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제6장 - 강호십수(江湖十秀) 1

등록 2026.10.12 9.2천자 조회 1 좋아요 0 댓글 0 15세 이상 이용가
독로무한
12화. 제6장 - 강호십수(江湖十秀) 1


몽뇌산은 사냥꾼이 다니는 길인 듯한 작고 꾸불꾸불한 산길에 서서 손에 들고 있던 호두알만한 열매를 씹으며 인상을 있는 대로 썼다.
열매가 맛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산몽과(酸夢果)는 신맛이 있긴 하지만 다른 독과들에 비하면 꽤 먹을만한 편에 속했다.
그가 얼굴을 찌푸리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무창성까지 찾아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아서였다.
그가 벌써 무창에 도착했을 수도 있을 모용도도를 생각하며 입맛을 다실 때, 울퉁불퉁한 산길 위쪽에서 불쑥 사람 하나가 달려 내려왔다.
몽뇌산은 반색(反色)을 하며 그 사람을 불러 세웠다.
“저, 물어 볼……!”
그가 채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그 사람은 몽뇌산이 지나온 길 아래로 사라지고 없었다.
몽뇌산은 황당한 눈빛으로 그가 내려간 곳을 쳐다보았다.
“무슨 여자가 저렇게 걸음이 빨라? 무림인인가?”
몽뇌산은 고개를 흔들며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산몽과를 하나 더 꺼내 든 그가 서너 걸음쯤 옮겼을 때, 뒤에서 불쑥 애처로운 음성이 들렸다.
“공자!”
놀라서 몸을 돌린 몽뇌산의 눈앞에는 좀 전에 지나갔던 그 여인이 서 있었다.
여기저기 흙이 묻어 엉망이 된 백의 차림의 그 여인은 가냘프게 몸을 떨며 몽뇌산을 바라보았다.
몽뇌산은 여인이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친 것이 미안해서 돌아왔다 여기고 웃는 얼굴로 여인을 쳐다보았다.
“저, 길을 좀 물어도 될까요?”
“공자! 살려 주세요.”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똑같이 황당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백의여인의 느닷없는 얘기에 멀뚱멀뚱 여인의 얼굴만 바라보고 서 있던 몽뇌산은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느낌에 몸을 휙 돌렸다.
그의 시선이 이르는 곳에 은의무복(銀衣武服) 차림의 젊은 사내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밀려오는 은의무복인의 기도는 실로 대단했다.
그것은 몽뇌산이 신비세력의 살수들과 부딪치면서도 이제껏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것이었다.
몽뇌산은 전신의 근육과 신경이 절로 바짝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은의무복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뒤에 있는 여인의 존재는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불과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보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송옥이나 반안의 얼굴이 저랬을까 싶을 정도로 빼어났다.
약간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얀 얼굴에 짙은 눈썹과 아무런 감정도 엿볼 수 없는 무심한 눈동자,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은 아름답게 느껴지는 그의 모습에 차갑고 강인한 느낌을 더해 주었다.
몽뇌산은 어쩐지 자신이 위축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째는 그를 짓누르는 듯한 은의청년의 기도가 마음에 안 들었고, 둘째는 인간 같지 않게 너무 잘생긴 게 보기 부담스러웠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는 그의 태도가 영 기분 나빴다.
장내에 모습을 나타낸 후로 주욱 그의 눈빛이 고정되어 있는 곳을 깨닫고서야 몽뇌산은
뒤에 서 있던 여인의 존재를 떠올렸다.
“공자! 살려 주세요. 저 사람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저를 죽이려고 해요.”
여인은 그의 팔에 바짝 매달리며 애원했다.
몽뇌산은 여인의 팔을 떼어 내며 덤덤하게 물었다. 시선은 여전히 은의사내에게 고정된 채로였다.
“그가 죽일 만한 짓을 했나요?”
그러자 갑자기 여인의 떨림이 멈췄다.
무언가 말을 할 듯 입을 벌린 여인은 끝내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희번덕거리는 눈동자만이 그녀의 황당한 심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묘한 표정을 짓기는 은의청년도 마찬가지였다.
