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진실을 감추는 사람들

등록 2026.10.14 6.8천자 조회 0 좋아요 0 댓글 0 15세 이상 이용가
Pride

13화. 진실을 감추는 사람들


"그...그러니까 내 말은..."
"사실이야."
"................."
"어디서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수민이를 강간한 것도 사실이고 사진영이랑 함께 했던 것도 사실이야. 그런데 소문이 상당한가 보구나. 컴백한 뒤로는 사람들하고 절대 어울리지 않는 네가 알고 있을 정도니."
"....승....현아."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 믿고 싶지 않겠지."
경악스럽다 못해 울것 같은 은성이의 눈을 오래 쳐다보지는 못했다.
"왜야. 네가 왜 그런 짓을..."
은성이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인간이 자기 욕심 때문에 짐승이 되는건 순식간이야."



은성이는 한동안 할말을 잃고 있었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알고 있다.
이런 내 행동 나 자신도 물론이거니와 은성이도 절대 용납하지 못하리라는거...
"....너 답지 않아...이건 절대 너 답지 않은 짓이야. 넌 이런 사람이 아니야. 누가 뭐래도.....너 스스로에게 자신하던 사람이잖아."
떨리는 목소리로 한참 후에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가 너의 그 긍지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알아? 네가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고 의지가 대단했었는데....."
"...................."
"네 그 넘칠 정도로 많던 자신감은 다 어디간거야. 왜 그렇게 쉽게......그렇게 빨리.....포기하고 타협한거야? 응?"
"은성아."
"왜?"
"그 이야기 알아?"
"어떤....?"
"기억은 잘 안나. 어떤 책에서 읽었어.........어느 나라의 공주가 노예와 사랑에 빠졌어. 사실을 안 왕은 노발대발했지. 하지만 워낙에 공주가 강경하고 죽겠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그 노예를 그대로 죽이지는 못했어. 그래서 머리를 썼지. 공주에게 선택권을 준거야. 노예 앞에 놓인 두 개의 문을 두고 노예가 들어갈 곳을 선택하게 했어. 한 쪽 문은 사자가 있어서 문을 여는 즉시 노예를 갈갈이 찢어 놓아 죽게 만들 수 있고 다른 한 쪽은.........아름다운 여자 노예가 있어서 그 문을 여는 순간 그 둘이 결혼하게 하고 먼 곳으로 보내준다는 것이었어."
"......그래서?"
"공주는 어떤 문을 택했을까?"
"............."
"결론은 내리지 않은 채 그런 의문만을 던져주고 글은 끝나."
"............."
"너라면.......어떤 쪽을 택하겠니?"



".....모...르..겠어....."
"모르다니..이상한데 예전의 너같으면 분명히 노예를 살리는 걸 택했을 텐데 말이야."
"살리고 싶지만 그렇다고해서.....살리고 싶지만..."
"선택해야해."
"농담하지마. 그런 선택....정말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가 그렇게 쉽게 하겠어?"
"하지만 그 공주는 선택을 강요받았어. 어쩔 수 없이."
"................"
"누구든 그런 선택을 강요받는다면...아니 누구든 살면서 단 하나만을 선택해야하는 그런 상황이 된다면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고 어느 쪽을 택하든 고통을 감수해야해."
"...........하지만..."
"그런 상황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절대 없는 상황도 아니야. 운이 없어서 일지도 모르지만 결국 자신은 피눈물을 흘리며 선택해야해."
"네 상황이 그렇다는 거야?"
언성을 높여 묻는 은성이의 목소리는 화난 기색이 뚜렷했다.
"뭐가? 뭐가 그런 상황이라는 거야? 누가 너한테 그런 선택을 강요하기라도 했단 말이야? 그건 아니잖아!"
"그래 아니야. 하지만 말이야.........절대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그래서 포기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누구든 그를........채갈 거야. 넌 상상할 수 있니? 시현씨가 다른 사람하고 너무나 행복해하는거....."
"................"
"그런데 난 죽어도 그렇게 못해.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서....그렇게...나랑은 아무 관계도 없이.....그렇게 살아가는거..... 절대...절대....볼 수 없어. 수도 없이 나 스스로에게 물었어. 왜 그렇게 그 녀석이 좋은 거냐고. 왜 그렇게 생각하고 왜 그렇게 초조해하고 왜 그렇게 괴로워하는지......같은 사내녀석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만지고 싶고.......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고 하루라도 그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미칠거 같은지....수도 없이 물었어. 이유는 나도 몰라. 정말 모르겠어. 알고 있는건 앞으로....계속 그 녀석을 보지 못한다면 죽도록 괴로울거라는 거야. 하물며 나말고 다른 사람이라니....차라리.......차라리..........내 손으로 죽이는게 더 낫다는 생각을 했어. 다른 사람....의 것이 되는걸 보느니......영원히 그 누구의 것도 아니게 하는게 낳아.....절대로......"

