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제3장 잉태(孕胎) 1

등록 2026.10.13 9.7천자 조회 3 좋아요 0 댓글 0 15세 이상 이용가
하프 블러드 : 1권 - 오우거의 피를 깨우지 마라
5화. 제3장 잉태(孕胎) 1


마차가 있는 곳의 상황은 조금도 변동이 없었다.
"헉, 헉."
격한 인간들의 숨소리가 연신 마차 밖으로 흘러나왔다. 모습을 드러낸 로보는 머뭇거림 없이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마차 위에 인간의 시체가 둘 놓여있었지만 로보는 그것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오우거는 직접 사냥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
하지만 로보는 쉽사리 마차 속을 덮칠 수가 없었다. 마차 안의 인간 하나에게서 짙은 마나의 존재감이 풍겨왔기 때문이다.
로보에게 인간이란 존재는 단 한 가지로 정의내릴 수 있었다. 맛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한없이 위험한 먹잇감.
인간은 하나 하나는 약하지만 여러 명이 모일 경우 극히 위험해지는 종족이다. 경솔히 행동하다간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로보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인간들 중에는 무척 특이한 놈들이 있었다. 다름 아닌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인간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로보는 그런 인간들이 혼자서도 오우거의 몸을 쉽게 토막 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에겐 여러 명의 기사와 싸워본 경험이 있었다. 현상금 추적자 중에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소드 엑스퍼트가 심심찮게 끼어있었기에 벌써 여러 번이나 죽을 고비를 맞아야 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것을 모면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로보 특유의 생존본능이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로보는 머뭇거림 없이 도주를 결심했고, 오우거의 빠른 몸놀림은 지금까지 여러 번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로보는 한 가지 지식을 얻었다. 사냥감을 발견하더라도 마나가 충만하게 느껴지는 인간은 가급적 습격하지 말아야 하며 필요하다면 철저히 기습해야 한다는 사실을.
콘쥬러스와 탈레스를 섣불리 공격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쉽사리 마차로 접근하지 못하던 로보. 하지만 마차 안에서 풍겨지는 인간의 땀 냄새는 마침내 로보의 이성을 마비시키고야 말았다.
"캬아아악."
참지 못한 로보가 포효성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콰쾅
마차의 문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마차 속으로 뛰어든 로보의 시야에 미묘하게 엉킨 채 꿈틀거리는 인간 둘의 모습이 들어왔다.
로보는 머뭇거림 없이 손을 뻗어 인간 하나의 머리통을 쥐었다. 마나의 존재감이 유난히 짙게 느껴지는 인간이었다. 위험한 사냥감을 먼저 처리하는 것은 로보에겐 일종의 본능이나 마찬가지였다.
강철 같은 로보의 손아귀가 얼굴을 그러쥐자 인간은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읍."
하지만 로보의 손바닥이 얼굴을 단단히 덮고 있었기에 비명소리는 새어나오지 않았다. 앞서의 경우에도 로보는 이런 방법으로 비명이 새어나오는 것을 막았다. 그런 탓에 마루스의 정보부 요원들조차도 동료들이 당하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인간의 머리통을 감싸 쥔 상태로 로보는 근육에 힘을 주었다. 이미 왼손은 인간의 어깨를 단단히 누르고 있었다.
뚜두둑
인간의 목에서 뭔가가 부러지고 끊어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의 목이란 그리 쉽게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오우거에겐 인간의 목을 지탱하는 뼈와 근육을 간단히 끊어버릴 힘이 있다.
뿌드득
인간의 머리통은 너무도 허무하게 뽑혀 나왔다. 동시에 아리에 깔린 여인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꺄아악!"
저항을 포기한 채 단테스의 움직임에 맥없이 몸을 내맡기던 레오니아. 마차 문이 박살나는 순간 그녀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마차의 문을 응시하는 눈동자에는 일말의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혹시 자신을 구하러 온 기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빛은 금세 공포로 뒤바뀌었다. 마차 속으로 뛰어 들어온 것은 전신이 피로 범벅이 된 끔찍한 몬스터였다.
