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제5장 - 의혹(疑惑) 2
독로무한
11화. 제5장 - 의혹(疑惑) 2
몽뇌산과 헤어진 후 장봉황과 도곤은 말을 타고 북상하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장봉황이 북쪽으로 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북쪽에는 왜 가려 하느냐고 도곤이 물었더니 장봉황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뭐, 여자는 북쪽 여자가 예쁠 거라나?
하여간 열흘간의 여행 끝에 절강 땅을 벗어나 강서성을 거쳐 그들은 호북성(湖北省) 무창부(武昌府)에 이르고 있었다.
물론 무창부까지 말을 타고 온 것은 장봉황이었고 도곤은 하인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장봉황이 탄
말의 고삐를 잡아야만 했다.
도곤의 입이 한 자나 나온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호북제일성(湖北第一城)이라 할 수 있는 무창성(武昌城) 내에 들어서자 장봉황은 물 만난 고기인 양 펄펄 날았다. 풍류공자(風流公子)로서의 면모(面貌)를 유감없이 보이느라
바쁜 장봉황 때문에 도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옷 시중은 물론 그 까탈스런 입맛에 도곤은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그를 죽도록
패주고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참아야만 했다.
결국 장봉황이 만족할 때까지 무창성의 온갖 명승지를 샅샅이 둘러보고 나서야 겨우 무창부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한데 그들이 무창부를 벗어날 즈음해서 도곤은 이상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들을 집요하게 따라오는 듯한 느낌!
도곤은 혹시라도 그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그 괴이쩍은 자식이 쫓아오나 해서 내심
조마조마했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뭔가 어설픈 느낌이 드는 것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도 도곤은 장봉황과 더불어 오늘 오후에 도착한 황주부(黃州府) 대치현(大治縣) 내의 주루에서 차를 마시며 그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저녁때라 그런지 주루는 한창 붐비고 있었다. 방금도 상인인 듯한 한 무리의 손님들이 우르르 주루 안으로 들어왔지만 장봉황이 앉은 탁자 끄트머리에 처량맞게 앉아
있는 도곤의 눈에는 그런 모습이 들어오지도 않았다.
“도 산적!”
어느새 차를 다 마셨는지 장봉황이 찻잔을 내려놓고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를 불렀다.
그때, 그들이 앉은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그 상인들의 탁자에서 급작스런 재채기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이쪽을 힐끔거리는 중인들의 눈빛을 느끼며 도곤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 자식이……? 누가 관부(官府)에 신고하면 어쩌려고!’
도곤은 아무데서나 그를 산적으로 불러대는 장봉황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지만 칼자루를 쥔 쪽은 그가 아니었다.
“왜 그러십니까?”
퉁명스럽게 대답하던 도곤의 눈길이 어느새 딴 데 정신이 팔린 장봉황의 시선을 따라 집단적인 재채기가 터져 나온 상인들 쪽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순간, 도곤은 거의 기절할 뻔했다. 가슴이 내려앉다 못해 발바닥으로 꺼져 버린 것 같았다.
‘아니, 저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도곤은 상인으로 분장(扮裝)하고 주루에 나타나 떡 하니 앉아 있는 독산채 동료들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제깐에는 신분 위장이랍시고 하고 앉아 있는 꼴이라니……
어색한 듯 화복 자락을 당기며 손에는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산반(算盤)을 하나씩 들고 있는 동료들을, 도곤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도곤이 눈을 감았다 뜬 것을 일종의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그들도 일제히 눈을 깜박거렸다.
“이상한 사람들이군!”
장봉황이 희귀한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중얼거렸다.
도곤은 다시 한 번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 동안 같이 다니면서 이 돈 많은 애송이가 더럽게도 눈치가 없다는 것은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지만, 만에 하나 그의 동료들이 코앞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라도 하는 날엔 대치현 전체가 다 떠나가도록
길길이 날뛸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럼 대치현 감방은 보나마나 유사 이래 최고로 분주해지리라.
도곤은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다.
“공자! 좀 전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도곤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싹싹하게 물었다.
그의 눈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장봉황은 계속 상인들 쪽에 눈길을 두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르겠는데?”
“그럼 차를 더하지 않으시렵니까?”
도곤은 장봉황의 주의를 끌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생각없다. 그러나저러나 별일이군! 내가 집에 있을 때 꽤 많은 상인들을 접해 보았지만 저렇게 상인 같지 않은 상인들은 처음이야. 이상한데…… 정말 이상해!”
도곤은 별 감정 없이 중얼거리는 장봉황의 말을 듣자 감방에 갇힌 동료들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공자! 모르는 사람을 계속 빤히 쳐다보는 것은 공자의 품위에 누(漏)가 되지 않겠습니까?”
도곤은 최후의 수단으로 장봉황이 생명처럼 여기고 있는 품위 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기대했던 대로 당장 반응이 왔다.
“빤히 쳐다보긴 누가 빤히 쳐다본다는 거냐?”
