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제2장 중부대륙의 살육자 로보
하프 블러드 : 1권 - 오우거의 피를 깨우지 마라
3화. 제2장 중부대륙의 살육자 로보 1
"서클릿에 마법이 걸려 있었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왕녀의 소지품을 하나하나 분해해서 살펴본 결과입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이는 검은 로브를 걸친 늙수그레한 마법사였다. 눈가에 검은 기미가 잔뜩 끼여 있었고, 음산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것을 보아 흑마법사인 듯했다.
"그랬군. 그렇기 때문에 추적대가 용이하게 행적을 파악할수 있었던 것이로군."
콘쥬러스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추적대의 손길을 피하지 못한 원인을 이제야 시원하게 파악한 것이다.
"추적 마법이 걸려 있는 서클릿이라…. 펜슬럿의 돼지들이 제법 머리를 썼군."
"돌아가는 즉시 서클릿을 없애버리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추적대가 더 이상 단테스를 따라잡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콘쥬러스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서클릿 때문에 숨쉴 틈도 없이 도주를 거듭해야 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오히려 서클릿이 임무의 성패를 가를 중요한 요소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이용해야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콘쥬러스의 머리는 정신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애초에 바랐던 대로 레오니아 왕녀를 납치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걱정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번 일에 마루스의 정보부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철저히 은폐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그 때문에 콘쥬러스는 단테스 일행과 함께 행동하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알게 모르게 이동하며 단테스를 지원해줄 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콘쥬러스는 조용히 되뇌었다.
"만약 이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날 경우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의 말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네트로만 황태자는 극히 다혈질적인 성격. 그가 자신의 약혼녀를 납치한 자를 가만히 내버려둘 리 만무했다.
만약 그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마루스는 그 날로 끝장이었다. 최악의 경우 크로센 제국의 대군이 대대적으로 마루스를 침공해 올 가능성도 있었다. 뭍론 네트로만 황태자가 제위를 물려받고 난 다음의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콘쥬러스에겐 애초부터 레오니아 왕녀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단지 그녀가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비로 오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레오니아 왕녀를 죽일 수는 없다. 그렇게 된다면 네트로만 황태자가 일의 전모를 철저히 조사하게 할 것이고, 자칫 잘못하면 본국의 정보부가 개입된 사실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니 일을 성사시킨 뒤 적당한 곳에서 레오니아 왕녀를 추격대의 손에 넘겨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다."
고개를 뒤흔든 콘쥬러스가 흑마법사를 쳐다보았다.
"혹시 왕녀의 배가 불러오는 기미는 없었소?"
흑마법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고위급 마법사인 그에겐 임신한 사실을 알아낼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그의 대답으로 보아 아직까지 임신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했다. 콘쥬러스는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골치 아프군. 백 일 동안 열심히 공을 들였는데도…."
수하 기사들로 하여금 레오니아 왕녀를 능욕하게 한 것은 바로 그녀에게 아기를 잉태시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비교적 성애에 대해 자유로운 것이 아르카디아 귀족사회의 경향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관대한 것은 아니었다. 자의이건 아니건 간에 결혼 전에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대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비로서 엄청난 결격사유가 된다. 마루스는 바로 그 점을 감안해서 레오니아 왕녀를 납치한 것이었다.
원래는 단테스를 머나먼 트루베니아까지 도주시킬 계획이 아니었다. 모종의 장소에서 레오니아 왕녀를 임신시킨 뒤 크로센 제국의 영토 내에서 놓아주려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크로센 기사들의 손에 구해져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차고 있는 서클릿에 추적마법이 걸려 있을 줄은 콘쥬러스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숨가뿐 도주를 거듭하며 머나먼 트루베니아까지 와야 했던 것이다. 콘쥬러스는 다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지금 두 부류의 추격대가 단테스의 뒤를 따르고 있다. 하나는 펜슬럿에서 파견된 추적대, 다른 하나는 크로센 제국의 추적대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그 전에 레오니아 왕녀를 잉태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녀를 구하는 것은 오로지 크로센 제국의 추적대가 되어야 한다."
