단장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로써 레오니아 왕녀님에 대한 수색을 종결지어야 할 것 같소."
"안됩니다. 우리 왕녀님을 이대로 포기할 순 없습니다."
펜슬럿의 기사들을 지휘하던 기사가 완강히 고개를 흔들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기사였는데 굳은 얼굴에는 절박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도 이어진 크로센 기사단장의 말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대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소. 오우거가 어디로 도주했는지도 모르거니와 결정적으로 왕녀님이 계신 곳을 알아낼 방도가 없소. 무엇보다도 왕녀님께서 아직까지 살아 계실 것이라 장담하지도 못하오."
"…."
"오우거가 도대제 어떤 몬스터요? 서클릿이 발견된 이상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이면 왕녀님은…."
크로센 기사단장은 뒷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연한 표정의 펜슬럿 기사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떨궜다. 그들 중에서도 레오니아 왕녀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크로센 기사단장이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 돌아들 갑시다. 더 이상 있어봐야 할 일도 없지 않겠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슬럿 기사들은 누구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펜슬럿 국왕의 진노를 염려하고 있었다. 딸을 잃은 데 이어 크로센 황가와 혼인관계를 맺어 국방을 튼튼하게 하려는 계획이 여지없이 물거품이 되었으니 펜슬럿 국왕의 상심은 안봐도 뻔했다.
백발의 노기사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여전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펜슬럿 기사들을 두고 크로센 제국에서 파견된 기사들이 하나둘씩 철수하기 시작했다.
두 시간 반을 쉬지 않고 달리던 로보는 숨이 턱에 차오를 무렵에야 마침내 달리는 것을 멈췄다. 무려 백 킬로미터 가까이를 달렸으니 제 아무리 체력이 좋은 로보라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해가 져서 어둑어둑했다. 몬스터의 가장 절친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어둠을 만나자 로보는 서서히 흥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는 본능적으로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장소를 찾아갔다.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고 바닥에 낙엽이 수북이 깔려 있었기에 휴식을 취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레오니아를 팔에 낀 채로 로보는 계속해서 숨을 헐떡거렸다.
"허억, 허억."
완전히 혼절했는지 레오니아는 축 늘어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로보가 마침내 팔을 풀었다.
풀썩
레오니아의 가녀린 몸이 무성하게 깔린 낙엽 위로 맥없이 쓰러졌다. 그 상태로 로보는 계속해서 호흡을 골랐다.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식욕조차 일지 않았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던 로보가 몸의 이상을 느낀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크락?
뭔가 이상하다는 듯 로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고 아랫배에서 뭔가가 묵직하게 치밀어 올랐다.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한 뒤라서 진정될 만도 한데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뛰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오른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놀랍게도 지금 로보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욕정이었다. 떨쳐버리려는 듯 연신 고개를 흔들었지만 이상한 기운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은 오우거의 번식기가 아니다. 게다가 로보는 아직까지 교미(交尾)를 해 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정은 시시각각 로보를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오우거는 원래 철저히 본능에 기초해 살아가는 몬스터다. 그러나 본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순 없다. 어미에게 사냥기술 등등 여러 가지를 전수 받아야만 제대로 된 오우거의 삶을 살 수 있다.
전수받아야 하는 지식 중에는 종족번식의 방법도 있다. 그러나 로보의 삶에는 바로 그 과정이 생략되어 있었다. 때문에 로보는 암컷을 유인하는 방법이라든지 구애절차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상태였다.
그 탓에 로보는 지름까지 단 한 번도 교미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우연히 암컷 오우거를 만나더라도 그저 소 닭 보듯 무심히 지나치기 일쑤였고, 번식기에는 아예 보금자리 깊숙이 파고들어 치밀어 오르는 욕정을 달래야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곳에서 욕정이 치밀어 오르다니….
"크워어억."
마침내 로보는 정신 없이 몸을 배배꼬기 시작했다. 지금 그를 괴롭히고 있는 욕정은 번식기의 그것보다 수십 배 이상 강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보는 지금 강력한 약물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였다.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 콘쥬러스는 단테스에게 치사량의 두 배에 달하는 흥분제를 복용시켰다.
그런데 단테스는 약효가 몸에 퍼진 상태에서 로보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의 육신은 대부분 로보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단테스가 복용한 흥분제 역시 로보의 몸에 파고든 상태라고 봐야 했다.