목소리는 점차 격해졌고, 몸은 나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 주먹에는 있는 대로 힘이 들어가 어느새 붉다못해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그래서.......정말 죽이는걸 택한 거야? 그런 식으로....그렇게 죽게 만드는걸 택한 거야? 그럼 왜야 왜 굳이 다른 녀석까지 끌어들여?"
"보험이야."
"보험?"
"어차피.........확실하게 해야지. 나에게 떠나지 못하게 만든건데.....그걸 계기로 떠나면 어쩌라고."



"...........넌......잘못 판단했어..."
동정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어두운 눈.
은성이가 이런 눈을 한 적이 있던가?

"욕심을 부릴수록 잃게되고 욕심을 버릴수록 오히려 얻게 되는 게 세상 이치야. 가지려고 손을 쥐면 쥘수록 손안에 쥐어지는건 적을 수밖에 없고, 손을 펴면 펼수록 더 많이 받을 수 있어."
"................"
"난 지금은 시현씨를 사랑하지만 그때의 그 상처가 완전히 다 사라지지 않았어. 처음엔 워낙에 큰 문제 앞에서 별다르게 의식하지 못했지만......그 강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래 동안 사람을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게 하는지 알아? 나 그일 이후 강박증같은 게 생겼어. 지금은 좀 덜해졌지만.......그 때문에 시현씨 스스로도 많이 상처를 입었어......나 조차 내가 그렇게까지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에 많이 놀랬다고. 우리 문제는 내가 시현씨를 받아들였으니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 사람에게 적응하는거 오래 걸렸고, 강박증이 수그러들게 되는데도 오래 걸렸어. 악몽도 꿨었어. 지금은 가끔 이지만 꿀 때마다 가위눌리는 게 어떤 기분인지 넌 상상도 못할 거야. 그 때문에 시현씨가 늘 나에게 죄인처럼 구는게 얼마나 보기 힘들고 괴로운지 몰라. 아무리 내가 괜찮다고 그래도 우린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웠어. 그만큼........너무나 끔찍한 기억이라고........하지만.........난 그래도 강한 사람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텼고 이겨냈고, 살아남았어. 하지만.....그 사람도....수민씨도 그렇게 강하게 이겨낼 수 있을까?
"..................."
"악마와의 거래가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 넌 아직 잘 모르는거 같은데.....네가 얻게된 것보다 수백 배 더 많은 희생을 치뤄야 할거야."


그래 네 말이 맞아. 대가를 치루겠지.
대가..........

그런데 너야말로 날 너무나 모르는구나. 하긴 나도 몰랐어.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나인데......모든 것에 자신있던 나인데 나도 내가 이렇게 쉽게 타협할줄 몰랐어. 나도 내가 단순히 욕심 때문에 그 욕심이란것 때문에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이기적으로 변할 줄은 몰랐어.
뻔히 이것이 악마의 유혹인줄 알면서....
뻔히 이것이 얼마나 수민이를 절망하게 하는 일인줄 알면서도..
뻔히 모든 것을 ..이 모든 것의 결말을 예상하면서도 그러면서도 손을 뻗었어.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 인간이라는 거 새삼스럽게 알게되어 너무 놀라워.


지금 누군가 내 속을 들여다본다면 경악할 것이다.
한없는 폐허.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온통 메말라 건조해 말라 비틀어진 건물, 모래 자갈들만 가득하다. 그 속에서 매서운 바람만이 간혹 불고 있고 그 건조함을 적셔줄 물기라고는 단 한 방울도 없다. 그 속에 나는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이렇게 만들어버린 이 속에서 끝없이 이 목마름을 조금이라도 가시게 해줄 것 같은 그를 계속 갈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상하지...
이렇게 황폐해진 것은 그에 대한 욕망 때문인데, 이제는 이 황폐함을 없애고 싶어 그를 갈구한다.

그래...
아무래도 좋아.
이제는 아무래도 좋아.
어차피 끝이 보이는 일. 갈때까지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래, 이대로 지옥에 떨어진다고 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인간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을까.
과연 그 끝은 있는 걸까?
아니.....은성아......없어. 그 끝이라는건 없어.
말도 안돼는 욕망.......그 욕망이라는 것 때문에 끝없이 끝없이 추락해가는게 인간이야.
난 이제야 알게되었어. 한없이 추하고 한없이 더럽고 한없이 한없이 변명하고 싶어지는 내 자신을 이제야 알게되었어.