몽뇌산은 은의청년이 처음으로 감정이라고 불릴 만한 빛을 떠올리며 자신을 바라보자 뭔가 한마디 더해야겠다고 생각했
그러나 그의 입에선 말 대신 놀람에 찬 짧은 감탄성만이 터져 나왔다.
“어?”
몽뇌산은 인상을 쓰며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단도를 쳐다보았다.
은의청년에게 신경이 온통 가 있어서 미처 방비를 못 한 게 화근(禍根)이었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게 강호 경험이 부족한 탓이었다.
“흐흐흐! 이제야 한숨 돌리겠군. 네놈 성격에 설마 무공도 모르는 무고(無故)한 사람을 해치지는 않겠지? 자, 어떻게 할 테냐?”
어이없이 마혈을 제압당한 몽뇌산의 귓전에 뿜어지는 백의여인의 음성은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탁하고 거칠었다.
몽뇌산은 제압당한 게 걱정도 별로 되지 않는 듯, 갑자기 걸쭉한 남자 목소리를 내는 백의여인의 모습을
신기한 얼굴로 곁눈질했다.
여자 입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 암만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은의청년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여인을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 한빙검(翰氷劍) 혁무빙(赫霧氷), 어찌할 테냐? 내 동생을 죽인 것처럼 어디 나도 한번 죽여 보려무나. 하지만 그 전에 이 녀석이 먼저 죽는 꼴을 봐야 할걸! 흐흐흐…… 네놈이 감히 우리 음양쌍선(陰陽雙仙)을 노리다니!”
백의여인은 몽뇌산의 완맥을 꽉 틀어쥐며 바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아댔다.
의기 양양함이 어린 그녀, 아니, 그의 조롱에도 혁무빙이라고 불린 은의청년은 여전히 묵묵부답(默默不答)이었다.
그런데 한빙검 혁무빙이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당금 강호에 손꼽히는 후기지수들을 일컬어 강호십수라고 하거니와 그 중 단연코 수위에 꼽히는 이름이 바로 한빙검이었다.
오대세가가 이끌고 있는 강호에 점점 입지(立地)를 넓혀 가는 강호삼신세(江湖三新勢) 중 검도원(劍道院) 출신의 절정검수!
들리기론 그에게 검도원말고 또 다른 사문이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아무튼 호사가들 중에는 이미 그 이름을
차기 중원제일검 자리에 올려놓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백의여인은 그의 침묵을 지켜보며 다시 여자의 목소리로 돌아가 통쾌하게 웃어 젖혔다.
“호호호! 네놈도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듣기 싫은가 보구나. 자칭 협객(俠客)이란 자들의 속성이 본래
그러하지! 호호호!”
“음마(陰魔) 소아경(消芽敬)!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혁무빙의 입에서 처음으로 말이란 것이 흘러나왔다.
그는 음마 소아경을 더 무심해진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절대로 상황이 불리해진 사람이 나타낼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소아경은 그의 눈빛에 문득 불안감을 느낀 듯 눈초리를 바짝 올려 세웠다.
“그 기분 나쁜 눈빛은 뭐냐? 네놈에게 쫓기느라 내가 이 꼴이 되긴 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네놈이 뭘 어쩔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소아경은 뾰족하게 소리를 지르며 몽뇌산을 더욱 바짝 끌어당김과 동시에 완맥을 쥐었던 손으로 몽뇌산의
손에 들려 있던 산몽과를 낚아챘다.
“어, 어? 그건……!”
몽뇌산의 당황스런 음성을 무시한 채 소아경은 열매를 아작거리며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음냠! 시지만 그래도 먹을 만하군. 나 소아경이 이런 산열매 따위나 먹고 있어야 하다니…… 이 모든 게 네놈, 혁무빙 때문이야. 네놈이
도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원한은 없지. 그러나 누군가는 너희에게 그 동안의 죗값을 치르게 해주어야만 한다. 네 동생, 소문정(消聞正)의 죽음은 당연한 인과응보(因果應報)일 뿐. 너희로 인해 인생을
망치고 목숨을 끊은 무수한 젊은 남녀들을
생각한다면 그보다 더한 죽음도 너희는 원망할 자격이 없다.”