그리고 곧 그녀는 지금껏 상상도 하지 않았던 끔찍한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자신의 몸 위에서 헐떡거리던 단테스의 목이 허무하게 뽑혀나가는 모습은 그녀에게 마치 지옥과도 같은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아아악!"
더 없이 잔인한 광경에 그녀는 목구멍이 터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단테스의 몸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얼굴을 뒤덮자 그녀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더 이상 이성을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테스의 목을 간단히 뽑아버린 로보의 시선이 레오니아에게 가 닿았다. 그녀의 목을 마저 뽑아버리려고 손을 내밀던 로보는 곧 손을 거둬들였다. 상대가 기절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단테스의 몸통을 집어든 로보는 몸에 걸친 옷을 마구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로보는 사냥감을 이 자리에서 먹어치울 생각이었다. 밖에서 느껴지는 수상쩍은 기미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마차 주변으로 수많은 인간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로보의 감각은 접근하는 인간이 물경 백 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파악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들이 오기 전에 마차 속의 인간 둘을 먹어치운 뒤 상황을 보아 도주하려는 것이 로보의 생각이었다. 날카로운 손톱으로 배를 가르자 내장이 주룩 밀려나왔다.
주르르
로보는 흘러나온 단테스의 내장을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비타민이 풍부한 내장은 인간의 신체 중에서도 로보가 가장 좋아하는 부위였다. 마차 구석에 나동그라진 단테스의 핏발 선 눈동자가 오우거의 배속으로 들어가는 자신의 몸뚱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비참한 최후였다.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아버지와 펜슬럿을 배신했던 단테스. 하지만 종국에는 마루스에게도 버림받았고, 이처럼 황량한 곳애서 스물다섯의 한 많은 생애를 접어야 했다. 그것도 오우거의 먹잇감으로.
단테스의 몸은 오래지 않아 굵은 뼈만 남기고 로보의 뱃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만족스런 표정으로 입가를 핥은 로보가 막 레오니아의 머리통을 움켜쥐려는 순간 마차 밖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단테스, 너는 이미 포위되었다."
로보는 흠칫 했다. 인간들이 이처럼 빨리 당도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로보는 손을 돌려 레오니아의 허리를 감아들었다. 여간해서는 맛보기 힘든 인간 암컷을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기에 보금자리로 돌아가서 잡아먹을 생각이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 밖에서 계속해서 고함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우린 크로센 제국에서 파견된 기사들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와라. 레오니아 왕녀님을 순순히 넘겨준다면 정당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조처해 주마."
하지만 벌써 로보의 뱃속으로 사라진 단테스가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마차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음성이 서서히 노기를 띠어가고 있었다.
"네가 도망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순순히 투항하라. 이것은 마지막 경고다."
그 말과 동시에 검을 뽑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챵 차창
로보는 고민했다. 생각 같아서는 그대로 달려 나가 한바탕 휘저어버리고 싶었지만 본능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인간. 그들의 장검은 오우거의 질긴 근육과 뼈를 가볍게 갈라버린다.
그런데 마차를 포위하고 있는 인간들의 몸에서는 하나같이 짙은 마나의 존재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단 한 명도 예외가 없었기에 로보는 비로소 자신이 일생일대의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 아무리 용맹한 오우거라도 기사에게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는 없다.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기사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철저한 기습뿐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포위된 상태에서의 기습은 시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마차 속에 있을 수도 없었기에 로보는 손을 뻗어 마차 구석에 나뒹굴고 있던 단테스의 머리통을 살짝 집어 들었다. 그것을 이용해 인간들의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휘익
뭔가 둥그런 것이 창문을 통해 튀어나오자 마차를 포위하고 있던 기사들은 바짝 긴장했다.
"조심해."
하나같이 은백색 갑주를 걸치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절도 있는 움직임과 흐트러지지 않는 진형은 그들이 엄청난 훈련을 받아왔음을 알게 해주었다.
로보가 집어던진 단테스의 머리통이 이리저리 부딪히며 맥없이 굴러갔다. 하지만 단 한 명의 기사도 자신이 맡은 위치를 벗어나지 않았다.
