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보이지 않는 배후
Pride
15화. 보이지 않는 배후
"오늘 촬영은 취소입니다."
느닷없는 감독의 말에 일어서려다 도로 주저앉았다. 다른 배우들도 영문을 모른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왜요?"
"배우를 다시 섭외해서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합니다. 적어도 1주일...아니면 그 이상 걸릴 것 같아서..... 아무래도 그 역을 대신할 마땅한 배우를 찾는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감독 대신 곤란한 표정의 조감독이 연신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여기저기서 질문이 터져나왔다.
"누가 중도하차하는 건데요?"
"한수민씨요"
뭐?
"한수민씨가 심하게 부상을 입어서 이번 영화는 무리라고 하더군요."
"부, 부상이라뇨?"
"교통사고래요."
난감해하며 흩어지는 스텝들을 뒤로하고 조감독을 쫓아가 잡았다.
"어느 정도죠?"
"글세. 한 두어 달은 병원 신세 질 정도입니다. 다리도 부러지고 몸이 말이 아니더라구요."
"그렇게 심해요?"
"네.....뭐, 교통사고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닌 것 같더라구요."
"무슨?"
"얼굴 부은 것도 그렇고 심하게 맞은 상처같던데요? 사진영씨랑 어울려 다니더니, 아무래도 그쪽 사람들한테 당한게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어느 병원이죠?"
새벽녘이 되어서야 간신히 숨어들어간 병실에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을 한 수민이가 있었다. 얼굴 여기저기 맞아서 붓고 멍든 흔적..........
사진영 그 자식이 어떤 녀석인데 수민이를 다른 놈 손에 이렇게 맞게 내버려둘 위인이 아니다. 항상 따라다니던 덩치들도 있고......이건 분명히........
죽여 버리겠어.......개자식.
"부탁이야. 네 도움이 필요해."
"꼭 이렇게까지 해야해? 결과가 어찌되었든 어차피 수민이가 선택한 사람이야. 네가 이러는 거-"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야."
"............네 마음은 알아.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없어. 이런 방법밖에는."
"왜 이렇게들 무모한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들 극단으로 달리는지 모르겠다고. "
"은성아"
"휴우- 알겠어. 알겠다고. 내가 네 부탁을 거절할 리가 없잖아."
"......그럼.."
"그래, 네가 뭘 부탁하든, 그게 뭐가 됐든, 난 절대 거절하지 못 할거야. 앞으로도. 난 그때.....네가 끝까지 내 편이 되어주고 날 끝까지 도와주었을 때 살인하는 것만 빼고는 네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다짐했었어."
"고맙다."
"그런 인사 받고 싶지 않아."
"............"
"제발 이 문제만 어떻게든 해결되면......네가 예전처럼...........웃을 수 있다면 좋겠다."
*********************************************
"오셨습니까?"
"그래, 별일 없었어?"
"방금 의사가 다녀갔습니다."
"그는?"
"조금전에 정신이 든 것 같습니다."
휴우- 어떻게 한다...
고민을 하다 문득 부하녀석들이 신경이 쓰였다.
"너희들은 잠시 쉬다와."
조용해진 복도에 서서 한참을 병실 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다...
수민이를 입원시켜 놓고 3일째야 병원에 찾아올 용기가 생겼다.
그런데.......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다. 어떻게 수민이 얼굴을 본단 말인가..
이 미친놈-
휴우-
아무리 질투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지만 도대체 왜 그 지경까지 만들어 놓았지? 응?
머리를 싸매고 밤을 새서 고민도 하고 자책도 해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한 두 번도 아니고 벌써 세 번째. 잘해주겠다고, 절대 손대지 않겠다고 말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벌써 세 번이나 손을 댄거다. 물론 예전에도 손을 대기는 했지만 그때와는 엄연히 다르다. 이제 완전히 내 것인데.....
아니.