“물론 공자께선 그러지 않으셨죠. 다만 공자께서 계속 그 자세로 계시면 혹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몰라 그리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도곤은 정색을 하고 쏘아붙이는 장봉황에게 부드럽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장봉황은 도곤의 뒤통수를 보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나를 따라다니더니 제법 아는 게 많아졌구나.”
점잖게 말을 돌리는 장봉황에게 도곤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리고 슬쩍 동료들이 있는 탁자를 살피던 그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도곤의 절망적인 눈길이 그들의 탁자 앞에 와서 선 사람에게로 향했을 때, 누런 화복 차림의 이마가 넓은 상인이 손에 든 산반을 열심히 흔들어대며 장봉황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혹시 악양(岳陽)의 진(晋) 공자(公子) 아니십니까?”
장봉황은 고개를 돌려 그 황색 화복인에게 예의바르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사람을 잘못 보신 듯하군요.”
그 황색 화복인은 산반을 장봉황의 코앞에 들이밀며 사과의 말을 중얼거렸다.
“이거 죄송해서 어쩌나……! 저는 상인입니다. 예, 상인이지요.”
장봉황의 눈동자에 이상하다는 빛이 떠올랐다.
산적업에 같이 종사하던 동료, 관삼(管三)의 수작을 옆에서 보고 있던 도곤은, 한심하다 못해
멍청해 보이기까지 한 그의 행동에 울화가 삼천(三千) 장(丈)이나 치솟았다.
도곤은 화를 삭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아, 예! 그러셨군요. 상인이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장봉황이 예의를 잃지 않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도곤은 장봉황이 눈치채기 전에 관삼이 그만 제자리로 가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관삼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옆모습이 꼭 제가 아는 악양의 주(周) 공자(公子)를 닮아서 착각을 했나 봅니다.”
“아니, 좀 전에는 진 공자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장봉황이 의아한 표정으로 관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예? 아, 그렇지! 진 공자, 진 공자 말입니다. 말이 헛나왔군요.”
도곤이 보기에는 눈에 뻔히 보이는 실수였지만 장봉황은 그런대로 납득을 한 모양이었다.
“아! 뭐, 그럴 수도 있죠. 저도 악양에 진씨 성을 가진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저와 비슷하단 소릴 많이 듣는 친구지요. 물론 체격만요.”
장봉황은 자신의 품위와 교양을 따라올 사람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역력한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순간, 관삼의 눈동자에 당황하는 기색이 어리며 갑자기 허둥대기 시작했다.
행여라도 장봉황이 악양의 진 공자란 인물에 대해 파고들까 염려가 되는 듯 그는 허겁지겁 손을 흔들었다.
“이거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 그럼 이만 제자리로 가보겠습니다…… 어이쿠!”
숨이 찰 정도로 빠르게 인사를 내뱉은 그가 허둥지둥 뒤로 돌아서는 찰나, 발이 뭐에 걸렸는지
도곤이 앉은 의자 쪽으로 넘어졌다.
도곤은 장봉황의 눈치를 살피며 서둘러 관삼을 일으켰다.
그가 관삼을 부축하며 얼굴을 가까이 대고 눈을 부라리자 관삼이 아픈 와중에도 눈빛을 빛내며 그의 손에 뭔가를 슬쩍 쥐여 주었다.
도곤은 얼른 그것을 소매 속에 숨기고는 관삼을 부축해서 자리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면서 도곤은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경고의 눈빛을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리에서 기다리던 장봉황에게 도곤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크게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다치신 곳은 없다는군요.”
“도 산적! 오랜만에 착한 일을 했군.”
장봉황은 모르는 사람을 도와 준 도곤이 놀랍다는 듯 칭찬 아닌 칭찬의 말을 던졌다.
도곤은 어색하게 웃었다.
“헤헤, 별말씀을요…… 공자, 그만 일어나시죠?”
관삼 등이 또 무슨 일을 벌이기 전에 장봉황을 한시라도 빨리 객방으로 데려가야겠다는 마음에 도곤은 은근히 장봉황을 재촉했다.
“그럴까? 피곤하군!”
장봉황은 의외로 별 트집 없이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곤이 안도의 숨을 몰아쉬려 할 적에 주루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서며 그들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 소인은 마구간지기인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도곤은 허름한 옷을 입고 말의 편자를 눈앞에서 흔들어대는 그 사람, 역시
그의 동료인 정일(貞一)의 모습을 암담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손님들께서 타고 오신 말에 문제가 좀 있어서 그러는데 함께 좀 가시죠?”
도곤은 전일의 말을 한귀로 흘리며 장봉황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장봉황은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 편자를 보며 서서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중이었다.
도곤이 아차 하는 마음에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장봉황이 차갑게 그를 불렀다.
“도 산적!”
도곤은 잔뜩 긴장한 채로 장봉황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장봉황의 눈썹이 위로 쭉 치켜 올라갔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오느냐?”
장봉황의 어조가 심상치 않자 도곤은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막 동료들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장봉황이 빽 소리를 질렀다.
“히죽거리지 말고 어서 가서 말을 살피지 않고 뭐 하느냐? 그게 얼마짜리 말인데? 어서 가봐!
나는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을 테니.”