레오니아 왕녀를 구해낼 경우 크로센 제국의 추적대는 펜슬럿으로 가지 않고 본국으로 귀환할 것이 분명했다. 약혼녀의 납치에 몸이 달아 있는 네트로만 황태자의 성격상 그럴 공산이 컸다.
또한 그녀의 임신 사실은 펠젠틴 궁성에서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만 레오니아 왕녀를 지금의 위치에서 자연스럽게 끌어내릴 수 있었다. 사실이 드러날 경우 크로센 황가에서 순순히 황태자비로 맞아들일 가능성은 전혀 없을 테니까.
생각을 마친 콘쥬러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단테스에게로 돌아가서 그를 약속장소로 인도하시오. 그동안 난 사람을 풀어 펜슬럿 추격대의 발목을 잡도록 하겠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흑마법사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콘쥬러스는 부유마법을 써서 몸을 날리는 흑마법사를 보지도 않은 채 몸을 돌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작전을 성공시키겠다는 각오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소?"
갑자기 터져 나온 단테스의 말에 마차를 몰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트루베니아에 건너온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소. 그동안 우린 정신 없이 도주를 거듭했소. 잠도 자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말이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적대는 정확히 우릴 포착하여 추적하고 있소. 저길 보시오."
단테스가 가리킨 곳은 지금껏 그들이 달려온 도로였다. 도로의 일부분, 시야가 겨우 미치는 곳에서 자욱하게 흙먼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바로 기마병이 달려오며 일으키는 먼지였다. 사내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약삭빠른 놈들이군. 벌써 이곳까지 따라오다니…."
단테스의 얼굴에 뭔가 확신한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레오니아 왕녀에게 뭔가가 있는 것 같소. 추적마법이 걸려있는 아티팩트가 아니고서야 이처럼 집요한 추격을 당할 리가 없소."
사내는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나친 걱정입니다. 조금 전까지 동행했던 마법사님은 7서클의 마스터이십니다. 그 어떤 아티팩트라도 그분의 이목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뭔가가 이상하오. 아무래도 왕녀의 소지품을 모두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 말에 대한 대답은 허공에서 들려왔다.
"단테스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왕녀가 가지고 있는 서클릿에 추적마법이 걸려 있더군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영 하나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조금 전까지 콘쥬러스와 대화를 나누던 검은 로브의 흑마법사였다.
마법사를 보자 단테스는 반색했다. 그의 조력으로 이곳까지 도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조금 늦으셨군요."
흑마법사가 다급히 손을 흔들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추적대가 바짝 따라붙은 상황이니 서둘러 움직여야 합니다."
"마법에 걸린 서클릿을 먼저 없애야 하지 않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늦었으니까요. 콘쥬러스 님께서 거기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두셨으니 그대로 따르시면 됩니다."
흑마법사는 고삐를 잡고 있는 사내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차를 돌려라. 이제부터 우린 저곳을 넘어가야 한다."
흑마법사가 가리킨 곳은 야트막한 산으로 올라가는 소로였다. 폭이 좁고 무척 험해 보이는 길이었기에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저 좁은 길로…."
"충분히 갈 수 있다. 이미 콘쥬러스 님께서 마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조처해 놓으셨다."
"알겠습니다."
사내는 두 말 하지 않고 마차를 돌렸다. 흑마법사는 눈빛을 빛내며 마차 옆자리에 앉았다.
마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상태로 소로를 타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다행히 소로는 마차가 달리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포장되지 않은 길이라 제 속도를 내진 못했지만 거치적거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베어진 나무와 정리된 바닥을 보니 누군가가 길을 미리 치워놓은 것 같았다.
일행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내맡겼다. 십 분 가량 달렸을 때 마법사의 눈이 번쩍 빛났다. 나뭇가지에 매여 있는 붉은 천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매복이 되어있다는 표식이로군."
슬쩍 고개를 돌리자 뒤를 쳐다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단테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추격이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걱정되십니까?"
"솔직히 그렇소. 이런 산길이라면 말을 탄 기사들이 월등히 유리하니 말이오. 흙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아 추격자가 적어도 백 명이상 되는 것 같던데…."
"아직까지 콘쥬러스 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시는군요."
마법사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길 옆 풀숲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숲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인영들이 꼬물거리며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단테스 일행은 깜짝놀랐다.