그런데.......
누군가 그러더군.
욕망에 대한 그리움이 바로 희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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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쉬는게 어떻겠냐?"
"네?"
"좀 쉬는게 좋겠어."
"................."
"왜 인지는 너 스스로가 더 잘 알거야. 지금 소문이 이렇게 크게 번지고 있으니 곧 기자들이 냄새를 맡을 거야. 그렇게되면 넌 그대로 연기생활 끝난다. 알고있지?"
"................."
"길게 이야기해서 뭣하겠냐. 사실 이 바닥이란게 원래 드럽잖냐. 소문 안났을 뿐이지 너같은 일 당하는 인간도 의외로 많다고. 그러니 신경쓰지 말고 조금 쉬었다가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잘 해보자고."



억울하기는 했지만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럼 적어도 그 자식들 면상은 안 봐도 되니까.


"수민아? 왠일이야?"
".........시간 있어?"
"그, 그럼. 잠깐 기다려."
바쁘게 서류를 정리한 형은 나를 데리고 자주 가는 바로 데리고 갔다.



"나 당분간 좀 쉬기로 했어."
"왜?"
"일단, 건강이 안 좋아져서"
"네가....건강이 안 좋아?"
형은 거의 미심쩍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궁색한 변명.
"좀더 공부도 더 해보고 싶고. 아직 많이 부족해서.."
"그래, 뭐 그렇다면야...."
우리는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형은 계속 나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내가 지난번과는 다르게 지극히 자연스럽게 형을 대하고 있었으니.....
"형.......만약에 말이야...."
"응?"
"만약에 형이........두 마리의 늑대를 동시에 사냥해야 한다면 형은 어떻게 하겠어? 어느 한쪽도 결코 만만치 않은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살아 남을 수 있을까?"
내 입에서 그런 질문이 나온 것은 형이 피곤하다며 일어서려 할 때였다.
형은 멈칫거리며 다시 의자에 주저앉아 나를 유심히 보더니 이내 이야기를 꺼냈다.
"두 마라.......그럴 때는 한가지 방법밖에 없지. 절대 두 마리를 다 상대하지 않을 거야. 한 쪽만을 유인하거나 몰아서 집요하게 공격해야지. 그리고 다른 한 마리는 그 다음이야."
"..........."
"두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라도 마찬가지야. 목표물을 하나 정하고 그 하나만큼은 철저히 뭉개버리는 거야."
"........철....저....히?"
"그래. 그건 인간들에게도 적용되지. 실제로 내가 써먹은 방법이야. 막 입사하고 승진이 되니까 견제와 질시가 장난이 아니었어. 넌 모르겠지만 회사란 곳이 한번 이지메를 시작하면 학교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거든."
설마....형이 그런 일을..
"그래서?"
"그래서 그중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사람을 한 명을 타겟으로 해서 지속적으로 공격했지. 그리고 완전히 밟아 버렸어."
"............"
"그 다음부터는 쉬워."
"형........"
"뭐.......내가 잘했다는건 아니야. 하지만 어차피 적자생존의 원칙밖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고 나도....그만큼 절박했으니까."
".........."
"친구 덕에 낙하산 타고 들어와서, 초고속 승진을 한다는 건 아무리 실력이 있고 인정받을 만 해도 누구나가 색안경 끼고 보는게 당연해. 더구나 우리 회사처럼 인재들만 모여 있다보면 서로 매우 민감해지지. 그때는 나도 젊었고, 무엇보다 스스로 나의 그런 상황이란 것 자체가 견디기 힘든 콤플렉스였어. 정말 뻔뻔한 인간이었다면 그런 것쯤 신경쓰지 않을텐데 의외로 타인의 인정이란 것에 연연해하는 조잡한 인간이었거든. 나란 놈...."
"그럼...어떻게 그런게 가능한거야?"
"구체적인 방법을 말하라는 거야?"
"응."
"뭐........타겟을 처음부터 죽이려고 덤벼드는건 아니야."
"그럼?"
"비굴하지만 그의 호감을 사도록 해야겠지. 그래서 상대로 하여금 방심하게 해야해."
"방심.."
"상대가 어떤 인간이냐에 따라 다르지만 근본은 다 비슷하니까........처음에는 가볍게 칭찬이나 가벼운 호의의 말 정도로 시작하고, 그리고 그의 성격을 파악하면 그에 따라 공략하는거지. 그리고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서 약점이라도 잡아두는게 좋아. 약점이 없다면 창의성을 발휘해서 하나 만들어줘야지."
"마, 만들다니?"
"꾸민다는 거야. 말 그대로. 없는 일을 있었던 것처럼. 증거정도 만드는 거야 간단하니까."



이후로 계속해서 형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섬짓한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우리 형이라는 사람............다시금 전혀 새롭게 볼 수밖에 없었다.
존경의 의미는 절대 아니다.
다만.....이렇게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다른 방법으로 형은 살아왔구나.....
그런 의미라고나 할까?
피를 나누었지만 우리는 정말로 타인과 같은 존재였다.


그럼......
이제 누굴 타겟으로 삼아 먼저 공략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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