도곤은 목까지 치밀었던 소리를 도로 밀어 넣으며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정일을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여 주루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저쪽 탁자에서 끊임없이 이편을 살피던 상인들의 무리도 우르르 주루를 빠져 나갔다.
사위가 모두 어둠에 잠긴 삼경 무렵.
도곤은 장봉황이 묵고 있는 객방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냥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에 피가 나도록 꽉 다문 입술을 하고 주먹을 부르르 떨며 서 있었다.
그는 방금 동료들과 헤어지고 오는 길이었다.
자신을 구한답시고 별 우습지도 않은 행동을 한 동료들과 조용히 마주서자마자 도곤은 소리를 지르며 그들의 멍청함을 꾸짖었다.
더불어 그때 산에서 장봉황의 짐을 놓고 달아난 그들의 어리석은 행동도 이 기회에 나무랐다.
그리고 빨리 도망가자고 조르는 그들에게 갈 수 없는 상황임을 조용히 얘기했다.
그때 그 괴이쩍은 자식에 의해 중독되었기 때문이라는 슬픈 이유도 밝혔다.
그만큼 얘기했으면 그들이 조용히 떠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의 얘기를 듣고 정일이 중얼거린 말은 도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중독되었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그 말!
도곤은 동료들을 이끌고 부랴부랴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의원을 찾았다.
진맥(診脈)을 받아 본 결과, 의원은 그가 젊은 황소만큼 건강하며 무슨 병 내지는 중독 증상 같은 것은 전혀 없다고 장담했다.
환호하는 동료들을 진정시켜 관삼이 건넸던 쪽지에 적힌 그대로 약속장소를 정하고 그들을 돌려보낸 다음 그가 한 일은 이를 갈며 그 길로 객방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한참을 객방 앞에 서 있던 도곤은 안으로 들어간 지 일 각도 안 되어 다시 밖으로 나왔다.
불룩한 걸 옆구리에 낀 채로였다.
도곤은 그 상태로 어딘가를 향해 사라져 갔다.
그날 밤, 도곤이 묵기로 되어 있었던 낡은 객방은 밤새 텅 비어 있었고, 장봉황이 타고 온 말이 쉬고 있던 마구간도 주인없는 밤을 맞고 있었다.
* * *
장봉황은 말 등에 올라탄 채 씩씩거리며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곤이 새벽을 틈타 달아난 그날 아침,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자마자 알게 된 날벼락 같은 소식에 장봉황은 입에 거품을 물 지경이었다.
그 죽여도 시원찮을 도 산적 놈을 잡기 위해 길길이 뛰며 무작정 말을 구해 나서기는 나섰는데,
막상 길을 달리다 말고 생각해 보니 찾을 방법이 전무했다.
장봉황은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생각에 잠겼다.
돈도 그 망할 놈이 모두 가져 가버리고, 노자로 쓸 만한 것이라고는 목에 걸고 있던 홍옥(紅玉)목걸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급하게 팔아서 말 구하는 데 쓰느라고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장봉황은 갈등했다.
도곤을 잡으러 가자니 여비가 없고,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자니 화병이 생겨 죽을 노릇이었다.
“그놈에게 두 번이나 당하다니…… 나쁜 산적 놈!”
장봉황은 신경질적으로 고삐를 배배 꼬아댔다.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멀리서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두두두두!
먼지 속을 질풍같이 달려오고 있는 인마는 언뜻 보아도 상당히 지쳐 보였으나, 기수(騎手)에게는 쉬어 갈 마음이
없는 듯했다.
밀려오는 먼지바람에 장봉황은 인상을 쓰며 말을 한쪽으로 몰아 관도에서 약간 벗어났다.
상대편 말이 그의 옆을 스쳐 지나는 찰나, 장봉황의 얼굴 가득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마상에는 여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름다운 여인이!
무림고수도 아닌 그가 순식간에 스쳐 간 여인의 얼굴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었는지는 오직 장봉황 본인만이 알리라!
지금까지의 고민이 싹 사라진 지금, 할 일은 하나였다.
장봉황은 행여 그 여인을 놓칠세라 얼른 말 머리를 돌려 방금 지나간 인마를 쫓으려 했지만 본래 반대 방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보니 바로 그 말을 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장봉황은 말의 옆구리를 세게 차며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소저! 잠깐만 기다리시오!”
갑작스런 동작으로 인한 등줄기의 고통을 무시하고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려 했을 때, 갑자기 앞에서 여인의 놀람에 찬 소리가 들렸다.
“앗!”
순간,
쿵`─`!
지축(地軸)이 울렸다.
장봉황이 땀을 찔찔 흘리며 그곳에 도착하자 여인의 말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고,
여인은 그 옆에서 다친 데 하나 없이 말짱하게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안달을 하고 있었다.
장봉황은 서둘러 말에서 내리며 염려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소저!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신지……?”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짜증과 초조함으로 잔뜩 찌푸려져 있던 여인의 시선이 장봉황이 타고온 말을 향하는 순간, 반짝 빛났다.
그 황홀한 모습에 절반쯤 감기던 장봉황의 눈은 여인이 그의 말에 올라타 그대로
달려나가자 오히려 두 배로 치떠졌다.