혁무빙의 대꾸는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웠다.
혁무빙의 말을 듣고 나서야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한 몽뇌산은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소아경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음양쌍마(陰陽雙魔)가 누구인가!
그들은 지난 십 년 동안 강호를 종횡하며 무수한 젊은 남녀들을 파멸시킨 장본인들이었다.
음마 소아경과 양마(陽魔) 소문정!
그들의 관계는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애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양마 소문정은 분명한 남자였으나, 음마 소아경은 음양반인(陰陽半人)으로
남자도 여자도 아니면서 동시에 남자도 여자도 될 수 있는, 그런 자였다.
그러니 남매라고 하기도 뭐하고 형제라고 하기도 어려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남매건 형제건 간에 강호인들은 음양쌍마라면 치를
떨었고 그것은 심지어 같은 마도(魔道)에서조차 그들을 경원(輕遠)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물론 하나였다.
인륜이나 천륜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는 그들의 행태.
젊고 외모가 반반한 남녀라면 가리지 않고 끌고 와 색을 즐긴 후 간단하게 죽여
버리는 그들의 수단은 강호의 공분(公憤)을 사기에 충분했지만 그들의 신체적인 특성과 변장술로 인해 누구도 이제껏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음양쌍마 중 양마가 벌써 눈앞에 있는 혁무빙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랴!
몽뇌산도 지난번 수련을 위한 여행길에 올랐을 때 가끔 그들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음양쌍마가 얼마나 강호에서 손대기 힘든 골칫거리인지 대강은 알고 있었다.
몽뇌산은 혁무빙을 찬찬히 살피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몸에서 자연스레 배어나오는 묵직한 기도는 그 앞에 선 사람의 가슴을 답답하게 누르는 힘이 있었다.
음양쌍마의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몰라도 강호에서 그의 일수를 받아 낼 사람은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몽뇌산은 잘 몰랐지만, 혁무빙은 지금 평소보다 굉장히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혁무빙이 그답지 않게 긴말을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호호호! 그래? 그럼 왜 가만히 있느냐? 자, 어서 와서 나를 죽여 보려무나.
아니면 나와 함께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즐겨 보든지. 듣기로 너를 사모하는 강호의 여인이 부지기수(不知其數)라 하나 그 중 한 명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던데, 나는 어떠냐? 나의 방중술(房中術)은 천하에서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이니 너 또한 나와 한 번만 자본다면 결코 그 즐거움을 잊을 수 없으리라! 호호호호!”
소아경은 혁무빙을 요염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가슴을 내민 자세로 흐드러지게 웃었다.
협의(俠義)가 넘치는 강호의 청년고수라면 그녀의 노골적인 말에 얼굴을 붉히며 발연(發燃) 대로(大怒)했겠지만
혁무빙은 달랐다.
그는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고 대로하여 검을 뽑아 들고 덤벼들지도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에 아까보다 더욱 종잡을 수 없는 기묘한 눈빛을 하고 소아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소아경은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그의 눈빛을 접하고는 안면을 싹 바꾼 채 발악(發惡)하듯 소리를 질렀다.
“왜 가만히 있는 게냐? 그 눈빛은 뭐지? 그 눈빛은 도대체 뭐야?”
“소아경! 아직도 자신이 죽음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모르는가?”
혁무빙의 입에서 흘러나온 나직한 물음은 소아경을 더욱 날뛰게 만들었다.
“무슨 소리냐! 네놈이 감히 나를 죽이겠단 말이냐? 이놈을 희생하고서라도?”
소아경은 몽뇌산의 목에 단도를 더욱 바짝 들이댔다. 그 바람에 몽뇌산의 목에서 가느다란 혈선(血線)이 생기며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몽뇌산은 목에 따끔거리는 느낌과 함께 축축한 것이 흘러나오자 오만가지 인상을 다 써댔다.
