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제1장] 혈무단(血霧團)의 난(亂)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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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제1장] 혈무단(血霧團)의 난(亂) 2


“혈무단의 활동이 본 련의 주목을 특별히 끄는 이유는 그들에게 기습당한 문파들이 모두
본 련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풍서는 제남(濟南)의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검은 선으로 그어진 지도 위에는 붉고 파란 점들이 여럿 그려져 있었는데, 풍서가 손에 든
막대로 짚어 가는 점들은 모두 푸른 점이었다.
“제남에서 활동하는 무림방파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모두 일곱 개 정도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나타난...”
막대는 네 개의 파란 점을 다시 한 번 가리켰다.
“이 네 방파가 본 련에 극히 우호적입니다. 아니, 우호적이었습니다.”
풍서(風瑞)가 ‘우호적’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 상대방의 입장을 상당 부분 고려
한 표현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일종의 하부 조직이란 표현이 적당했다.
큰 나무의 그늘에서 비바람을 피하는 작은 수목처럼, 태무련이란 조직의 산하에는 많은 군
소 방파가 있었다.
그들은 태무련의 힘에 의해 비호받는 가운데 강호 분란(紛亂)을 예방할 수 있었고, 태무련은
그들의 상납(上納)으로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또한 강제로 기존 무림 세력이 있는 곳에 지부를 늘림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분쟁 또한 피
할 수 있으니,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셈이 아닌가?
그들을 통해 얻어지는 강호 정세에 대한 정보는 태무련의 활동에 크나큰 도움이 됨도 물론
이었다.
풍서의 말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공격받은 문파가 수호방(水湖幇)과 사상보(四象堡), 산수당(山水堂)과 녹엽궁(綠葉宮)이라
는 것은 혈무단이란 집단이 일으킨 이번 혈사(血事)가 본 련과 관련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마친 풍서는 지도 앞에서 몸을 돌렸다.
자신이 보고할 내용은 모두 끝났음을 뜻하는 행동이었다.
사실 직접 이런 설명을 하기에 태무련의 총사라는 그의 직위는 너무 높았다.
어떤 일이건 가능하다면 스스로 나서서 해결하고 싶어하는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예였
다.
“그들 네 방파의 힘은 그다지 약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겨우 이들만 살아남았다
는 거요?”
태사의에 앉은 채로 말하는 백리현의 시선은 어느새 대청 중앙의 원탁 주위에 서 있는 피투
성이 세 명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원래부터 서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상을 입은 탓에 편안히 자리에 앉아 있던 그들이 백리현이 들어오자 긴장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던 것이다.
풍서는 고개를 끄덕여 백리현의 질문에 답했다.
“그렇습니다. 어젯밤 감청의 제보를 듣고 급히 혈무단에 대한 보고를 드린 후 수소문한 추
가 생존자들입니다.”
“무섭군! 세 명뿐이라니... 하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 문파도 있단 말이외까?”
“두 군데입니다. 수호방과 녹엽궁에서는 살아남은 자가 없습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둘은 사상보 출신이며 다른 한 명은 산수당입니다.”
풍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산수당 출신이라는 중년인이 손을 모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산수당의 감청(甘請)이 연주를 뵙습니다. 부디 저, 저희의 원한을...”
상처가 상당한 듯 그의 옷 군데군데에는 많은 피가 묻어 있어, 산발이 된 머리를 조아리자
비통한 분위기가 절로 일어났다.
사상보의 남녀 또한 조금도 지체없이 백리현에게 인사했다.
“연주님, 삼십여 식솔들 중에서 오직 저희 부부만이 살아남았습니다. 부디... 부디 이 한을
풀어 주십시오.”
그들의 차림 역시 감청보다 나을 것이 조금도 없었다.
특히 여인 쪽은 끊임없이 떨고 있어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백리현은 깊은 눈으로 그들 셋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이런, 아직도 서 있었는가? 총사! 어서 그들을 앉히도록 하시구려.”
상처가 심한 세 명이 서 있는 것을 이제서야 보았단 말인가?
어쨌든 그들이 풍서의 권유에 따라 자리에 앉은 후, 백리현은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이 다시 바라본 사람은 풍서(風瑞)였다.