“소, 소, 소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으며 장봉황은 여인을 불러 제꼈다.
어느새 저만큼 달려간 여인에게서 짜랑짜랑한 음성이 들려 왔다.
“이 말을 좀 빌리겠어요. 말을 돌려받고 싶으면 개봉의 만금장으로 찾아와요. 난
모용세가에서 나온 모용도도(募容滔滔)예요.”
여인이 순식간에 멀리 사라지면서 남긴 모용도도이란 이름이 오랫동안 장봉황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그는 그 이름이 주는 짜릿한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거침없는 성격과 약간, 아주 약간은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을 법한 오만함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드디어 나의 천생배필이 나타난 거야!”
감격에 겨워하던 장봉황이 이윽고 쓰러져 있는 여인의 말에게로 다가갔다.
“임마! 일어나! 네 주인을 쫓아가야 되니, 빨리 일어나지 못해? 이걸 그냥 콱 구워 먹을까 보다.”
구워 먹는다는 말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모용도도란 여인의 말은 비실비실 일어났다.
그러나 탁 풀린 눈동자로 장봉황을 보며 말은 계속 비틀댔다.
할 수 없이 장봉황은 말의 고삐를 억지로 잡아 끌며 여인을 뒤쫓기 시작했다.
느리기 짝이 없는 말과는 달리 마음은 이미 모용도도란 여인에게 가 있는 그의
눈빛은 오랜만에 생기로 넘치고 있었
* * *
“그래서?”
촛불이 붉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 방안에 울리는 그 목소리는 묵직하고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냉정했다.
“실패했다는 건가, 결론은?”
굵은 황초를 앞에 두고 앉은 탓에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입고 있는 옷이 특이한 형태의 백포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백포인이 앉아 있는 탁자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은의복면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늙은이의 독공이 예상보다 뛰어나 일이 지체된 데다가 놈들이 그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그대가 방심했기 때문은 아니고?”
어쩐지 중성적인 느낌을 주는 은의복면인의 말을 자르며 백포인은 날카롭게 추궁했다.
순간 은의복면인의 고개가 발딱 쳐들렸다.
“방심은 밀단에서 파견된 혈영대가 했지, 하좌가 한 게 아닙니다. 게다가 정보가 너무 허술했습니다.”
“남경 쪽에서는 최선을 다한 걸로 알고 있다. 또 혈영대주와 대원들이 방심하고 있었더라도 그대가 직접 나섰더라면 간단했을 것 아닌가? 그런 중대한 일에 직접
나서지 않았다는 건 직무에 태만했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의 냉담한 태도에 은의인의 복면이 소리없이 흔들렸다.
내리깐 눈동자에서 독한 빛이 번들거렸다.
“하좌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뭘 잘못 알아도 단단히 잘못 알고 있군. 그대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은 그분께서 직접 물으실
것이다. 그대는 그분의 영유(領有)가 내릴 때까지 일체의 업무에서 손을 떼고 근신하라. 그대가 맡고 있던 일은 모두 삼영주(三領主)가 맡을 것이다.”
“동령(銅領)이? 하지만……!”
은의복면인의 음성이 뾰족하게 높아졌다. 그러나 이어진 백포인의 말은 그를 침묵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감히 신주(神主)를 거역할 생각인가?”
백포인의 호통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의복면인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하좌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미미하게 떨리고 있는 그의 어깨로 보아 ‘신주’라는 이름이 가진 위력은 상상을 절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백포인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무심하게 내뱉었다.
“근신하고 있으라.”
촛불이 미약하게 흔들린다 싶은 순간,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은의복면인은 백포인이 신비하게 사라진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빛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거의 살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내가 이 자리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피땀을 흘렸는데, 그렇게 쉽게 밀려날 줄 아느냐?
어림없는 소리! 두고 보자! 오늘, 나를 이렇게 몰아붙인 것을 후회하게 해줄 테다.”
은의인은 복면 밖으로 드러날 정도로 이를 갈더니 별안간 서랍을 뒤져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 언뜻 보아도 대단히 질이 좋은 종이였다.
잠시 후 그의 손이 빠르게 붓을 놀리더니 금세 서찰 한 통이 완성되어 탁자 위에 놓여졌다.
은의인은 기이한 글자가 무슨 암호문처럼 적혀 있는 서찰을 꼼꼼히 읽어 본 뒤 서찰을 접어 단단히 봉했다.
그리고는 그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작은 옥합을 꺼내 그 안에 서찰을 넣었다.
일을 마친 그의 눈동자에 득의로운 기색이 감돌았다.
“비록 멍청한 혈영대주 놈 때문에 잠시 실기(實技)했지만, 두고 보아라. 이제 그와 손을 잡게 되면, 아니, 그가 나의 손만 들어 준다면……”
은의인은 야릇한 눈웃음과 함께 어깨를 떨었다.
아까처럼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즐거운 상상 때문이었다.
서찰이 그 인물에게 전해진 후 있을 많은 일들에 대한 상상……!