"뭐, 뭐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곳에서 고용한 용병들입니다. 저들이 추격자들의 발목을 잡아 줄 것입니다. 마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든 것도 바로 저들입니다."
그 말에 단테스는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켰다. 마법사의 말대로 숲에서 튀어나온 그림자들이 질서정연하게 길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나무를 쓰러뜨려 장애물을 만들고, 미리 준비해 온 죽창을 세워 대 기병 방책을 세웠다. 적어도 이백 이상 되어 보이는 인원이 움직이고 있었기에 단테스는 입을 딱 벌렸다.
"언제 이런 준비를…."
"트루베니아의 물가는 아르카디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쌉니다. 저들 모두를 고용하는 데 고작해야 10골드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그렇게나 싸다니 믿을 수 없군요. 10골드라면 아르카디아에서는 용병 열 명 정도를 간신히 고용할 수 있는 금액인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치안이 극도로 불안하기 때문인지 트루베니아는 용병시장이 무척 잘 발달되어 있더군요."
"하긴."
고개를 끄덕이는 단테스의 눈에 이상한 모습이 들어왔다. 열심히 손울 놀려 나무를 베고 방책을 쌓는 용병들 중에 인간이 아닌 자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녹색 피부의 작달막한, 그러나 왜소한 체격에 비해 제법 우람한 근육을 가진 유사종족들이 용병들 사이에 뒤섞여 작업에 몰두해 있었다.
"저, 저건 오크잖아? 세상에 말로만 듣던 오크를 이곳에서 보게 되다니…."
입을 딱 벌리는 단테스를 향해 마법사가 친절히 설명을 해 주었다.
"저들은 오크 노예들입니다. 백 년 전에 벌어진 3차 종족전쟁 이후 대부분의 오크와 몬스터들이 황량한 노스우드 평원으로 쫓겨 들어갔습니다. 나머지는 죽든지 이처럼 노예가 되었지요. 용병대장의 말을 들어보니 용병으로 꽤나 쓸만한 것 같습니다. 일체의 보수 없이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되니 말입니다. 저것들이 있는 까닭에 전반적으로 용병 값이 쌀 수밖에 없겠지만 말입니다."
마차를 몰던 사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요지경이로군요. 저까짓 몬스터들을 용병으로 부리다니…. 정말 형편없는 대륙이로군요. 아무튼 두 번 다시 트루베니아엔 오고 싶지 않습니다."
투덜거리던 사내를 향해 마법사가 주의를 주었다.
"이럴 시간이 없소. 저들이 추격대의 발목을 잡아주는 사이 약속장소에 도착해야하오. 서두릅시다."
"알겠습니다."
마차는 또다시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마차가 지나가자 용병들의 작업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보수를 후하게 받았기에 누구 하나 게으름을 피지 않았다.
하지만 용병들은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마차를 추적하는 자들이 대부분 소드 엑스퍼트 이상의 실력자들이란 사실을. 무지에 대한 대가로 그들에겐 오로지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어쨌거나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마차가 지나간 소로는 완전히 폐쇄되어 버렸다.
"오는군."
콘쥬러스의 눈빛이 빛났다. 산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거무스름한 물체를 보고 난 후의 일이었다. 그가 머물러 있는 곳은 산 중턱에 위치한 공터였다. 이곳이 바로 단테스와 약속을 한 장소였다.
마차는 느린 속력으로 힘겹게 고갯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콘쥬러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용병 차림새를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일 처리 능력이 뛰어난 유능한 부관이었다.
"상황은 어떤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정대로 펜슬럿 추격대는 고용한 용병들에게 발목이 잡혔습니다. 뭐 오 분도 되지 않아 전멸했지만 용병들이 비교적 길을 잘 막아두었더군요. 제 예상으로 놈들이 이곳까지 오려면 최소한 한 시간은 걸릴 것입니다."
"크로센의 추격대는 어디까지 접근했나."
"흔적을 남겨둔 것이 주효해서 시간을 많이 단축시킬 수 있었습니다. 약 십오 분 정도면 크로센 제국의 추격대가 이곳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수고했어."