데구르르
단테스의 머리통은 마침내 한 기사의 발치에 굴러가서 멈췄다. 그것을 본 기사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이, 이것?"
단테스의 인상착의는 추격에 나선 모든 기사들이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이것은 단테스의 머리통입니다."
그 말에 기사들이 깜짝 놀라는 순간 마차의 지붕이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콰쾅
그리로 로보의 육중한 몸이 솟구쳤다.
놀라운 도약력으로 허공으로 뛰어오른 로보는 주위를 면밀히 살폈다. 분명 어딘가 빠져나갈 틈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들의 포위망이 워낙 정교했기에 빠져나갈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로보는 할 수 없이 마부석에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저, 저런…."
"오우거야. 이곳에서 저놈의 습격을 받았군."
당황하긴 했지만 기사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제 아무리 지상 최강의 몬스터인 오우거라 해도 소드 엑스퍼트인 자신들에겐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단 한 명만 나서더라도 어렵지 않게 오우거의 목숨을 끊어버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상황은 그리 만만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와, 왕녀님."
오우거의 팔에 척 걸쳐있는 레오니아 왕녀를 보자 선두에 선 기사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그들이 구해내야 할 대상이 흉포한 몬스터의 수중에 잡혀있었다. 모두들 당혹스런 표정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기사들의 우두머리가 곤혹스런 표정으로 레오니아 왕녀의 상태를 살폈다. 가슴이 보일락말락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아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 같았지만 경거망동할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오우거에겐 왕녀의 목을 부러뜨리는 것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좋지 않군. 하필이면 오우거에게…."
그가 보고 있는 사이 기사들은 마차를 축으로 물샐 틈없는 포위망을 갖추었다. 포위망은 제 아무리 도약력이 뛰어난 오우거라도 쉽사리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촘촘했다.
오우거에게 상황을 판단할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기사단장은 선두에 선 기사들에게 공격을 명했다.
"공격하라. 단 오우거의 몸에 적당히 상처를 입히는 선에서 끝내야 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네 명의 기사들이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기사단장의 대처는 오우거와 대처하는 상황에서 가장 적절하다고 볼 수 있었다.
오우거는 성질이 무진장 급한 데다 극도로 난폭한 몬스터. 상처를 입을 경우 앞뒤 가리지 않고 기사들을 공격해 들어갈 공산이 컸다. 물론 팔에 끼고 있는 왕녀는 신경 쓰지 않고 내팽개쳐버릴 것이다.
거기에 대비해서 기사단장은 열 명의 기사들을 포진시켰다. 왕녀의 몸을 받아들기 위해서. 전혀 나무랄 데 없는 대응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기사단장은 상대가 중부대륙의 살육자 로보라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크웍?
로보는 분노했다.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기사들이 사정없이 검을 휘둘러왔기 때문이다. 급히 몸을 뒤틀었지만 상대는 하나같이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로보의 움직임에 맞춰 번개처럼 파고들어간 기사들은 로보의 팔과 다리에 제법 깊은 상처를 새긴 다음 뒤로 물러났다. 오우거의 피부는 어지간한 무기가 통하지 않을 만큼 질기다. 그러나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린 기사들의 장검은 로보의 살갗을 거침없이 갈라버렸다.
푸슛
심각한 통증과 함께 핏줄기가 흘러나오자 핏발 선 로보의 눈동자가 서서히 광기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확인한 기사단장의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놈이 곧 공격해 들어올 것이다. 습격에 대비하고 나머지는 왕녀님을 받을 채비를 하라."
하지만 그의 예상은 덧없이 빗나가버렸다. 로보는 섣불리 기사들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팔에 낀 레오니아를 풀어주지도 않았다. 지금껏 수없이 위기를 헤쳐 가며 단련된 본능이 로보의 이성을 단단히 붙들어 매고 있었다.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보는 더욱 더 몸을 움츠렸다. 여전히 강철 같은 팔뚝으로 왕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은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기사단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이상하군. 평범한 오우거라면 앞뒤 가릴 것 없이 달려들었을 텐데…."