그래도 다행이라 볼 수 있는 점은 독이나 약물에 대한 오우거의 내성이 엄청나다는 점이다. 어지간한 독으로는 오우거를 중독시키기 힘들다. 그 탓에 로보가 포위망을 탈출할 때까지 몸속의 약효가 발동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로보는 거의 세 시간 가까이를 전력 질주했고 약효는 이미 혈액의 흐름을 따라 몸 구석구석까지 퍼져있었다.
"캬아아악."
급기야 로보는 나무에 대고 머리를 짓찧기 시작했다. 확확 타오르는 욕화로 인해 반쯤 이성을 잃은 듯했다.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욕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참다못한 로보는 고개를 최대한 들고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오우거 특유의 예민한 후각을 이용해서 부근에 살고 있는 암컷을 찾아내려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심산유곡에서 적당한 짝을 찾아내는 것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었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을 만치 뛰고 있었고 훅훅 내뿜은 숨결에는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핏발선 눈동자에서는 이미 초점이 사라진 후였다.
"콰륵?"
정신 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로보의 눈에 맥없이 늘어진 레오니아의 모습이 들어왔다.
걸친 옷이 대부분 찢어발겨져 원초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인간 암컷.
망설이던 로보는 마침내 몸을 움직였다. 단련될 대로 단련된 그의 생존본능은 당장 욕정을 풀지 않을 경우 생명이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로보에게 레오니아는 단순한 먹잇감이 아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줄 생명줄로 인식되고 있었다.
레오니아에게 다가간 로보는 한참을 망설였다. 하지만 망설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고 급기야 거대한 동체를 레오니아의 몸에 실었다. 다행히 교미의 행위는 본능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으응?"
몸을 뒤덮는 묵직한 무게감에 레오니아가 눈을 떴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핏발이 서 있는 한 쌍의 눈동자였다. 짙은 구릿빛 피부, 귀밑까지 찢어져 사람 머리통을 한 입에 삼킬 수 있을 법한 커다란 입 속으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질서정연하게 돋아나 있었다.
바로 지척에서 오우거의 끔찍한 얼굴을 본 레오니아는 또다시 까무러쳤다. 어찌 보면 그녀에겐 기절한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후 이어질 끔찍한 일을 인지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헉, 헉."
의식을 잃고 늘어진 레오니아의 몸 위로 로보의 격한 숨소리가 퍼져나갔다. 그 숨소리는 밤새도록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짹 짹 짹
어디선가 산새 소리가 들려왔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햇살 아래 어렴풋이 드러나는 실루엣 하나가 있었다. 적갈색 피부를 가진 거대한 몬스터, 오우거였다.
로보는 쭈그리고 앉아 한없이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슬이 전신을 뒤덮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참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로보의 눈은 발치를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피투성이가 된 여인 하나가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쿠우우우."
로보가 나지막이 포효를 내질렀다. 마치 여인을 불러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숨결은 금방이라도 끊길 듯 가냘팠고, 기식이 엄엄한 것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애가 타는지 로보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꼬로록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보는 지금 심각한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다. 어제 인간 하나를 먹긴 했지만 오우거의 먹성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개다가 무려 세 시간이나 전력으로 도주한 탓에 위장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하지만 레오니아를 들여다보는 로보의 머릿속에는 식욕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인 인간이 무방비상태로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젯밤의 일로 그녀는 이미 로보에게 단순한 먹잇감이 아닌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 있었다.
물끄러미 레오니아를 지켜보던 로보가 마침내 몸을 폈다. 그가 가진 맹수의 본능은 레오니아의 몸 상태가 극히 위험하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왠지는 몰랐지만 인간 암컷을 이대로 죽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방치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로보는 조심스럽게 레오니아의 몸을 안아들었다.
쿠우우우
결심을 굳힌 듯 로보는 한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치료를 위해 어디론가 옮기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미 그는 멀리서 풍겨오는 인간 특유의 냄새를 포착한 상태였다. 여러 가지 냄새가 복합적으로 풍겨오는 것을 보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부근에 있음이 분명했다.
마음을 정하자 로보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품속의 인간 여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로보의 육중한 동체가 빠른 속력으로 숲 속을 질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니아의 몸은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로보가 레오니아를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아우."