고개를 끄덕인 콘쥬러스가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곤 조그마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부관을 향해 불쑥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부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죽으로 된 물병을 건넸다. 미묘한 눈빛으로 그것을 쳐다보던 콘쥬러스가 물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주머니 속의 가루를 물병 속에 부어넣었다.
부그르르
분홍빛 가루는 물에 닿자마자 기포를 일으키며 녹아 들어갔다. 물병 뚜껑을 닫은 콘쥬러스는 가루가 잘 녹도록 물병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가까이 다가왔다.
"콘쥬러스 님."
가장 먼저 뛰어내린 사람은 흑마법사였다. 그가 미묘한 눈빛을 번뜩이며 콘쥬러스 옆에 서자 단테스가 다가왔다.
그를 본 콘쥬러스의 표정이 돌변했다. 조금 전의 무표정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면에는 사람 좋은 웃음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능히 한 나라의 정보부를 책임질 만한 표정관리였다.
"오오, 왔는가, 단테스."
"오랜만에 뵙습니다."
단테스가 지친 표정으로 예를 올렸다. 콘쥬러스를 만난 이상 그의 임무는 여기에서 모두 끝난 것이다. 지긋지긋한 도주행각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드디어 끝났군."
왕녀를 납치한 석 달 동안 단테스는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자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필사적으로 도주를 거듭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고생은 모두 끝났다. 이제 자신은 영웅으로서 당당히 마루스에 입성할 수 있을 것이다. 단테스는 그 사실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콘쥬러스가 미소를 지으며 물병을 건넸다.
"정말 수고했네. 임무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자네 덕이었어."
"별 말씀을…."
목이 말랐던지 단테스는 물병을 받아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을 콘쥬러스와 흑마법사가 주의 깊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아래, 위로 움직이는 단테스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물통을 비운 단테스가 입가를 훔치며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추격대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서둘러 레오니아 왕녀를 처리하고 이곳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지. 임무를 홀륭히 완수했으니 말일세. 이제 자네에겐 마루스로 금의환향하는 것만 남았군. 기쁘지 않나, 단테스?"
"솔직히 그렇습니다."
머쓱한 표정을 짓는 단테스를 보며 콘쥬러스가 마주 웃었다. 그러는 사이 일단의 사내들이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그들의 어깨에는 시체 두 구가 둘러메져 있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가슴팍에 난 상처에서 아직까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체를 본 단테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시체의 얼굴 생김새나 차림새가 함께 도주해온 동료들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웬 시체입니까?"
"대역일세. 이제 우린 시체와 마차, 그리고 레오니아 왕녀를 남겨둔 채 이곳을 뜰 걸세."
"그녀를 처치하지 않을 겁니까?"
"그럴 필요는 없네. 임무는 이것으로 종결되었네."
눈을 둥그렇게 뜬 단테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의 일은 어차피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제 대역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순간 콘쥬러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져버렸다.
"미안하지만 자네 대역은 없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얼떨떨해 하는 단테스의 얼굴은 이미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만 단테스 자신만이 인지하고 있지 못할 뿐이었다.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간 콘쥬러스가 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자넨 이곳에 남아야 하네. 왕녀를 납치한 범인이 사라진다면 추격이 계속 이어질 테니 말일세. 자넨 엄연히 왕녀를 납치한 주범이야.''
"서, 설마…."
단테스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우린 이번 일을 철저히 자네 독단으로 벌인 일로 처리할 생각이네. 추적대로 하여금 자네가 왕녀의 미모에 흑심을 품은 나머지 독자적으로 납치했다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지. 자네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완벽한 일처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콘쥬러스에겐 애초부터 단테스를 마루스로 데리고 갈 생각이 없었다. 작전 자체가 단테스의 희생을 전제로 짜여졌기 때문이다. 감언이설로 현혹시켜 일에 끌어들이긴 했지만 단테스를 기다리는 것은 오로지 죽음 뿐이었다.
"미안하지만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자넬 살려 둘 수가 없군.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자네의 희생으로 조국 마루스는 풍요로운 중앙 평원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니…."
