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지옥으로 추락한 날들

등록 2026.10.14 6.6천자 조회 0 좋아요 0 댓글 0 15세 이상 이용가
Pride

12화. 지옥으로 추락한 날들


"어떻게 된 거니."
뒤집어 쓴 이불 너머로 익숙한 음성이 들린다.
형......

"어머니가 회사로 전화하셨어. 네가 심하게 아프다고. 얼마나 아픈 거야 병원에 가보자"
"아냐- 형"
간신히 끌어낸 목소리는 꽉 잠겨져 있어 제대로 소리를 낼 수가 없다.
침대에 걸쳐 앉은 기척이 느껴진다.
그때 이후로 처음인데...

"수민아."
낮고 청량한 목소리.
형의 소리다. 너무나 익숙한.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너 답지 않게 이게 무슨 일이야"
슬며시 이불을 끌어내린다.

"내버려둬."
다시 뒤집어 써버렸다.
하지만 형은 끈질겼다.

"다친 거야?"
얼굴에 생긴 찰과상을 보고 묻는다.
"세상에.....네 얼굴을 이 정도로 만들다니. 어떤 놈이야. 크게 싸운거냐?"
가는 손가락이 상처 주위를 쓰다듬는다.
흠칫하는 기운에 손을 쳐냈다.

일순간의 적막감.

싫다.
이렇게 된 나 자신도,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형도.
이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그 자식들도.

기나긴 침묵에 질려 항복한 것은 내가 먼저였다. 고개를 돌려 슬쩍 형을 올려다보았다.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있었다. 한 점도 흔들림 없이.

"내가......더러워?"
그렇게 묻는 형의 눈은 지극히 담담했다. 아니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했다.

뭐가 그렇게 당당한 건데?
뭐가 그렇게.....
형도 똑같아. 그 자식들이나 형이나.
나란 존재를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어야해?

말하지 않았다.
한마디도.
하지만....내 눈 속에서 그런 비난을 읽었는지 형은 계속 침묵했다.

도대체 눈에 뭐가 그렇게들 씌운거야?
왜들 날 그런 더러운 눈으로 보느냐고?

이어 형은 아주 안쓰러운 눈을 했다. 내가 안쓰럽다는 듯이.
그리고 손을 가져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눈 하지마!"
"안 할 수가 없잖아."
형은 웃었다.
"울 것 같아. 금방이라도."
쳐내려 했지만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귀여워"
제길.
"치워!"
"수민아. 유감이야. 네가 내 동생이란게. 하지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 녀석이 널 가만 두지 않았을 거야. 널 정말 죽이려 들었을걸?"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감겨오는 손을 뿌리쳤다.

"네가 사랑스러우니까 하는 말이야."
형이 정말 이상해졌어.
이런 이상한 형 난 몰라.
지난번처럼 제정신이 아니야.

"비켜. 엄마 부르기 전에"
"우리 둘이 다투나 보다 하시겠지. 언제나처럼 말이야."
가늘게 웃는 눈은 이상하리 만치 색스러웠다.
"손대지 마!"
"그럼 왜 그런지 말해."
상처로 손을 대며 나즈막히 속삭였다.
귀가로 불어오는 숨결에 귀가 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나가!"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길,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나 다...

"좋아. 그럼 오늘은 그냥 갈게. 하지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그 말은 내 허벅지를 쓸며 귓가를 살짝 물고 하는 말이었다. 내가 놀라 밀쳐내기 전에.



"너, 얼굴 왜이래?"
매니저는 보자마자 펄쩍뛰었다.
"죄송해요."
"허참-. 너 답지 않게 무슨 싸움을 하고 돌아다녔길래 이 모양이야? 이게 화장으로 지워질까?"
한참을 고민하더니 메이크업 담당자를 부르러 달려갔다.
화장으로 상처는 간신히 가려졌고 죽을거 같았던 얼굴색도 조금은 화색이 돌았다.


"너 아프다고 누워있다더니, 이래서 그랬구나. 자식아. 그것 때문에 드라마 녹화 펑크났잖아. 조심을 해야 할거 아냐 조심을! 누가 그렇게 노는거 티내고 다니랬어? 응?"
한참을 들어야 할 설교는 실상, 빠듯한 일정에 밀려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과연 제정신으로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맨정신일 리가 없다.
그렇지만.....그렇다고 해서 죽어지낼 수는 없는 거니까.

누워지내는 내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멍해진 머리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아니....워낙에 형에게 받은 충격이 컸던 탓에 그보다는 덜하다. 대신.......감당할 수 없는 분노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피곤해?"
"네."
"그럼 이것만 끝내고 잠깐 눈 좀 붙여. 조금 있다가 라디오 나가야 하니까. 알았지?"
"네."
밀린 일들을 며칠 내에 끝내느라 몸이 말이 아니었다.
피곤이 몰려온 것은 오늘 녹화하는 드라마에 승현이 형이 나오기 때문이다. 내내 긴장해 있었지만 형은 늦었고 끝내 내가 나오는 씬의 촬영이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이다 싶다 하며 안도하니 피곤이 확 밀려들어오고 졸음이 쏟아졌다.