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니까, 더 초조한거다. 그래서 더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굴 수밖에 없다. 이제 완전히 내 수중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분명히 나에게 승복했고, 나를 선택했는데..........내 옆에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뭔가 더 섬찟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철저히 벽을 만들고,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거부하지 않으면서, 밀어내지 않으면서 이렇게 냉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사사건건 그 자식을 끌어들이고 있다. 모든 대화에. 그러면서 오히려 그를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의도적인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로.
수민이를 향해 관대해지고, 성질을 죽이던 나도 이때만큼은 열이 치솟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교묘할 정도로 수민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속을 쑤셔 파내고 있다.
이건 뭘까...
정말 수민이가 의도한게 뭐지?
정말 내 보호가 필요해서 나에게 온 걸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 날 자극하는 걸까......
그리고......왜 나를 택했지?
"안들어가십니까?"
응?
돌아보니.......왠지 낯익은 듯한 사람이 서 있었다.
"문병 오신거 아닌가요?"
"아......맞습니다."
"사진영씨군요. 전 수민이 형 되는 사람입니다."
그랬군.
"수민이랑 가깝게 지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그럼 셈이죠."
기분 나쁠 만큼 날카로운 눈초리다. 설마 수민이한테 이런 형이 있을 줄은.
어쨌든 그를 따라 병실에 들어갔다.
"아....자고 있군요. 어쩌죠? 모처럼 찾아왔는데.."
"아, 아뇨. 괜찮습니다."
"꽃은 두고 가시죠. 제가 전해주겠습니다."
누워 있는 수민이에게서 눈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런.......생각보다 더 심하잖아. 제길......
하긴 죽이지 않은게 다행이지.
"심하죠? 어디서 어떻게 다쳤는지 모르지만, 꽤나 난폭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수민이 녀석도 상당한 실력인데 이 정도로 깨진걸 보면 상대는 전문적인 폭력배였던 것 같습니다."
폭력배라는 말이 유난히 크게 들린건 내심 찔려서 인가? 아니면.....그가 의도적으로 강조했기 때문일까.
"그런데, 첫날부터 밖에 있던 사람들, 사진영씨 집안 사람들 같던데요."
"아......네."
"일부러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군요."
"폐라뇨. 그건 당연히"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까부터 기분 나쁠 정도로 신경쓰인 저 눈빛은 사실 잘 위장하고 있어서 몰랐지만 적의를 숨기고 있는게 분명하다. 수민이가 다 말해버렸나?
"바쁘실텐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민이에게는 꼭 전해드리죠."
단호하게 나를 쫓아내는 그에게 굳이 성질 드러내며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수민이랑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조금 자중해야 하니까.
"지금 돌아가십니까?"
아....병실을 나서 한참을 가다 엘리베이터 쪽에서 부하들을 만났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들을 앞으로도 계속 세워두지 말라고 했었지? 하지만 아무래도 이 부분은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 같다. 어쨌거나, 난 누가뭐래도 수민이 애인이 분명하니 내가 굳이 그 형이란 인간에게 굽힐 이유가 없는거 아닌가..
발길을 돌려 다시 병실로 갔다.
하지만 병실 문을 열러고 하는 순간 안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멈칫거렸다.
"어쩌다 저런 녀석에게 걸린거야. 너도 참-"
수민이가 다시 깼나?
하는 생각에 조심스레, 아주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런데...........
제길!
저, 저건 또 뭐야.
하-
형이란 작자가 수민이에게.........입을 맞추고 있었다.......
"뭔가 잊은게 있습니까?"
"................."
그 뻔뻔한 눈을 보며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네, 잊은게 있죠. 수민이를 데려가야 겠습니다. 우.리.집.으로"
수민이를 집으로 데려다 놓았지만 마음은 훨씬 더 복잡했다. 어찌되었든 이제 얼굴을 봐야하는데, 도저히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농담이 아니야. 내가 왜 이렇게 쩔쩔 매는 거지? 도대체 이 사진영이 왜...
특별히 사귀던 인간들에게 손대본 적은 별로 없다. 다들 알아서 기니까.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만한 것이, 나보다 약한 여자들에게 손대는건 영 취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음에 안들면 바꿔치우면 되었으니.