"나머지 세 방파, 우리와 관련이 적은 그들은 공격받지 않았단 말이오?"
“예, 전혀. 때문에 굳이 어젯밤 서둘러 보고를 드린 것이고, 오늘 이른 시간부터 연주님을
청했던 것입니다.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틀림없이 혈무단의 행사는 본 련과 관련이 있습니
다.”
백리현은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총사의 분석이라면 틀림없겠지. 장로회나 다른 수뇌들에게는 아직 알리지 않았소?”
“예. 혈겁이 비록 잔인했다 하나 아직은 제남 지역에 국한된 지엽적(枝葉的)인 것이지 않습
니까? 또 장로회까지 올라간다면 관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신속한 대응도 어렵다고 판단했
습니다.”
“일리가 있구려. 뭐, 이 정도의 일이라면 말이오.”
백리현의 마지막 말은 혼잣말인 듯 나직했다. 하지만 대청 중앙에 앉은 세 명의 생존자들의
귀에 들리기에는 충분했다.
아무리 큰일을 다루는 자라고는 하나 이러한 말투는...?
물론 그의 시점에서는 작은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생존자들의 입장은 어떤가? 그들에겐 자신들의 가장 가까운 친지와 동문들의 생명
을 무참히 앗아 간 혈겁이었다.
감청은 두 주먹을 힘껏 쥐었다.
핏줄이 팔뚝에서 불거져 나왔으나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심지어 노한 기색을 겉으로 드러낼 수조차 없었다.
다름 아닌 태무련의 위세 탓이었다. 당당한 태무련의 연주가 한 말에 분노하기엔 복수를 부
탁하러 온 자신의 입장이 너무나 왜소했다.
태무련의 연주에게 이 정도의 일은 그저 걸어가다가 작은 돌멩이에 발끝이 걸리는 정도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사상보(四象堡)의 부부 또한 아무 말 못 하고 자리만 지키고 있음을 감청은 보았다.
이런 것이 약한 자의 비극인가? 힘없는 자는 항상 서럽다.
강자는 약자의 죽음보다도 자신의 손가락 끝에 박힌 작은 가시를 더욱 아파하는 법이다.
이러한 약자의 심정은 전혀 모르는가? 백리현은 무심히 말을 이었다.
이제 그의 질문은 풍서가 아닌 천맹에게 떨어지고 있었다.
“네 개 문파의 힘은 어느 정도인가?”
느닷없는 질문에도 천맹(天盲)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의 입은 자연스럽게 열리며 백리현의 질문을 받
았다.
“사상보와 산수당은 하(下)에 속합니다. 수호방은 중중(中中) 정도라 할 수 있으며, 녹엽궁
은 중상(中上)으로 분류됩니다.”
자신들의 문파를 망설임없이 하급(下級)으로 매도했지만 세 명의 생존자들은 이번 역시 아
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굳어 버린 듯 그들은 몸조차 움직이지 못했고, 백리현만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 말인가? 힘이 강한 문파는 전멸하고 약한 쪽이 오히려 살아남았다는 말인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다시 천맹에게 말했다.
“생존자는 세 명이네. 자네가 보기에... 느끼기에 이들은 어떤가? 몸의 상태나 무공 수위 말
이야.”
천맹의 귀가 약간 쫑긋거렸다. 잠깐 생각을 정리한 그는 이윽고 말했다.
“숨소리는 비록 거칩니다. 하지만 지나친 흥분 탓이지, 내상(內傷)으로 인한 것은 아닙니다.
무공은... 중간에서 조금 떨어지는 정도일까요? 혈행(血行)을 일으키는 심장의 박동이 제법
힘이 있고 호흡 또한 꽤 긴 편이지만 고르지는 못합니다.”
하나를 잃으면 하늘은 다른 것으로써 보상을 한다던가?
단지 소리만 듣고서 이러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천맹의 능력은 누가 보아도 놀라운 것이었
다.
하지만 백리현에겐 조금도 놀라운 것이 아닌 듯했다.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또다시 물었던 것이다.
“좋아. 그럼 산수당주나 사상보주와 비교하면 어떤가?”
“당연히... 그들보다 손색이 많습니다. 산수당주나 사상보주는 문파의 크기에 비해 상당한
고수였습니다. 때문에 본 련과 연관도 맺었던 것이구요.”