조바심이 치밀어 오른 기사단장은 휘하 기사들에게 다시 명령을 내렸다. 명을 받은 기사 네 명이 또다시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완벽한 합격술에 의한 공격이었다.
상대가 몸을 피할 방위까지 모조리 염두에 둔 공격. 사력을 다해 몸을 뒤틀었지만 로보는 이번에도 공격을 피해내지 못하고 또다시 세 줄기의 상처를 몸에 아로새겨야 했다.
하지만 예상치 않게도 그로 인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으니….
"헉."
로보가 무심코 휘두른 레오니아 왕녀의 몸이 정확히 검을 쩔러가는 경로에 놓이자 공격해 들어가던 기사가 대경실색하여 몸을 틀었다. 피하기 위해 오우거가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으로 보였지만 그로서는 감히 왕녀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없었다.
틈을 발견한 로보는 머뭇거림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쾅
돌덩이 같은 로보의 주먹이 투구를 정통으로 강타했다. 일격을 얻어맞은 기사는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 한쪽 구석에 쑤셔 박혔다. 의식을 잃은 기사의 코와 입에서는 실낱같은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머리에 쓴 투구가 형편없이 찌그러져 버린 처참한 모습이었다.
오우거의 위력을 실감한 기사들은 바짝 긴장했다.
"조심해. 엄청난 힘을 가진 녀석이야."
기사들이 다시 진형을 갖췄다. 그리고 쓰러진 기사 대신 다른 기사가 나와 한 명이 빠진 틈을 메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로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이유는 모르지만 저 인간들은 뭔가를 꺼리고 있다. 바로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인간 암컷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간파하자 로보는 인간 암컷을 들어 앞을 가렸다.
"이, 이런…."
기사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저 단순하고 무식한 오우거가 설마 왕녀의 몸을 방패막이로 삼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기사단장의 얼굴에도 난감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정말 예사 녀석이 아니로군."
그 상태로 묘한 대치가 계속되었다. 호시탐탐 빠져나갈 틈을 찾는 로보와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기사들은 누구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하지만 불리한 것은 역시 상처를 입은 로보였다. 트롤에 버금가는 회복력을 지닌 덕에 피부에 난 상처는 거의 아물었지만 잃은 피와 기력을 보충할 순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로보는 사방을 주의 깊게 살폈다.
"크락."
순간 로보의 눈이 빛났다. 포위망이 비교적 얇은 좌측, 기사들이 포진한 뒤로 수십 마리의 말들이 메여 있는 것을 본 것이다. 바로 기사들이 이곳까지 타고 온 말들이었다. 로보의 냄새를 맡은 말들은 극도의 불안감에 잠겨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오우거는 먹이사슬의 최상위 등급에 놓여 있는 몬스터. 말들이 그런 오우거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비록 전쟁터의 공포를 극복하도록 훈련받은 전마였지만 흉포한 몬스터에 대한 공포만은 어쩔 수 없었다.
말의 본능적인 공포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에 로보는 머뭇거림 없이 몸을 날렸다. 인간보다 적어도 세 배는 빠르다는 오우거의 몸놀림이 순식간에 발현되었다. 로보의 육중한 몸이 말들이 매여 있는 곳을 향해 쏜살같이 질주했다.
"마, 막아라."
당황한 기사들이 창검을 들이댔다. 하지만 그들은 곧 검을 거두고 분분히 옆으로 비켜나야 했다. 다급하게 들려온 기사단장의 명령 때문이었다.
"검을 거둬라. 왕녀님의 몸에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 대신 오우거의 다리를 잘라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도록 만들어라."
옆으로 물러나 길을 터준 기사들이 숙련된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다리의 근육을 잘라 로보를 쓰러뜨리려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오우거의 가공할 만한 도약력을 간과한 것이 그들이 범한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단숨에 3미터 이상 뛰어오르는 것은 기본이었고, 한 번 도약으로 십 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한순간에 좁힐 수 있는 것이 오우거의 도약력이다. 게다가 로보는 보통의 오우거의 순발력을 훨씬 능가했다.