그런데 도대체 이 내가 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자니 택현이가 들어왔다.
"본가에서 연락이 왔어."
"무슨 일인데?"
"뭔가 잘못되고 있나봐."
"갑자기 등을 돌리다니 뭔가 있어."
"몇 명이나요?"
"모.두.다."
"우리 뒤를 봐준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루 아침에 등을 돌린단 말입니까. 게다가 게중에는 우리에게 약점 잡힌 놈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걸 알아내라는 거다. 뒤에서 아주 큰 거물급이 조정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 분명 뭔가가 있다고."
"거물급이라........그 정도의 사람들을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거물급이라면........설마....."
"나도 그쪽을 예상하기는 했다만, 너 혹시 아는 바 없냐? 우리 쪽에서 그 쪽과 연관될만한 일 말이다."
"..........조사해 봐야겠군요."
이건 느낌이다. 이건.........아직 뭔가 더 큰일에 대한 전초전에 불과하다....
내 예상 대로였다.
아버님이 잡혀 들어가셨다. 살인 및 탈세, 납치, 협박, 폭력등 수 십가지 죄목으로.
우리 쪽 변호사가 우리를 배신하고 모든 자료를 검찰에 넘긴 뒤였다.
아버님뿐이 아니었다. 숙부와, 진성이, 진성이 외삼촌. 택현이 아버지까지 모두 걸려들었갔다. 줄줄이.
이런 절호의 기회를 피래미들이 놓칠리 없다. 우리 일가가 점하고 있던 구역들이 속속들이 그놈들에게 접수되고 있었다. 나 혼자서 그런 소소한 일에까지 신경이 미치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내버려 둘 수밖에...
"알아내는데 애먹었어."
"누....구야?"
"정명그룹"
"거기서 왜?"
"정명그룹 회장이라기 보다........그..."
택현이가 말을 흐려?
그럼...
"진짜 실세 말이야?"
"응"
설마 했는데.......................
그 정도가 아니면 이렇게 짧은 기간 내에 그 많은 인간들을 움직일 수가 없다. 그것도 음흉하기 짝이 없는 정치가들을.
"그쪽에서 벌써 다 손을 쓴 것 같아."
"이유는?"
"............."
"아버지가 뭔가 그쪽과 안 좋은 일이 있었나?"
"그럴 턱이 없잖아. 우리 쪽과는 별다르게 접촉할 이유조차 없는데."
"그럼 그 집안에서 왜 우리에게 손댄단 말이야. 고작 이런 조직 일에 관여할 정도로 수준이 떨어진 거냐?"
".............."
"만나야겠어. 알아봐"
"하지만, 정식으로는 만나주지 않을 거야."
"무슨 수를 써서든 자리를 만들어. 3일 이내에"
내가 집안 일로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동안 수민이는 조금씩 회복이 되어가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뭔가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괘, 괜찮아?"
"................"
읽고 있는걸 들어다보니 지난번 그 영화의 대본이었다.
너...지금 시위하는 거지.
"의사는 다녀갔어?"
"................."
"수민아-"
하아-
정말.....그때 이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매일매일 무시하고 있다.
젠장, 이럴 때는 어떻게 달래야 하는 거지?
그 얼굴을 쳐다보며 고민을 하고 있자니...........새삼스레 얼굴 하나하나가 눈에 깊게 들어왔다. 대본만 쳐다보며 내리깐 눈. 고집스레 꽉 다문 입. 굵은 선에 뚜렷한 윤곽을 가진 얼굴.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인상. 저 얼굴이 웃으면 그렇게 가슴이 울렁거릴 수가 없었다. 화가 날 정도로. 그리고 긴 목 밑으로 벌어진 어깨.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 목에 입을 맞추었다.
대본을 움켜쥔 손. 남자의 손이다. 크고, 긴.
그 손을 펴내고 하나하나 섬세하게 쓰다듬었다. 손목 안쪽을 자극하며.
그나저나, 팔다리 다 짤린 상황에서 이렇게 느긋하게 있다니...나도 정말 제정신이 아닌가보군. 그런데 일가 친척 다 잡혀 들어갔는데......왜 나만 무사한 거지?