"세상에…."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하던 단테스가 마침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굴이 사정없이 화끈거렸고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뛰고 있었다.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시선이 손에 들린 물병에 닿았다. 콘쥬러스가 적절한 시기에 건넨 물병이었다. 단테스는 그때서야 콘쥬러스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3화. 제2장 중부대륙의 살육자 로보 1
"서클릿에 마법이 걸려 있었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왕녀의 소지품을 하나하나 분해해서 살펴본 결과입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이는 검은 로브를 걸친 늙수그레한 마법사였다. 눈가에 검은 기미가 잔뜩 끼여 있었고, 음산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것을 보아 흑마법사인 듯했다.
"그랬군. 그렇기 때문에 추적대가 용이하게 행적을 파악할수 있었던 것이로군."
콘쥬러스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추적대의 손길을 피하지 못한 원인을 이제야 시원하게 파악한 것이다.
"추적 마법이 걸려 있는 서클릿이라…. 펜슬럿의 돼지들이 제법 머리를 썼군."
"돌아가는 즉시 서클릿을 없애버리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추적대가 더 이상 단테스를 따라잡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콘쥬러스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서클릿 때문에 숨쉴 틈도 없이 도주를 거듭해야 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오히려 서클릿이 임무의 성패를 가를 중요한 요소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이용해야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콘쥬러스의 머리는 정신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애초에 바랐던 대로 레오니아 왕녀를 납치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걱정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번 일에 마루스의 정보부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철저히 은폐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그 때문에 콘쥬러스는 단테스 일행과 함께 행동하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알게 모르게 이동하며 단테스를 지원해줄 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콘쥬러스는 조용히 되뇌었다.
"만약 이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날 경우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의 말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네트로만 황태자는 극히 다혈질적인 성격. 그가 자신의 약혼녀를 납치한 자를 가만히 내버려둘 리 만무했다.
만약 그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마루스는 그 날로 끝장이었다. 최악의 경우 크로센 제국의 대군이 대대적으로 마루스를 침공해 올 가능성도 있었다. 뭍론 네트로만 황태자가 제위를 물려받고 난 다음의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콘쥬러스에겐 애초부터 레오니아 왕녀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단지 그녀가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비로 오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레오니아 왕녀를 죽일 수는 없다. 그렇게 된다면 네트로만 황태자가 일의 전모를 철저히 조사하게 할 것이고, 자칫 잘못하면 본국의 정보부가 개입된 사실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니 일을 성사시킨 뒤 적당한 곳에서 레오니아 왕녀를 추격대의 손에 넘겨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다."
고개를 뒤흔든 콘쥬러스가 흑마법사를 쳐다보았다.
"혹시 왕녀의 배가 불러오는 기미는 없었소?"
흑마법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고위급 마법사인 그에겐 임신한 사실을 알아낼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그의 대답으로 보아 아직까지 임신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했다. 콘쥬러스는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골치 아프군. 백 일 동안 열심히 공을 들였는데도…."
수하 기사들로 하여금 레오니아 왕녀를 능욕하게 한 것은 바로 그녀에게 아기를 잉태시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비교적 성애에 대해 자유로운 것이 아르카디아 귀족사회의 경향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관대한 것은 아니었다. 자의이건 아니건 간에 결혼 전에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대 크로센 제국의 황태자비로서 엄청난 결격사유가 된다. 마루스는 바로 그 점을 감안해서 레오니아 왕녀를 납치한 것이었다.
원래는 단테스를 머나먼 트루베니아까지 도주시킬 계획이 아니었다. 모종의 장소에서 레오니아 왕녀를 임신시킨 뒤 크로센 제국의 영토 내에서 놓아주려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크로센 기사들의 손에 구해져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차고 있는 서클릿에 추적마법이 걸려 있을 줄은 콘쥬러스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숨가뿐 도주를 거듭하며 머나먼 트루베니아까지 와야 했던 것이다. 콘쥬러스는 다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지금 두 부류의 추격대가 단테스의 뒤를 따르고 있다. 하나는 펜슬럿에서 파견된 추적대, 다른 하나는 크로센 제국의 추적대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그 전에 레오니아 왕녀를 잉태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녀를 구하는 것은 오로지 크로센 제국의 추적대가 되어야 한다."
레오니아 왕녀를 구해낼 경우 크로센 제국의 추적대는 펜슬럿으로 가지 않고 본국으로 귀환할 것이 분명했다. 약혼녀의 납치에 몸이 달아 있는 네트로만 황태자의 성격상 그럴 공산이 컸다.