촛불은 말없이 타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11화. 제5장 - 의혹(疑惑) 2
몽뇌산과 헤어진 후 장봉황과 도곤은 말을 타고 북상하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장봉황이 북쪽으로 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북쪽에는 왜 가려 하느냐고 도곤이 물었더니 장봉황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뭐, 여자는 북쪽 여자가 예쁠 거라나?
하여간 열흘간의 여행 끝에 절강 땅을 벗어나 강서성을 거쳐 그들은 호북성(湖北省) 무창부(武昌府)에 이르고 있었다.
물론 무창부까지 말을 타고 온 것은 장봉황이었고 도곤은 하인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장봉황이 탄
말의 고삐를 잡아야만 했다.
도곤의 입이 한 자나 나온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호북제일성(湖北第一城)이라 할 수 있는 무창성(武昌城) 내에 들어서자 장봉황은 물 만난 고기인 양 펄펄 날았다. 풍류공자(風流公子)로서의 면모(面貌)를 유감없이 보이느라
바쁜 장봉황 때문에 도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옷 시중은 물론 그 까탈스런 입맛에 도곤은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그를 죽도록
패주고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참아야만 했다.
결국 장봉황이 만족할 때까지 무창성의 온갖 명승지를 샅샅이 둘러보고 나서야 겨우 무창부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한데 그들이 무창부를 벗어날 즈음해서 도곤은 이상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들을 집요하게 따라오는 듯한 느낌!
도곤은 혹시라도 그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그 괴이쩍은 자식이 쫓아오나 해서 내심
조마조마했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뭔가 어설픈 느낌이 드는 것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도 도곤은 장봉황과 더불어 오늘 오후에 도착한 황주부(黃州府) 대치현(大治縣) 내의 주루에서 차를 마시며 그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저녁때라 그런지 주루는 한창 붐비고 있었다. 방금도 상인인 듯한 한 무리의 손님들이 우르르 주루 안으로 들어왔지만 장봉황이 앉은 탁자 끄트머리에 처량맞게 앉아
있는 도곤의 눈에는 그런 모습이 들어오지도 않았다.
“도 산적!”
어느새 차를 다 마셨는지 장봉황이 찻잔을 내려놓고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를 불렀다.
그때, 그들이 앉은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그 상인들의 탁자에서 급작스런 재채기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이쪽을 힐끔거리는 중인들의 눈빛을 느끼며 도곤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 자식이……? 누가 관부(官府)에 신고하면 어쩌려고!’
도곤은 아무데서나 그를 산적으로 불러대는 장봉황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지만 칼자루를 쥔 쪽은 그가 아니었다.
“왜 그러십니까?”
퉁명스럽게 대답하던 도곤의 눈길이 어느새 딴 데 정신이 팔린 장봉황의 시선을 따라 집단적인 재채기가 터져 나온 상인들 쪽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순간, 도곤은 거의 기절할 뻔했다. 가슴이 내려앉다 못해 발바닥으로 꺼져 버린 것 같았다.
‘아니, 저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도곤은 상인으로 분장(扮裝)하고 주루에 나타나 떡 하니 앉아 있는 독산채 동료들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제깐에는 신분 위장이랍시고 하고 앉아 있는 꼴이라니……
어색한 듯 화복 자락을 당기며 손에는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산반(算盤)을 하나씩 들고 있는 동료들을, 도곤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도곤이 눈을 감았다 뜬 것을 일종의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그들도 일제히 눈을 깜박거렸다.
“이상한 사람들이군!”
장봉황이 희귀한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중얼거렸다.
도곤은 다시 한 번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 동안 같이 다니면서 이 돈 많은 애송이가 더럽게도 눈치가 없다는 것은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지만, 만에 하나 그의 동료들이 코앞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라도 하는 날엔 대치현 전체가 다 떠나가도록
길길이 날뛸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럼 대치현 감방은 보나마나 유사 이래 최고로 분주해지리라.
도곤은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다.
“공자! 좀 전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도곤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싹싹하게 물었다.
그의 눈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장봉황은 계속 상인들 쪽에 눈길을 두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르겠는데?”
“그럼 차를 더하지 않으시렵니까?”
도곤은 장봉황의 주의를 끌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생각없다. 그러나저러나 별일이군! 내가 집에 있을 때 꽤 많은 상인들을 접해 보았지만 저렇게 상인 같지 않은 상인들은 처음이야. 이상한데…… 정말 이상해!”
도곤은 별 감정 없이 중얼거리는 장봉황의 말을 듣자 감방에 갇힌 동료들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공자! 모르는 사람을 계속 빤히 쳐다보는 것은 공자의 품위에 누(漏)가 되지 않겠습니까?”
도곤은 최후의 수단으로 장봉황이 생명처럼 여기고 있는 품위 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기대했던 대로 당장 반응이 왔다.
“빤히 쳐다보긴 누가 빤히 쳐다본다는 거냐?”
“물론 공자께선 그러지 않으셨죠. 다만 공자께서 계속 그 자세로 계시면 혹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몰라 그리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도곤은 정색을 하고 쏘아붙이는 장봉황에게 부드럽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장봉황은 도곤의 뒤통수를 보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나를 따라다니더니 제법 아는 게 많아졌구나.”