“아니! 넌 이미 내가 죽일 필요도 없어졌다. 굳이 내 검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너를 죽이는 것은 따로 있을 테니까.”
“무슨 소리냐? 얕은 수작 부리지 마라! 간교하게 격장지계(擊腸之計)로 나를 속이려는 것이냐? 어림없다!”
소아경은 눈동자에 독한 빛을 흘리면서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가 하고 있는 말은, 당신이 그냥 있어도 죽는다는 소리야. 아니, 그냥 있으면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지. 쯧쯧!”
몽뇌산은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네놈은 가만있어! 죽고 싶지 않으면!”
소아경은 단도 끝으로 피가 배어나오는 몽뇌산의 목을 쓰윽 긁어대며 새된 소리를 냈다.
“나를 죽이면 당신도 저 사람의 손에 죽을 거고, 어쩌면 나를 죽이기도 전에 당신이 먼저 죽을
수도 있지! 산몽과의 독이 발작하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이만큼 말해 줬는데도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몽뇌산은 소아경의 행동에는 아랑곳없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몽뇌산과 혁무빙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 소아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산몽과라니? 독이라니? 내가 중독되었다는 소리냐? 혁무빙! 감히
네가 정파의 인물임을 자처하면서 독을 썼단 말이냐?”
“무슨 여자가 이렇게 둔해? 이것 봐! 그가 독을 쓴 게 아니야. 당신 스스로 독을 먹은
거라구! 그러게 왜 남의 것을 함부로 뺏어 먹어서 화를 자초하냔 말이야!”
몽뇌산은 못마땅한 음성으로 소아경을 추궁했다.
순간, 소아경의 시선이 발치에 떨어진 산몽과의 씨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떨리는 눈빛이 몽뇌산의 얼굴에 와서 꽂혔다.
“이, 이게……?”
“그게 바로 산몽과지. 독과 중 그보다 강한 독을 지닌 것은 몇 개 없어.”
소아경은 말없이 서 있는 혁무빙을 돌아보더니 다시 몽뇌산에게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돌렸다.
“어서 내놔! 물론 해약을 가지고 있겠지?”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몽뇌산은 고개를 흔들었다.
“해약은 없어.”
“거짓말 마라! 해약도 없이 저런 독을 가지고 다닌단 말이냐?”
“정말 없대두? 그리고 해약이 있어도 당신은 벌써 늦었다구!”
몽뇌산은 이마를 접으며 소리를 높였다.
“아니야! 내놔!”
“미간(眉間)을 향해 검은 기운이 뻗치기 시작했으니 벌써 늦었어.”
몽뇌산의 딱딱한 말을 듣고 소아경은 잠시 침묵했다.
천천히 혁무빙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서 광기(狂氣)가 뻗어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모두 네놈 때문이야. 우리 남매가 이렇게 된 건 모두 네놈 탓이야! 네가 보는 앞에서 이놈을 죽이고야
말겠다. 네놈의 검이 강호의 후기지수(後期之秀) 중
최고라 하나 지금 상황에선 어쩔 수 없겠지. 호호호! 네놈의 성격으로
보아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겠지. 잘난
네놈의 무공으로도 사람을 구하지 못했으니! 호호…… 악!”
소아경은 몽뇌산을 방패처럼 앞에 내세운 채 실성한 듯 소리 높여 웃다 말고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몽뇌산의 목에 겨눈 단도를 더 바짝 들이대는 것을 잊지 않았다.
“헉헉! 으음`─`!”
괴로운 듯 신음을 토해 내던 소아경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녀의 손에 들린 단도에서 예리한 기운이 느껴진다 싶은 순간, 혁무빙의 신형이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번뜩거렸
쑤아아`─`!
몽뇌산은 단도에서 느껴지는 살벌한 기운에 참 재수도 더럽게 없다는 생각을 하다 말고,
갑자기 코앞에 밀어닥친 혁무빙의 검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그의 눈이 휘둥그래지는 찰나, 소아경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몽뇌산은 엉덩이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땅바닥에 처박혔다.
“아악`─`!”