또한 그녀의 임신 사실은 펠젠틴 궁성에서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만 레오니아 왕녀를 지금의 위치에서 자연스럽게 끌어내릴 수 있었다. 사실이 드러날 경우 크로센 황가에서 순순히 황태자비로 맞아들일 가능성은 전혀 없을 테니까.
생각을 마친 콘쥬러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단테스에게로 돌아가서 그를 약속장소로 인도하시오. 그동안 난 사람을 풀어 펜슬럿 추격대의 발목을 잡도록 하겠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흑마법사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콘쥬러스는 부유마법을 써서 몸을 날리는 흑마법사를 보지도 않은 채 몸을 돌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작전을 성공시키겠다는 각오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소?"
갑자기 터져 나온 단테스의 말에 마차를 몰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트루베니아에 건너온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소. 그동안 우린 정신 없이 도주를 거듭했소. 잠도 자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말이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적대는 정확히 우릴 포착하여 추적하고 있소. 저길 보시오."
단테스가 가리킨 곳은 지금껏 그들이 달려온 도로였다. 도로의 일부분, 시야가 겨우 미치는 곳에서 자욱하게 흙먼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바로 기마병이 달려오며 일으키는 먼지였다. 사내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약삭빠른 놈들이군. 벌써 이곳까지 따라오다니…."
단테스의 얼굴에 뭔가 확신한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레오니아 왕녀에게 뭔가가 있는 것 같소. 추적마법이 걸려있는 아티팩트가 아니고서야 이처럼 집요한 추격을 당할 리가 없소."
사내는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나친 걱정입니다. 조금 전까지 동행했던 마법사님은 7서클의 마스터이십니다. 그 어떤 아티팩트라도 그분의 이목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뭔가가 이상하오. 아무래도 왕녀의 소지품을 모두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 말에 대한 대답은 허공에서 들려왔다.
"단테스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왕녀가 가지고 있는 서클릿에 추적마법이 걸려 있더군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영 하나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조금 전까지 콘쥬러스와 대화를 나누던 검은 로브의 흑마법사였다.
마법사를 보자 단테스는 반색했다. 그의 조력으로 이곳까지 도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조금 늦으셨군요."
흑마법사가 다급히 손을 흔들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추적대가 바짝 따라붙은 상황이니 서둘러 움직여야 합니다."
"마법에 걸린 서클릿을 먼저 없애야 하지 않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늦었으니까요. 콘쥬러스 님께서 거기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두셨으니 그대로 따르시면 됩니다."
흑마법사는 고삐를 잡고 있는 사내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차를 돌려라. 이제부터 우린 저곳을 넘어가야 한다."
흑마법사가 가리킨 곳은 야트막한 산으로 올라가는 소로였다. 폭이 좁고 무척 험해 보이는 길이었기에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저 좁은 길로…."
"충분히 갈 수 있다. 이미 콘쥬러스 님께서 마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조처해 놓으셨다."
"알겠습니다."
사내는 두 말 하지 않고 마차를 돌렸다. 흑마법사는 눈빛을 빛내며 마차 옆자리에 앉았다.
마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상태로 소로를 타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다행히 소로는 마차가 달리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포장되지 않은 길이라 제 속도를 내진 못했지만 거치적거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베어진 나무와 정리된 바닥을 보니 누군가가 길을 미리 치워놓은 것 같았다.
일행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내맡겼다. 십 분 가량 달렸을 때 마법사의 눈이 번쩍 빛났다. 나뭇가지에 매여 있는 붉은 천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매복이 되어있다는 표식이로군."
슬쩍 고개를 돌리자 뒤를 쳐다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단테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추격이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걱정되십니까?"
"솔직히 그렇소. 이런 산길이라면 말을 탄 기사들이 월등히 유리하니 말이오. 흙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아 추격자가 적어도 백 명이상 되는 것 같던데…."
"아직까지 콘쥬러스 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시는군요."
마법사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길 옆 풀숲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숲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인영들이 꼬물거리며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단테스 일행은 깜짝놀랐다.