나무로 거칠게 짜 맞춘 망루에서 기지개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망루의 창문으로 한 사내의 머리통이 튀어나왔다. 좁은 곳에서 밤새 새우잠을 잔 탓에 얼굴이 푸석푸석해진 사내는 주먹을 들어 눈곱이 낀 눈을 문질렀다.
"이제 슬슬 마을로 돌아가야겠군."
사내의 역할은 파수꾼이었다. 행여나 있을 몬스터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마을 외곽에 설치된 망루에서 파수를 서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가 사는 곳은 대략 이백 명 가량이 모여 사는 개척 마을이었다. 외진 곳에 있었기에 몬스터의 침입이 잦을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마을사람들이 순번대로 밤을 새워 파수를 서곤 했다.
사내 역시 차례가 되어 망루에서 밤새도록 파수를 선 처지였다. 하지만 근무는 이제 끝났다.
잠을 쫓으려는 듯 고개를 뒤흔든 사내가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줄사다리의 끝 부분을 잡고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런 다음 무심코 숲 쪽을 쳐다보았다. 순간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니?"
뭔가가 빠른 걸음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페론 마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의 시선은 마을로 다가오는 적갈색 물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잠시 후 사내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작정한 듯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몬스터는 다름 아닌 오우거였다.
"세상에… 오, 오우거야!"
사내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이곳에 오우거라니?"
지금껏 오우거처럼 강력한 몬스터가 마을을 습격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기껏해야 오크 산적이나 고블린들이 침입해 소란을 피우는 것이 전부였고 그나마 기습은 대부분 야간에 이루어졌다. 몬스터들이 이처럼 아침 일찍부더 마을을 기습하는 경우는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을을 향해 달려오는 것은 한눈에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오우거였다.
"마, 마을에 알려야 해."
사내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종에 매달려 있는 줄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예감하고 있었다. 육상 몬스터 중 최강이라는 존재, 오우거. 그로 인해 헤아릴 수 없는 마을사람들이 죽어나갈 것이란 사실을.
땡땡땡땡
비상 종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방책 안쪽으로 늘어선 통나무집의 문이 차례대로 열리며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 보았는지 하나같이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지?"
"몬스터가 아침 일쩍부터 기습할 리는 없을텐데…."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의 귓전으로 다급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파수를 보던 사내의 음성이었다.
"오우거다! 오우거 한 마리가 마을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사람들의 얼글에 아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오우거가…."
불신 어린 표정을 지은 것은 잠시였다. 사람들은 곧 무기를 꼬나쥐고 방책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대부분 건장한 사내들이었다. 여자들과 어린아이는 통나무집 속으로 다시 들어가 문을 단단히 틀어 잠궜다.
개척마을답게 마을 주변에는 튼튼한 방책이 빙 둘러가며 세워져 있었다. 통나무를 엮어 세운 방책은 높이가 삼 미터 가까이 되었기에 어지간한 몬스터는 넘어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을의 문 역시 방책과 마찬가지로 육중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오우거를 상대로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활을 쏴야해."
활과 화살을 든 몇몇 사내들이 방책 위로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나이 지긋한 노인에 의해 이내 제지당했다.
"이미 늦었어. 올라가 봐야 개죽음만 당할 뿐이야. 오우거의 키는 4.5미터가 넘어가니 그만 포기하게. 놈에게 낚아 채이기 딱 좋은 높이이니 말일세."
결국 사람들은 방책의 문 옆에 포진한 채 두근대는 가슴을 달래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을이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마을 구성원 전체가 몰살당할 수도 있다. 오우거의 위력은 그 정도로 강력했다. 한 사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발 그냥 지나가는 놈이어야 할 텐데…."
"망루에 있는 캐리가 제일 먼저 당하겠군. 오우거는 나무를 잘 탄다고 들었는데…."
사람들은 파수꾼을 염려하고 있었다. 저 임무를 완수한 대가로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할 테니 말이다.
"뭐 우리들도 대부분 캐리의 뒤를 따라갈 테지만…."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은 여지없이 어긋나버렸다. 달려오던 기세와는 달리 오우거는 흙먼지를 거칠게 일으키며 방책의 문 앞에 멈춰 섰다.
달려온 오우거의 정체는 로보였다.