점잖게 말을 돌리는 장봉황에게 도곤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리고 슬쩍 동료들이 있는 탁자를 살피던 그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도곤의 절망적인 눈길이 그들의 탁자 앞에 와서 선 사람에게로 향했을 때, 누런 화복 차림의 이마가 넓은 상인이 손에 든 산반을 열심히 흔들어대며 장봉황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혹시 악양(岳陽)의 진(晋) 공자(公子) 아니십니까?”
장봉황은 고개를 돌려 그 황색 화복인에게 예의바르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사람을 잘못 보신 듯하군요.”
그 황색 화복인은 산반을 장봉황의 코앞에 들이밀며 사과의 말을 중얼거렸다.
“이거 죄송해서 어쩌나……! 저는 상인입니다. 예, 상인이지요.”
장봉황의 눈동자에 이상하다는 빛이 떠올랐다.
산적업에 같이 종사하던 동료, 관삼(管三)의 수작을 옆에서 보고 있던 도곤은, 한심하다 못해
멍청해 보이기까지 한 그의 행동에 울화가 삼천(三千) 장(丈)이나 치솟았다.
도곤은 화를 삭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아, 예! 그러셨군요. 상인이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장봉황이 예의를 잃지 않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도곤은 장봉황이 눈치채기 전에 관삼이 그만 제자리로 가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관삼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옆모습이 꼭 제가 아는 악양의 주(周) 공자(公子)를 닮아서 착각을 했나 봅니다.”
“아니, 좀 전에는 진 공자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장봉황이 의아한 표정으로 관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예? 아, 그렇지! 진 공자, 진 공자 말입니다. 말이 헛나왔군요.”
도곤이 보기에는 눈에 뻔히 보이는 실수였지만 장봉황은 그런대로 납득을 한 모양이었다.
“아! 뭐, 그럴 수도 있죠. 저도 악양에 진씨 성을 가진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저와 비슷하단 소릴 많이 듣는 친구지요. 물론 체격만요.”
장봉황은 자신의 품위와 교양을 따라올 사람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역력한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순간, 관삼의 눈동자에 당황하는 기색이 어리며 갑자기 허둥대기 시작했다.
행여라도 장봉황이 악양의 진 공자란 인물에 대해 파고들까 염려가 되는 듯 그는 허겁지겁 손을 흔들었다.
“이거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 그럼 이만 제자리로 가보겠습니다…… 어이쿠!”
숨이 찰 정도로 빠르게 인사를 내뱉은 그가 허둥지둥 뒤로 돌아서는 찰나, 발이 뭐에 걸렸는지
도곤이 앉은 의자 쪽으로 넘어졌다.
도곤은 장봉황의 눈치를 살피며 서둘러 관삼을 일으켰다.
그가 관삼을 부축하며 얼굴을 가까이 대고 눈을 부라리자 관삼이 아픈 와중에도 눈빛을 빛내며 그의 손에 뭔가를 슬쩍 쥐여 주었다.
도곤은 얼른 그것을 소매 속에 숨기고는 관삼을 부축해서 자리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면서 도곤은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경고의 눈빛을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리에서 기다리던 장봉황에게 도곤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크게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다치신 곳은 없다는군요.”
“도 산적! 오랜만에 착한 일을 했군.”
장봉황은 모르는 사람을 도와 준 도곤이 놀랍다는 듯 칭찬 아닌 칭찬의 말을 던졌다.
도곤은 어색하게 웃었다.
“헤헤, 별말씀을요…… 공자, 그만 일어나시죠?”
관삼 등이 또 무슨 일을 벌이기 전에 장봉황을 한시라도 빨리 객방으로 데려가야겠다는 마음에 도곤은 은근히 장봉황을 재촉했다.
“그럴까? 피곤하군!”
장봉황은 의외로 별 트집 없이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곤이 안도의 숨을 몰아쉬려 할 적에 주루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서며 그들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 소인은 마구간지기인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도곤은 허름한 옷을 입고 말의 편자를 눈앞에서 흔들어대는 그 사람, 역시
그의 동료인 정일(貞一)의 모습을 암담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손님들께서 타고 오신 말에 문제가 좀 있어서 그러는데 함께 좀 가시죠?”
도곤은 전일의 말을 한귀로 흘리며 장봉황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장봉황은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 편자를 보며 서서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중이었다.
도곤이 아차 하는 마음에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장봉황이 차갑게 그를 불렀다.
“도 산적!”
도곤은 잔뜩 긴장한 채로 장봉황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장봉황의 눈썹이 위로 쭉 치켜 올라갔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오느냐?”
장봉황의 어조가 심상치 않자 도곤은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막 동료들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장봉황이 빽 소리를 질렀다.
“히죽거리지 말고 어서 가서 말을 살피지 않고 뭐 하느냐? 그게 얼마짜리 말인데? 어서 가봐!
나는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을 테니.”