"뭐, 뭐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곳에서 고용한 용병들입니다. 저들이 추격자들의 발목을 잡아 줄 것입니다. 마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든 것도 바로 저들입니다."
그 말에 단테스는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켰다. 마법사의 말대로 숲에서 튀어나온 그림자들이 질서정연하게 길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나무를 쓰러뜨려 장애물을 만들고, 미리 준비해 온 죽창을 세워 대 기병 방책을 세웠다. 적어도 이백 이상 되어 보이는 인원이 움직이고 있었기에 단테스는 입을 딱 벌렸다.
"언제 이런 준비를…."
"트루베니아의 물가는 아르카디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쌉니다. 저들 모두를 고용하는 데 고작해야 10골드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그렇게나 싸다니 믿을 수 없군요. 10골드라면 아르카디아에서는 용병 열 명 정도를 간신히 고용할 수 있는 금액인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치안이 극도로 불안하기 때문인지 트루베니아는 용병시장이 무척 잘 발달되어 있더군요."
"하긴."
고개를 끄덕이는 단테스의 눈에 이상한 모습이 들어왔다. 열심히 손울 놀려 나무를 베고 방책을 쌓는 용병들 중에 인간이 아닌 자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녹색 피부의 작달막한, 그러나 왜소한 체격에 비해 제법 우람한 근육을 가진 유사종족들이 용병들 사이에 뒤섞여 작업에 몰두해 있었다.
"저, 저건 오크잖아? 세상에 말로만 듣던 오크를 이곳에서 보게 되다니…."
입을 딱 벌리는 단테스를 향해 마법사가 친절히 설명을 해 주었다.
"저들은 오크 노예들입니다. 백 년 전에 벌어진 3차 종족전쟁 이후 대부분의 오크와 몬스터들이 황량한 노스우드 평원으로 쫓겨 들어갔습니다. 나머지는 죽든지 이처럼 노예가 되었지요. 용병대장의 말을 들어보니 용병으로 꽤나 쓸만한 것 같습니다. 일체의 보수 없이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되니 말입니다. 저것들이 있는 까닭에 전반적으로 용병 값이 쌀 수밖에 없겠지만 말입니다."
마차를 몰던 사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요지경이로군요. 저까짓 몬스터들을 용병으로 부리다니…. 정말 형편없는 대륙이로군요. 아무튼 두 번 다시 트루베니아엔 오고 싶지 않습니다."
투덜거리던 사내를 향해 마법사가 주의를 주었다.
"이럴 시간이 없소. 저들이 추격대의 발목을 잡아주는 사이 약속장소에 도착해야하오. 서두릅시다."
"알겠습니다."
마차는 또다시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마차가 지나가자 용병들의 작업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보수를 후하게 받았기에 누구 하나 게으름을 피지 않았다.
하지만 용병들은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마차를 추적하는 자들이 대부분 소드 엑스퍼트 이상의 실력자들이란 사실을. 무지에 대한 대가로 그들에겐 오로지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어쨌거나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마차가 지나간 소로는 완전히 폐쇄되어 버렸다.
"오는군."
콘쥬러스의 눈빛이 빛났다. 산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거무스름한 물체를 보고 난 후의 일이었다. 그가 머물러 있는 곳은 산 중턱에 위치한 공터였다. 이곳이 바로 단테스와 약속을 한 장소였다.
마차는 느린 속력으로 힘겹게 고갯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콘쥬러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용병 차림새를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일 처리 능력이 뛰어난 유능한 부관이었다.
"상황은 어떤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정대로 펜슬럿 추격대는 고용한 용병들에게 발목이 잡혔습니다. 뭐 오 분도 되지 않아 전멸했지만 용병들이 비교적 길을 잘 막아두었더군요. 제 예상으로 놈들이 이곳까지 오려면 최소한 한 시간은 걸릴 것입니다."
"크로센의 추격대는 어디까지 접근했나."
"흔적을 남겨둔 것이 주효해서 시간을 많이 단축시킬 수 있었습니다. 약 십오 분 정도면 크로센 제국의 추격대가 이곳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수고했어."
고개를 끄덕인 콘쥬러스가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곤 조그마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부관을 향해 불쑥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부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죽으로 된 물병을 건넸다. 미묘한 눈빛으로 그것을 쳐다보던 콘쥬러스가 물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주머니 속의 가루를 물병 속에 부어넣었다.