목표가..........나.....인가?
15화. 보이지 않는 배후
"오늘 촬영은 취소입니다."
느닷없는 감독의 말에 일어서려다 도로 주저앉았다. 다른 배우들도 영문을 모른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왜요?"
"배우를 다시 섭외해서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합니다. 적어도 1주일...아니면 그 이상 걸릴 것 같아서..... 아무래도 그 역을 대신할 마땅한 배우를 찾는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감독 대신 곤란한 표정의 조감독이 연신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여기저기서 질문이 터져나왔다.
"누가 중도하차하는 건데요?"
"한수민씨요"
뭐?
"한수민씨가 심하게 부상을 입어서 이번 영화는 무리라고 하더군요."
"부, 부상이라뇨?"
"교통사고래요."
난감해하며 흩어지는 스텝들을 뒤로하고 조감독을 쫓아가 잡았다.
"어느 정도죠?"
"글세. 한 두어 달은 병원 신세 질 정도입니다. 다리도 부러지고 몸이 말이 아니더라구요."
"그렇게 심해요?"
"네.....뭐, 교통사고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닌 것 같더라구요."
"무슨?"
"얼굴 부은 것도 그렇고 심하게 맞은 상처같던데요? 사진영씨랑 어울려 다니더니, 아무래도 그쪽 사람들한테 당한게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어느 병원이죠?"
새벽녘이 되어서야 간신히 숨어들어간 병실에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을 한 수민이가 있었다. 얼굴 여기저기 맞아서 붓고 멍든 흔적..........
사진영 그 자식이 어떤 녀석인데 수민이를 다른 놈 손에 이렇게 맞게 내버려둘 위인이 아니다. 항상 따라다니던 덩치들도 있고......이건 분명히........
죽여 버리겠어.......개자식.
"부탁이야. 네 도움이 필요해."
"꼭 이렇게까지 해야해? 결과가 어찌되었든 어차피 수민이가 선택한 사람이야. 네가 이러는 거-"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야."
"............네 마음은 알아.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없어. 이런 방법밖에는."
"왜 이렇게들 무모한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들 극단으로 달리는지 모르겠다고. "
"은성아"
"휴우- 알겠어. 알겠다고. 내가 네 부탁을 거절할 리가 없잖아."
"......그럼.."
"그래, 네가 뭘 부탁하든, 그게 뭐가 됐든, 난 절대 거절하지 못 할거야. 앞으로도. 난 그때.....네가 끝까지 내 편이 되어주고 날 끝까지 도와주었을 때 살인하는 것만 빼고는 네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다짐했었어."
"고맙다."
"그런 인사 받고 싶지 않아."
"............"
"제발 이 문제만 어떻게든 해결되면......네가 예전처럼...........웃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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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셨습니까?"
"그래, 별일 없었어?"
"방금 의사가 다녀갔습니다."
"그는?"
"조금전에 정신이 든 것 같습니다."
휴우- 어떻게 한다...
고민을 하다 문득 부하녀석들이 신경이 쓰였다.
"너희들은 잠시 쉬다와."
조용해진 복도에 서서 한참을 병실 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다...
수민이를 입원시켜 놓고 3일째야 병원에 찾아올 용기가 생겼다.
그런데.......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다. 어떻게 수민이 얼굴을 본단 말인가..
이 미친놈-
휴우-
아무리 질투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지만 도대체 왜 그 지경까지 만들어 놓았지? 응?
머리를 싸매고 밤을 새서 고민도 하고 자책도 해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한 두 번도 아니고 벌써 세 번째. 잘해주겠다고, 절대 손대지 않겠다고 말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벌써 세 번이나 손을 댄거다. 물론 예전에도 손을 대기는 했지만 그때와는 엄연히 다르다. 이제 완전히 내 것인데.....
아니.