얼굴이 말이 아닌데
하지만 이런 곳에 이렇게 잠들다니.......바보 아냐?

소리가 들리는데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가위눌린 건가?

넌 왠 일이야?
위에 녹화 있었어. 잠시 들린 거야.

헉.
두 사람이다.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죽도록 용을 쓰는데도.

악몽이라도 꾸는 걸까?
깨우지 마
설마 이대로?

그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 나를 올라탔다.

안돼!

그제서야 눈이 번쩍 떠졌다.
"깼잖아."
"오랜만이야 수민아"
"제, 젠장 비켜!"
올라탄 승현형을 밀쳐내려 했지만 위에서 진영이가 손을 눌러 내리고 있었다.

"비켜! 소리지를 거야. 안 비켜?"
"질러봐. 사람들한테 광고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안그래?"
진영이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손을 눌러내리고 있는 진영이의 손목에 손가락이 닿았다. 조금만....
손가락 사이에 손목이 잡히고 이내 꺾어서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챘다. 하지만 힘을 늦춘 듯 싶었던 손은 다시 내 손목을 꺽어버렸다.

"윽!"
"한번 속지 두 번 속겠어?"
제길.
하지만 이내 포기하지 않고 위로 올라탄 형을 향해 무릎을 세워 킥을 먹였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분장실 내에서 난투극이 벌어진 것은.
어마어마한 소리가 들렸을 법도 한데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녹화 끝나고 다 흩어졌거든."
"그나저나 빨리 끝나고 가봐야 하잖아. 너 라디오 12시에 생방 있다며."
두 사람을 노려봤다. 인간이 왜 이렇게까지 뻔뻔들 한 걸까.
하지만 나도 지난번처럼 당하지는 않아. 적어도 약에 취해있지는 않으니까.

"개자식들"
"너 입이 상당히 거칠어 졌구나."
"닥쳐!"
형을 향해 소리를 질렀을 때 형은 조금쯤 슬픈 표정이었다.
하?
네가 지금 그런 표정을 지어서 어쩌겠다고?

"이런 곳에서 덤비다니 둘 다 미친거 아니야?"
"이런 곳이 아니면 어디든 좋은 거야?"
비아냥거리는 진영이를 향해 틈을 주지 않고 발을 날렸다. 잽싸게 피하는걸 볼 새도 없이 옆으로 다가오는 형의 배를 팔꿈치로 찍고 다시 진영이에게 훅을 먹이고 잽싸게 물러섰다.
이번에는 쉽지 않을걸?


서로들 힘겨운 싸움에 지쳐갔다.
물론 여러모로 내가 열세였다.
나는 땀이 비오듯 흐르고 호흡이 거칠어진 반면 그들은 멀쩡했다. 단지 이리저리 긁히고 채인 상처에 인상을 썼을 뿐이다. 특히 내가 진영이의 얼굴을 후려친 게 적중해 진영이는 아주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진영이의 잽싼 몸놀림을 당할 수가 없었다.
형의 기술적인 움직임도.
격한 난투극 끝에 상체가 형에게 제압당했고, 진영이는 내 복부로 한방을 먹였다.

'헉-'

깨끗했다. 머리 속까지 울리는 충격에 뇌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단 한방으로....

"죽여 버릴 거야!"
소리를 지르고 발악을 하자 이내 내 입은 틀어 막혔다.
내 바지를 잡아끌어 내리고 어느새 진영이는 내 엉덩이를 감싸쥐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갈까?"
움찔거리며 몸이 굳어 버렸다.
협박이었다.
비열한 자식.

"그래, 그렇게 얌전히 있어. 지난번에는 힘들었지?"
뒤쪽에서 승현이 형은 옆구리 밑으로 손을 집어 넣어 옆구리를 끌어 당겨 자신의 몸에 바짝 대고 셔츠를 끌어 올렸다.

"미안해."
귀밑에서 속삭이는 그 말.
내 분노를 부채질할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승현이 형 차례였다.
승현이 형이 올라타서 날 괴롭히고 있을 때 보고 말았다.
분장실 문이 아주 살짝 열린 것을.
그리고 그 틈새로 누군가 화들짝 달아나는 것을................



그날 이후........난 지옥으로 추락해버렸다.
난 누구에게든 외면당하거나 고립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누구와든 친했고 누구와든 잘 지냈다. 이렇게 누군가 나를 대고 수군거리는 건 처음이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사람들에게 이상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아지는 경험은 처음이다.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눈들. 예전처럼 솔직하게 웃어주지 않는다. 예전처럼 소탈하게 인사해주지 않는다.

당연히 조금씩 소문이 퍼져버린 것이다.
내가 승현형과 진영이 에게 당했던 일들이.
내가 그들과 관계하고 있다고 소문이 나버렸다.
어느 한 사람도 아니라 둘 다를.

시간이 지날수록 소문은 잦아들지 않았고 오히려 엉뚱하게 부풀려져 있었다. 소문은 항상 달랐고 종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내가 호모이고 같은 동료 연예인을 애인으로 둘이나 꿰차고 있는 것으로 소문이 난 것만은 명확했다.