“좋아, 그렇단 말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백리현은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일어서며 세 명의 생존자를 쳐다보았는데, 순간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사로잡힌 세 명
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부동 자세를 취하고 말았다.
마치 어른이 일어섰는데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는 아랫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백리현은 그들의 반응을 전혀 보지 못한 듯했다.
그는 무심한 시선(視線)을 그들에게서 거두고 또다시 풍서를 바라보았다.
입은 전혀 열리지 않았지만 총사 풍서(風瑞)는 백리현의 뜻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백리현은 눈빛만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재주가 있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그 전달은 매우
정확했다.
풍서는 내심 나직한 한숨을 내쉬고는 손을 들어올렸다.
파팟!
마치 별안간 타오르는 촛불 같았다. 전신에 불꽃 같은 홍의(紅衣)를 걸친 여섯 명의 무사가
바닥에서 솟아나는 모습은.
어쩌면 천장에서 나타났을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빠른 탓에 확실히 구분하는 것은 무리였다.
나타난 무사들은 두 명이 조(組)가 되어 감청을 비롯한 세 명의 생존자들을 좌우에서 붙잡
았고, 생존자들은 놀람으로 안색이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이, 이게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를...?”
대청 안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하지만 잠시였다.
나타날 때처럼 또다시 순식간에 사라지는 무사들과 함께 감청 등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청 안에 침묵(沈默)이 찾아왔다.
백리현은 깊은 눈으로 서 있었고, 그 뒤로 천맹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풍서가 내쉬는 한숨 소리만 또다시 대청 안을 흘러갔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백리현은 풍서에게 물었다.
“총사께선 내 판단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듯하군요?”
풍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들 중에는... 감청은 무고한 듯합니다.”
백리현 또한 그의 말에는 동감했다. 일부러 그들 문파를 비하하는 말을 했을 때 감청만이
진실된 분노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총사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 그
들은 살아날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도 살아났으니...”
백리현은 다시 태사의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지. 첫째, 그들이 혈무단과 내통한 첩자였을 가능성과, 둘째...”
백리현은 고개를 돌려 천맹을 보았다.
“두 번째 가능성은 천맹, 자네가 말해 보려는가?”
천맹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 다시 한 번 즉시 백리현의 질문에 대답했다.
“혈무단이 의도적으로 살려 둔 것일 테지요. 무언가를 우리에게 알려 주기 위해.”
백리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난 오히려 두 번째 가능성에 걸고 싶다네. 이유를 알겠는가?”
“혈무단이 수호방과 녹엽궁을 모두 전멸(全滅)시킬 정도의 능력과 잔인함을 지녔다면 첩자
라고 살려 두진 않았을 것입니다. 또 무공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세 명이니 놓치지도 않
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맹의 대답에 백리현은 더욱 만족스러워졌다.
백리현은 풍서를 보며 물었다.
“총사! 혈무단이란 이름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이오?”
“감청(甘請)을 통해서입니다.”
“그렇지. 일단 그들은 감청을 살려 줌으로써 자신들 문파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리는 데 성
공했지 않소이까?”
풍서는 느끼는 바가 있었다.
“연주께서는 그럼, 혈무단이 세 명을 살려 둔 것이... 일종의...”
“바로 그렇소. 우리에게 도전장을 보낸 것이지. 글이나 말이 아닌, 사람을 통해서.”
“그렇다면 감청 등을 뇌옥으로 압송한 것은 지나친...”
풍서는 말끝을 흐렸다.
지나친 처사가 아니냐는 말을 차마 할 수는 없었다.
백리현은 이미 풍서의 뜻을 짐작한 듯 굳은 어조로 말했다.
“판단은 판단. 그들이 혈무단의 간세일 가능성도 생각해야 하질 않겠소? 어떤 쪽이건 심문
해 본다면 알게 되겠지.”
풍서는 몇 번 입을 열 듯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만일 감청 등이 간세가 아니라면... 뇌옥으로 끌려가 그들이 받게되는 모진 심문에 대한 보
상은 누가 할 것인가?
이런 말을 풍서는 끝내 하지 못했다.
백리현의 처사는 모질었지만, 거대한 태무련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기도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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