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니까, 더 초조한거다. 그래서 더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굴 수밖에 없다. 이제 완전히 내 수중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분명히 나에게 승복했고, 나를 선택했는데..........내 옆에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뭔가 더 섬찟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철저히 벽을 만들고,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거부하지 않으면서, 밀어내지 않으면서 이렇게 냉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사사건건 그 자식을 끌어들이고 있다. 모든 대화에. 그러면서 오히려 그를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의도적인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로.
수민이를 향해 관대해지고, 성질을 죽이던 나도 이때만큼은 열이 치솟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교묘할 정도로 수민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속을 쑤셔 파내고 있다.
이건 뭘까...
정말 수민이가 의도한게 뭐지?
정말 내 보호가 필요해서 나에게 온 걸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 날 자극하는 걸까......
그리고......왜 나를 택했지?
"안들어가십니까?"
응?
돌아보니.......왠지 낯익은 듯한 사람이 서 있었다.
"문병 오신거 아닌가요?"
"아......맞습니다."
"사진영씨군요. 전 수민이 형 되는 사람입니다."
그랬군.
"수민이랑 가깝게 지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그럼 셈이죠."
기분 나쁠 만큼 날카로운 눈초리다. 설마 수민이한테 이런 형이 있을 줄은.
어쨌든 그를 따라 병실에 들어갔다.
"아....자고 있군요. 어쩌죠? 모처럼 찾아왔는데.."
"아, 아뇨. 괜찮습니다."
"꽃은 두고 가시죠. 제가 전해주겠습니다."
누워 있는 수민이에게서 눈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런.......생각보다 더 심하잖아. 제길......
하긴 죽이지 않은게 다행이지.
"심하죠? 어디서 어떻게 다쳤는지 모르지만, 꽤나 난폭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수민이 녀석도 상당한 실력인데 이 정도로 깨진걸 보면 상대는 전문적인 폭력배였던 것 같습니다."
폭력배라는 말이 유난히 크게 들린건 내심 찔려서 인가? 아니면.....그가 의도적으로 강조했기 때문일까.
"그런데, 첫날부터 밖에 있던 사람들, 사진영씨 집안 사람들 같던데요."
"아......네."
"일부러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군요."
"폐라뇨. 그건 당연히"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까부터 기분 나쁠 정도로 신경쓰인 저 눈빛은 사실 잘 위장하고 있어서 몰랐지만 적의를 숨기고 있는게 분명하다. 수민이가 다 말해버렸나?
"바쁘실텐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민이에게는 꼭 전해드리죠."
단호하게 나를 쫓아내는 그에게 굳이 성질 드러내며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수민이랑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조금 자중해야 하니까.
"지금 돌아가십니까?"
아....병실을 나서 한참을 가다 엘리베이터 쪽에서 부하들을 만났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들을 앞으로도 계속 세워두지 말라고 했었지? 하지만 아무래도 이 부분은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 같다. 어쨌거나, 난 누가뭐래도 수민이 애인이 분명하니 내가 굳이 그 형이란 인간에게 굽힐 이유가 없는거 아닌가..
발길을 돌려 다시 병실로 갔다.
하지만 병실 문을 열러고 하는 순간 안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멈칫거렸다.
"어쩌다 저런 녀석에게 걸린거야. 너도 참-"
수민이가 다시 깼나?
하는 생각에 조심스레, 아주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런데...........
제길!
저, 저건 또 뭐야.
하-
형이란 작자가 수민이에게.........입을 맞추고 있었다.......
"뭔가 잊은게 있습니까?"
"................."
그 뻔뻔한 눈을 보며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네, 잊은게 있죠. 수민이를 데려가야 겠습니다. 우.리.집.으로"
수민이를 집으로 데려다 놓았지만 마음은 훨씬 더 복잡했다. 어찌되었든 이제 얼굴을 봐야하는데, 도저히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농담이 아니야. 내가 왜 이렇게 쩔쩔 매는 거지? 도대체 이 사진영이 왜...
특별히 사귀던 인간들에게 손대본 적은 별로 없다. 다들 알아서 기니까.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만한 것이, 나보다 약한 여자들에게 손대는건 영 취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음에 안들면 바꿔치우면 되었으니.