소아경의 입에서 나왔을 것이 뻔한 여자의 비명 소리가 길게 메아리치며 잠시 후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쿵`─`!
몽뇌산은 어느새 검을 검집에 넣고 바닥에 드러누운 소아경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혁무빙의 모습에, 그 자리에서 튕겨지듯 발딱 일어나다 말고
엉덩이를 움켜쥔 채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그, 아니, 그녀는 죽었나? 쳇! 여자도 여자지만 당신 손속도 어지간히 맵군!”
몸을 일으켜 다가온 몽뇌산이 단도를 쥔 채 아직도 미미하게 꿈틀거리는 소아경의 한
팔과 미간에 혈점을 박아 넣고 차디찬 바닥에 몸을 눕힌 그녀의 부릅떠진 눈을 쳐다보았다.
“그 독이 완전히 발작해서 죽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더 고통스러웠을 텐데……”
몽뇌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대꾸하는 혁무빙의 음성에는 얼음막이 한 겹 둘러져 있었다.
몽뇌산은 흑기(黑氣)가 선연한 소아경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아경의 팔을 보자 새삼 아까의 급박했던 상황이 떠오르는지 몽뇌산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혁무빙에게 투덜거렸다.
“그렇다고 그렇게 세게 집어던질 건 뭐람?”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구시렁거리다 말고 몽뇌산은 눈을 치켜 떴다.
“이봐!”
몽뇌산은 눈살을 찌푸리며 장내를 벗어나는 혁무빙을 불러 세웠다.
혁무빙의 걸음이 딱 멈춰지며 그의 신형이 빙그르르 돌아섰다.
몽뇌산은 얼음처럼 차가운 혁무빙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사과도 안 하고 그냥 갈 건가?”
혁무빙의 눈빛이 더욱 차게 가라앉았다.
“사람을 그렇게 집어던졌으면 당연히 사과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몽뇌산의 억지소리를 들은 혁무빙의 눈동자에 잠깐 이채(異彩)가 번뜩였다.
죽을 거 살려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나오는 몽뇌산을 묵묵히 바라보던 혁무빙은 다시 몸을 돌려 길을 가기 시작했다.
“이봐!”
몽뇌산은 다시 혁무빙의 발길을 붙잡았다.
“사과하기가 쑥스러우면 뭐, 그건 됐다 치고, 내가 길을 물어 보려던 사람을 죽였으니
대신 길이나 가르쳐 주고 가지?”
이번에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 혁무빙을 향해 몽뇌산은 큰 인심이나 쓰듯 당당히 말했다.

혁무빙의 어깨가 움찔하더니 그의 몸이 조용히 돌아섰다.
혁무빙은 죽은 소아경과 몽뇌산의 모습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더니 무뚝뚝하게 물었다.
“어떤 길을 알고 싶은가?”
몽뇌산의 눈빛이 잠깐 반짝거렸다.
‘사리가 분명하군.’
“개봉까지 가야 하지만 우선은 무창으로 가는 길을 알고 싶은데.”
혁무빙의 눈에 기묘한 빛이 떠올랐다가 금방 사라졌다.
“이 산을 넘으면 바로 무창이다.”
“그럼 산을 넘고 나서 개봉 쪽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나?”
혁무빙은 끈질긴 몽뇌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길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길을 설명하자면 자연 말이 길어질 텐데, 그는 본래 길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른다고 거짓말하는 것도 그의 성격으론 불가능했다.
그래서 얼마간의 침묵 후 그에게서 나온 대답은 혁무빙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결코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길을 정 모르겠다면 나를 따라오면 된다.”
몽뇌산의 질문이 더 계속될까 두려웠는지 혁무빙은 그 말을 끝으로 빠르게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몽뇌산은 자로 잰 듯 일정한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혁무빙의 뒷모습을 향해 어쩐지 떨떠름한 눈빛을 보냈다.
그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가는 것이 썩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긴 산에서 헤매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나을 테니……
그래서 몽뇌산은 미적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혁무빙과 몽뇌산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자 차가운 산중의 겨울바람만이 낙엽을 날려 소아경의 식은 몸을 덮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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