부그르르
분홍빛 가루는 물에 닿자마자 기포를 일으키며 녹아 들어갔다. 물병 뚜껑을 닫은 콘쥬러스는 가루가 잘 녹도록 물병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가까이 다가왔다.
"콘쥬러스 님."
가장 먼저 뛰어내린 사람은 흑마법사였다. 그가 미묘한 눈빛을 번뜩이며 콘쥬러스 옆에 서자 단테스가 다가왔다.
그를 본 콘쥬러스의 표정이 돌변했다. 조금 전의 무표정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면에는 사람 좋은 웃음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능히 한 나라의 정보부를 책임질 만한 표정관리였다.
"오오, 왔는가, 단테스."
"오랜만에 뵙습니다."
단테스가 지친 표정으로 예를 올렸다. 콘쥬러스를 만난 이상 그의 임무는 여기에서 모두 끝난 것이다. 지긋지긋한 도주행각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드디어 끝났군."
왕녀를 납치한 석 달 동안 단테스는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자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필사적으로 도주를 거듭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고생은 모두 끝났다. 이제 자신은 영웅으로서 당당히 마루스에 입성할 수 있을 것이다. 단테스는 그 사실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콘쥬러스가 미소를 지으며 물병을 건넸다.
"정말 수고했네. 임무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자네 덕이었어."
"별 말씀을…."
목이 말랐던지 단테스는 물병을 받아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을 콘쥬러스와 흑마법사가 주의 깊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아래, 위로 움직이는 단테스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물통을 비운 단테스가 입가를 훔치며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추격대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서둘러 레오니아 왕녀를 처리하고 이곳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지. 임무를 홀륭히 완수했으니 말일세. 이제 자네에겐 마루스로 금의환향하는 것만 남았군. 기쁘지 않나, 단테스?"
"솔직히 그렇습니다."
머쓱한 표정을 짓는 단테스를 보며 콘쥬러스가 마주 웃었다. 그러는 사이 일단의 사내들이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그들의 어깨에는 시체 두 구가 둘러메져 있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가슴팍에 난 상처에서 아직까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체를 본 단테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시체의 얼굴 생김새나 차림새가 함께 도주해온 동료들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웬 시체입니까?"
"대역일세. 이제 우린 시체와 마차, 그리고 레오니아 왕녀를 남겨둔 채 이곳을 뜰 걸세."
"그녀를 처치하지 않을 겁니까?"
"그럴 필요는 없네. 임무는 이것으로 종결되었네."
눈을 둥그렇게 뜬 단테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의 일은 어차피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제 대역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순간 콘쥬러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져버렸다.
"미안하지만 자네 대역은 없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얼떨떨해 하는 단테스의 얼굴은 이미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만 단테스 자신만이 인지하고 있지 못할 뿐이었다.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간 콘쥬러스가 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자넨 이곳에 남아야 하네. 왕녀를 납치한 범인이 사라진다면 추격이 계속 이어질 테니 말일세. 자넨 엄연히 왕녀를 납치한 주범이야.''
"서, 설마…."
단테스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우린 이번 일을 철저히 자네 독단으로 벌인 일로 처리할 생각이네. 추적대로 하여금 자네가 왕녀의 미모에 흑심을 품은 나머지 독자적으로 납치했다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지. 자네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완벽한 일처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콘쥬러스에겐 애초부터 단테스를 마루스로 데리고 갈 생각이 없었다. 작전 자체가 단테스의 희생을 전제로 짜여졌기 때문이다. 감언이설로 현혹시켜 일에 끌어들이긴 했지만 단테스를 기다리는 것은 오로지 죽음 뿐이었다.
"미안하지만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자넬 살려 둘 수가 없군.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자네의 희생으로 조국 마루스는 풍요로운 중앙 평원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니…."
"세상에…."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하던 단테스가 마침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굴이 사정없이 화끈거렸고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뛰고 있었다.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시선이 손에 들린 물병에 닿았다. 콘쥬러스가 적절한 시기에 건넨 물병이었다. 단테스는 그때서야 콘쥬러스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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