도곤은 목까지 치밀었던 소리를 도로 밀어 넣으며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정일을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여 주루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저쪽 탁자에서 끊임없이 이편을 살피던 상인들의 무리도 우르르 주루를 빠져 나갔다.
사위가 모두 어둠에 잠긴 삼경 무렵.
도곤은 장봉황이 묵고 있는 객방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냥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에 피가 나도록 꽉 다문 입술을 하고 주먹을 부르르 떨며 서 있었다.
그는 방금 동료들과 헤어지고 오는 길이었다.
자신을 구한답시고 별 우습지도 않은 행동을 한 동료들과 조용히 마주서자마자 도곤은 소리를 지르며 그들의 멍청함을 꾸짖었다.
더불어 그때 산에서 장봉황의 짐을 놓고 달아난 그들의 어리석은 행동도 이 기회에 나무랐다.
그리고 빨리 도망가자고 조르는 그들에게 갈 수 없는 상황임을 조용히 얘기했다.
그때 그 괴이쩍은 자식에 의해 중독되었기 때문이라는 슬픈 이유도 밝혔다.
그만큼 얘기했으면 그들이 조용히 떠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의 얘기를 듣고 정일이 중얼거린 말은 도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중독되었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그 말!
도곤은 동료들을 이끌고 부랴부랴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의원을 찾았다.
진맥(診脈)을 받아 본 결과, 의원은 그가 젊은 황소만큼 건강하며 무슨 병 내지는 중독 증상 같은 것은 전혀 없다고 장담했다.
환호하는 동료들을 진정시켜 관삼이 건넸던 쪽지에 적힌 그대로 약속장소를 정하고 그들을 돌려보낸 다음 그가 한 일은 이를 갈며 그 길로 객방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한참을 객방 앞에 서 있던 도곤은 안으로 들어간 지 일 각도 안 되어 다시 밖으로 나왔다.
불룩한 걸 옆구리에 낀 채로였다.
도곤은 그 상태로 어딘가를 향해 사라져 갔다.
그날 밤, 도곤이 묵기로 되어 있었던 낡은 객방은 밤새 텅 비어 있었고, 장봉황이 타고 온 말이 쉬고 있던 마구간도 주인없는 밤을 맞고 있었다.
* * *
장봉황은 말 등에 올라탄 채 씩씩거리며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곤이 새벽을 틈타 달아난 그날 아침,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자마자 알게 된 날벼락 같은 소식에 장봉황은 입에 거품을 물 지경이었다.
그 죽여도 시원찮을 도 산적 놈을 잡기 위해 길길이 뛰며 무작정 말을 구해 나서기는 나섰는데,
막상 길을 달리다 말고 생각해 보니 찾을 방법이 전무했다.
장봉황은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생각에 잠겼다.
돈도 그 망할 놈이 모두 가져 가버리고, 노자로 쓸 만한 것이라고는 목에 걸고 있던 홍옥(紅玉)목걸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급하게 팔아서 말 구하는 데 쓰느라고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장봉황은 갈등했다.
도곤을 잡으러 가자니 여비가 없고,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자니 화병이 생겨 죽을 노릇이었다.
“그놈에게 두 번이나 당하다니…… 나쁜 산적 놈!”
장봉황은 신경질적으로 고삐를 배배 꼬아댔다.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멀리서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두두두두!
먼지 속을 질풍같이 달려오고 있는 인마는 언뜻 보아도 상당히 지쳐 보였으나, 기수(騎手)에게는 쉬어 갈 마음이
없는 듯했다.
밀려오는 먼지바람에 장봉황은 인상을 쓰며 말을 한쪽으로 몰아 관도에서 약간 벗어났다.
상대편 말이 그의 옆을 스쳐 지나는 찰나, 장봉황의 얼굴 가득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마상에는 여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름다운 여인이!
무림고수도 아닌 그가 순식간에 스쳐 간 여인의 얼굴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었는지는 오직 장봉황 본인만이 알리라!
지금까지의 고민이 싹 사라진 지금, 할 일은 하나였다.
장봉황은 행여 그 여인을 놓칠세라 얼른 말 머리를 돌려 방금 지나간 인마를 쫓으려 했지만 본래 반대 방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보니 바로 그 말을 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장봉황은 말의 옆구리를 세게 차며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소저! 잠깐만 기다리시오!”
갑작스런 동작으로 인한 등줄기의 고통을 무시하고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려 했을 때, 갑자기 앞에서 여인의 놀람에 찬 소리가 들렸다.
“앗!”
순간,
쿵`─`!
지축(地軸)이 울렸다.
장봉황이 땀을 찔찔 흘리며 그곳에 도착하자 여인의 말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고,
여인은 그 옆에서 다친 데 하나 없이 말짱하게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안달을 하고 있었다.
장봉황은 서둘러 말에서 내리며 염려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소저!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신지……?”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짜증과 초조함으로 잔뜩 찌푸려져 있던 여인의 시선이 장봉황이 타고온 말을 향하는 순간, 반짝 빛났다.
그 황홀한 모습에 절반쯤 감기던 장봉황의 눈은 여인이 그의 말에 올라타 그대로
달려나가자 오히려 두 배로 치떠졌다.