계획했던 대로 인간들이 사는 마을에 도착한 로보는 가장 먼저 레오니아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그녀는 아직까지 가냘프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가녀린 몸을 살며시 바닥에 내려놓은 로보가 몸을 폈다. 이미 그는 방책 안쪽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캬오오오
로보가 주먹 쥔 두 팔을 양쪽으로 벌린 채 포효성을 내질렀다. 맹수가 자신의 영역권을 알리고 적의 기세를 제압하기 위해 내지르는 포효였다.
그 소리에 사람들은 쩔끔했다. 깜짝 놀라 뒤로 나뒹구는 사람들도 있었다. 포효를 마친 로보는 치켜세운 팔뚝에 불끈 힘을 주어 방책의 문을 냅다 내려쳤다.
우두두둑
견고해 보이는 방책의 문이 그대로 부서져나갔다. 통나무로 짜여진 방책이 단 한 방에 박살나버린 것이다. 그 뒤로 놀란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보였다. 방책의 문이 이처럼 허무하게 부서질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무기를 단단히 꼬나쥐고 있었지만 공포감으로 인해 하나같이 얼굴이 퍼렇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물러서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이 물러날 경우 대신 집 안에 있는 가족들이 오우거의 손에 갈기갈기 찢어질 터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며 오우거가 난입할 때를 기다렸다. 한꺼번에 달려들어 오우거를 덮칠 생각이었다. 물론 모인 사람들 중 반 이상이 희생될 것을 감수하고 벌이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오우거는 사람들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크우. 크우."
한 방에 문을 박살내긴 했지만 오우거는 마을 안으로 난입하지 않았다. 그저 괴성을 내지르며 자신의 발치를 연이어 가리킬 뿐이었다. 부들부들 떨던 사람들의 시선이 오우거의 발치로 향했다.
"사, 사람이잖아?"
"여자야. 벌거벗은 여자."
오우거의 발치에 놓여 있는 것은 피투성이가 된 젊은 여자였다. 오우거는 계속해서 발치의 여자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다. 공포의 대명사인 오우거에게 섣불리 접근할 정도로 담이 큰 사람은 그들 중에서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저 부들부들 떨며 오우거의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로보의 외양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살아온 과정이 험난한 만큼 로보는 같은 나이의 오우거보다 훨씬 덩치도 크고 기세도 강렬했다.
건장한 어른의 몸통보다도 두꺼운 팔뚝, 마치 나무등걸과도 같은 허벅지와 다리, 툭 불거져 나온 근육이 연신 꿈틀거렸고, 핏발선 눈동자와 그 아래 자리한 큼지막한 입과 비어져 나은 송곳니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레오니아를 가리키던 로보는 오래지 않아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저들은 자신이 두려워서 다가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파악하자 로보는 조용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저들이라면 자신과 몸을 섞은 인간 암컷을 잘 돌봐줄 수 있으리라.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크가 오크 무리에서 살아가야 하듯 인간 역시 인간들 틈에서 살아야하는 법이다.
로보가 뒤로 물러나자 사람들은 마침내 용기를 얻었다. 무기를 꼬나쥔 사내들이 조금씩 전진했고 그 틈을 타서 서너 명의 사람들이 레오니아에게로 다가가서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아직까지 살아있습니다."
"휴. 지독하게 당했군. 어쩌다가 이런 상처를…."
혀를 쯔쯔 내찬 중년 사내 하나가 마을 안쪽으로 손짓을 했다. 곧 청년 두 명이 다급히 들것을 들고 달려왔다. 나머지 사내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아직까지 물러나고 있는 오우거를 주시했다.
"저 흉악하고 잔인한 몬스터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상황을 보니 우리에게 이 여인의 치료를 맡기려고 데리고 온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려. 영문은 모르지만 일단 여인을 치료하기로 합시다."
촌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년들이 레오니아를 조심스럽게 들것에 옮겨 실었다. 실려 가는 레오니아를 쳐다보는 로보의 눈망울에는 기이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레오니아의 모습이 마을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로보는 체념한 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크우우우
고개를 든 상태로 한참동안 기성을 내저르던 로보가 이윽고 몸을 돌려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인간 암컷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헤어지는 것이 섭섭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그리고 자신은 오우거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과 오우거는 결코 함게 살 수 있는 종족이 아니었다.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로보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의심 섞인 눈빛으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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