그들이 소문을 잠재웠냐면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진영이는 사실을 인정하며 내게 손을 대는 사람은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짱을 놓고 다녔다. 자신의 폭력적인 일면을 전혀 감추려고 들지도 않았다. 여기가 마치 그런 폭력의 세계인양 전혀 거리낌도 없었다.

승현형은 더 교활했다.
때때로 내 촬영장면이나, 내가 있는 곳에 나타나서 지켜보고 사라지고는 했다. 쉽사리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존재감이 엄청난 그런 대 스타가 유난히 내가 찍는 장면이나 촬영이 있는 곳만 골라서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있었다.
그리고 살짝 살짝 보여주는 나를 향한 재스춰. 그게 뭘 말하는 지는 이 촬영장의 10살 먹은 저 아역 탤런트를 제외하고는 다 알 것이다.


죽여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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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하는 기쁨.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악마가 분명하다.
그래서 난 악마이다.
아니 이 세상 누구나가 악마가 될 수 있다. 아니 누구나가 악마이다.
원래 인간은 주어진 낙원을 불행해질 것을 뻔히 알면서 갖잖은 탐욕으로 스스로 파괴했다. 그러니 그들을 불쌍히 여길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은 단순하게 바로 그 사건에서 시작된 것이다. 결국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고통을 겪고 그래서 파괴하고 또 고통을 겪고 그리고 그것을 되풀이 할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단지 가지고 있는 것을 파괴했다. 멀쩡히 자신들의 소유인데 파괴했다.
하지만 난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파괴했다. 그러니 그들에 비하면 나는 항변의 이유라도 있는 것이다. 탐욕이나 욕심 이전에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끝없는 동경과 아픔이 전제된 것이다. 이 얼마나 애절한지...........
게다가 여기에는 고뇌까지 있지 않은가.
선하고 깨끗한 것에 대한 갈망. 그것에 대한 몸부림.
차라리 훨씬 신성하기까지 하다.


이제 수민이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게 됐다.
그렇다고 가질 수 없어서 바라만 보게 된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제 된 거다.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그 눈이 더럽게 시리게 느껴져도, 죽여버리겠다고 증오로 살기등등하게 내뱉은 말에 이상하리 만치 가슴이 아파왔지만...
그래도.....이제 된 거다.


이승현을 봐도 그 녀석도 후회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악마가 되어 그 녀석을 꾄 것도 나고, 그래서 내가 더 악역 같은데, 그 녀석의 뻔뻔한 얼굴을 볼 때면 심히 의심이 든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게 아니었을까....
어차피 우리 둘 다 혼자서 악역을 떠맞고 싶지 않아서 단합했던거다.
하지만 매번 나보다 더 즐기는 것 같은 모습을 보면 더욱더 처음부터 작정한 것 같은 확신이 든다.
그런데 그 뻔뻔한 얼굴조차 때때로 어둡고 음습한 눈을 한다.
종잡을 수 없는 자식.

난 이런 인간이 싫어. 차라리 나처럼 철저히 악역을 하든지, 아니면 철저히 선한 역이든지 단순하게 가라고. 이렇게 이중적인 데다가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라니.
왠만큼 인간을 잘 아는 나이지만 특히 교활한 인간을 잘 아는 나이지만, 이 녀석만큼은 종잡을 수가 없다. 조금쯤 솔직하고 단순한 녀석이라고 여겼지만 한번 작정하면 나보다 한술 더 뜨는 사악한 인간이다. 그렇다고 철저히 그런 모습으로만 있는 것도 아니다 때때로 보여주는 지극히 고뇌하는 얼굴은 가끔 헷갈리게 만든다.
이런 놈이 더 나쁘다는 확신이 든다.
이런 놈이야 말로 악질이야.


"너 호모라며?"
그런데 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이제 또 한 건 잡았다 이거냐?
진성이놈 외삼촌 일로 아버지에게 불려와 한바탕 소리를 듣고 나가려던 찰나 이 놈이 또 달라붙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그야 지금 내 애인이 가수 유시연이잖냐. 게가 그러더라고"
하나.
"예쁜 애들도 많은데 하필 그런 놈이냐. 취향한번"
둘.
"그런데 이미 임자 있는 놈이라며? 세상에 사진영이 세컨드라니- 낄낄낄"
셋.
"그럼 네가 바텀이겠네?"
넌 죽었어.

우드득-
"아아아악!"
손목을 비틀어버렸다.
"우우우"
너덜거리는 손목을 보고 겁에 질려 눈물 꽤나 쏟고 있다. 아버지 집이라서 좀 참으려고 했더니 씹-

"그런 놈이라니. 어따 대고 주절거리는 거야. 한번만 그 녀석보고 그따위로 불러봐. 죽여버린다. 다음부터는 형수님이라고 불러. 알았어?"

끄덕끄덕.
울먹거리며 고개만 움직인다.

병신.

"그리고 내가 바텀할거 같아? 병신아? 내가 탑이야"
마지막으로 너덜거리는 손을 뭉개버리고 아버지가 놈의 비명소리를 듣고 나오기 전에 잽사게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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