“소, 소, 소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으며 장봉황은 여인을 불러 제꼈다.
어느새 저만큼 달려간 여인에게서 짜랑짜랑한 음성이 들려 왔다.
“이 말을 좀 빌리겠어요. 말을 돌려받고 싶으면 개봉의 만금장으로 찾아와요. 난
모용세가에서 나온 모용도도(募容滔滔)예요.”
여인이 순식간에 멀리 사라지면서 남긴 모용도도이란 이름이 오랫동안 장봉황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그는 그 이름이 주는 짜릿한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거침없는 성격과 약간, 아주 약간은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을 법한 오만함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드디어 나의 천생배필이 나타난 거야!”
감격에 겨워하던 장봉황이 이윽고 쓰러져 있는 여인의 말에게로 다가갔다.
“임마! 일어나! 네 주인을 쫓아가야 되니, 빨리 일어나지 못해? 이걸 그냥 콱 구워 먹을까 보다.”
구워 먹는다는 말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모용도도란 여인의 말은 비실비실 일어났다.
그러나 탁 풀린 눈동자로 장봉황을 보며 말은 계속 비틀댔다.
할 수 없이 장봉황은 말의 고삐를 억지로 잡아 끌며 여인을 뒤쫓기 시작했다.
느리기 짝이 없는 말과는 달리 마음은 이미 모용도도란 여인에게 가 있는 그의
눈빛은 오랜만에 생기로 넘치고 있었
* * *
“그래서?”
촛불이 붉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 방안에 울리는 그 목소리는 묵직하고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냉정했다.
“실패했다는 건가, 결론은?”
굵은 황초를 앞에 두고 앉은 탓에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입고 있는 옷이 특이한 형태의 백포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백포인이 앉아 있는 탁자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은의복면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늙은이의 독공이 예상보다 뛰어나 일이 지체된 데다가 놈들이 그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그대가 방심했기 때문은 아니고?”
어쩐지 중성적인 느낌을 주는 은의복면인의 말을 자르며 백포인은 날카롭게 추궁했다.
순간 은의복면인의 고개가 발딱 쳐들렸다.
“방심은 밀단에서 파견된 혈영대가 했지, 하좌가 한 게 아닙니다. 게다가 정보가 너무 허술했습니다.”
“남경 쪽에서는 최선을 다한 걸로 알고 있다. 또 혈영대주와 대원들이 방심하고 있었더라도 그대가 직접 나섰더라면 간단했을 것 아닌가? 그런 중대한 일에 직접
나서지 않았다는 건 직무에 태만했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의 냉담한 태도에 은의인의 복면이 소리없이 흔들렸다.
내리깐 눈동자에서 독한 빛이 번들거렸다.
“하좌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뭘 잘못 알아도 단단히 잘못 알고 있군. 그대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은 그분께서 직접 물으실
것이다. 그대는 그분의 영유(領有)가 내릴 때까지 일체의 업무에서 손을 떼고 근신하라. 그대가 맡고 있던 일은 모두 삼영주(三領主)가 맡을 것이다.”
“동령(銅領)이? 하지만……!”
은의복면인의 음성이 뾰족하게 높아졌다. 그러나 이어진 백포인의 말은 그를 침묵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감히 신주(神主)를 거역할 생각인가?”
백포인의 호통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의복면인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하좌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미미하게 떨리고 있는 그의 어깨로 보아 ‘신주’라는 이름이 가진 위력은 상상을 절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백포인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무심하게 내뱉었다.
“근신하고 있으라.”
촛불이 미약하게 흔들린다 싶은 순간,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은의복면인은 백포인이 신비하게 사라진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빛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거의 살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내가 이 자리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피땀을 흘렸는데, 그렇게 쉽게 밀려날 줄 아느냐?
어림없는 소리! 두고 보자! 오늘, 나를 이렇게 몰아붙인 것을 후회하게 해줄 테다.”
은의인은 복면 밖으로 드러날 정도로 이를 갈더니 별안간 서랍을 뒤져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 언뜻 보아도 대단히 질이 좋은 종이였다.
잠시 후 그의 손이 빠르게 붓을 놀리더니 금세 서찰 한 통이 완성되어 탁자 위에 놓여졌다.
은의인은 기이한 글자가 무슨 암호문처럼 적혀 있는 서찰을 꼼꼼히 읽어 본 뒤 서찰을 접어 단단히 봉했다.
그리고는 그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작은 옥합을 꺼내 그 안에 서찰을 넣었다.
일을 마친 그의 눈동자에 득의로운 기색이 감돌았다.
“비록 멍청한 혈영대주 놈 때문에 잠시 실기(實技)했지만, 두고 보아라. 이제 그와 손을 잡게 되면, 아니, 그가 나의 손만 들어 준다면……”
은의인은 야릇한 눈웃음과 함께 어깨를 떨었다.
아까처럼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즐거운 상상 때문이었다.
서찰이 그 인물에게 전해진 후 있을 많은 일들에 대한 상상……!
촛불은 말없이 타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작가의 저작권 보호를 위해 에피소드 본문 복사가 제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