수십 자루의 장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로보의 발은 이미 힘껏 땅을 박차고 있었다.
부우웅
로보의 거대한 동체가 마치 거짓말처럼 허공에 떠올랐다.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장검은 로보의 그림자만을 헛되이 갈랐을 뿐이었다. 목표를 잃은 기사들의 경악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헛!"
"이, 이런!"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로보는 예정했던 장소, 즉 말들이 매여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로보는 달려가던 기세 그대로 어깨를 내밀어 말들이 매여 있는 나무를 들이받아버렸다.
우지직
말들을 매어놓은 나무 다섯 그루가 한꺼번에 꺾여나갔다. 로보는 머뭇거림 없이 주먹을 들어 걸리적거리는 말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퍽
머리가 박살나며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인간보다 단단한 말의 두개골이 마치 수박처럼 부서져버린 것이었다. 순식간에 명을 달리한 세 마리의 말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것이 기폭제였다.
히히히힝
술렁이던 말들이 냅다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늑대가 양떼 사이에 뛰어들면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그곳은 곧 놀라 날뛰는 말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마, 막아라!"
기사들이 사력을 다해 로보를 잡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미쳐 날뛰는 말들로 인해 도저히 로보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뜻밖의 상황에 기사단장은 말을 잊었다. 지능지수가 낮은 오우거가 저토록 능숙하게 상황을 이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또다시 몇 명의 기사가 말발굽에 채여 쓰러졌다. 중갑주를 걸쳤다고는 하지만 받는 충격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워, 워."
기사들이 몰려들어 필사적으로 말을 달랬지만 놀란 말들은 쉽사리 안정을 되찾지 못했다. 기사들이 멍하니 지켜보는 사이 로보의 육중한 몸이 유유히 숲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사들은 오우거의 도주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미쳐 날뛰는 말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로보는 정신 없이 달렸다. 베인 상처에서 아릿하게 통증이 전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검기(劍氣)에 당한 상처는 칼날에 직접 베이는 것보다 상처의 회복이 더디다. 검에 맺힌 마나가 격중된 부근의 세포를 괴사시키기 때문이다.
트롤에 버금가는 회복력을 지닌 로보라 출혈은 금방 멎었지만 내상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보는 끝없는 도주를 거듭했다. 자신의 뒤를 쫓는 인간들. 그들은 최강의 육상 몬스터인 오우거보다 월등히 강했다. 정면으로 붙는다면 단 한 명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로보는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달리는 데에만 전념했다.
후두두둑
잔 나뭇가지들이 로보의 얼굴과 몸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로보가 워낙 빠른 속력으로 숲을 질주하고 있었기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것은 로보의 팔에 끼어있는 레오니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로보가 포위망을 뚫고 도주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시 절망감에 휩싸여야 했다. 극히 잔인한 거구의 몬스터, 단테스의 목을 가볍게 뽑아버린 문제의 그 오우거가 자신을 옆구리에 낀 채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육식 몬스터 특유의 노린내가 역하게 풍겨졌고 썩어 가는 피비린내는 그녀의 정신을 아득하게 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들려오는 역한 숨소리는 작금의 상황이 꿈이 아니란 것을 일깨워주었다.
그녀는 눈을 꼭 감은 채 신을 찾았다.
"시, 신이시여. 어, 어찌 이런 시련을 저, 저에게 주시나이까?"
그녀의 염원이 다행히 하늘에 닿은 모양이었다.
"악."
제법 굵어 보이는 나뭇가지 하나가 그녀의 이마를 강타했다. 강렬한 충격에 레오니아 왕녀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축 늘어진 그녀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로보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속력이었다.
땅 데구르르르
로보가 달려간 직후 뭔가가 맑은 금속음을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것은 눈부신 은빛이 감도는 아름다운 서클릿이었다. 나뭇가지에 부딪힌 충격으로 레오니아의 머리에서 떨어져 나온 서클릿은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겠다는 듯이 낙엽 위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