그런데 도대체 이 내가 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자니 택현이가 들어왔다.
"본가에서 연락이 왔어."
"무슨 일인데?"
"뭔가 잘못되고 있나봐."
"갑자기 등을 돌리다니 뭔가 있어."
"몇 명이나요?"
"모.두.다."
"우리 뒤를 봐준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루 아침에 등을 돌린단 말입니까. 게다가 게중에는 우리에게 약점 잡힌 놈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걸 알아내라는 거다. 뒤에서 아주 큰 거물급이 조정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 분명 뭔가가 있다고."
"거물급이라........그 정도의 사람들을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거물급이라면........설마....."
"나도 그쪽을 예상하기는 했다만, 너 혹시 아는 바 없냐? 우리 쪽에서 그 쪽과 연관될만한 일 말이다."
"..........조사해 봐야겠군요."
이건 느낌이다. 이건.........아직 뭔가 더 큰일에 대한 전초전에 불과하다....
내 예상 대로였다.
아버님이 잡혀 들어가셨다. 살인 및 탈세, 납치, 협박, 폭력등 수 십가지 죄목으로.
우리 쪽 변호사가 우리를 배신하고 모든 자료를 검찰에 넘긴 뒤였다.
아버님뿐이 아니었다. 숙부와, 진성이, 진성이 외삼촌. 택현이 아버지까지 모두 걸려들었갔다. 줄줄이.
이런 절호의 기회를 피래미들이 놓칠리 없다. 우리 일가가 점하고 있던 구역들이 속속들이 그놈들에게 접수되고 있었다. 나 혼자서 그런 소소한 일에까지 신경이 미치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내버려 둘 수밖에...
"알아내는데 애먹었어."
"누....구야?"
"정명그룹"
"거기서 왜?"
"정명그룹 회장이라기 보다........그..."
택현이가 말을 흐려?
그럼...
"진짜 실세 말이야?"
"응"
설마 했는데.......................
그 정도가 아니면 이렇게 짧은 기간 내에 그 많은 인간들을 움직일 수가 없다. 그것도 음흉하기 짝이 없는 정치가들을.
"그쪽에서 벌써 다 손을 쓴 것 같아."
"이유는?"
"............."
"아버지가 뭔가 그쪽과 안 좋은 일이 있었나?"
"그럴 턱이 없잖아. 우리 쪽과는 별다르게 접촉할 이유조차 없는데."
"그럼 그 집안에서 왜 우리에게 손댄단 말이야. 고작 이런 조직 일에 관여할 정도로 수준이 떨어진 거냐?"
".............."
"만나야겠어. 알아봐"
"하지만, 정식으로는 만나주지 않을 거야."
"무슨 수를 써서든 자리를 만들어. 3일 이내에"
내가 집안 일로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동안 수민이는 조금씩 회복이 되어가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뭔가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괘, 괜찮아?"
"................"
읽고 있는걸 들어다보니 지난번 그 영화의 대본이었다.
너...지금 시위하는 거지.
"의사는 다녀갔어?"
"................."
"수민아-"
하아-
정말.....그때 이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매일매일 무시하고 있다.
젠장, 이럴 때는 어떻게 달래야 하는 거지?
그 얼굴을 쳐다보며 고민을 하고 있자니...........새삼스레 얼굴 하나하나가 눈에 깊게 들어왔다. 대본만 쳐다보며 내리깐 눈. 고집스레 꽉 다문 입. 굵은 선에 뚜렷한 윤곽을 가진 얼굴.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인상. 저 얼굴이 웃으면 그렇게 가슴이 울렁거릴 수가 없었다. 화가 날 정도로. 그리고 긴 목 밑으로 벌어진 어깨.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 목에 입을 맞추었다.
대본을 움켜쥔 손. 남자의 손이다. 크고, 긴.
그 손을 펴내고 하나하나 섬세하게 쓰다듬었다. 손목 안쪽을 자극하며.
그나저나, 팔다리 다 짤린 상황에서 이렇게 느긋하게 있다니...나도 정말 제정신이 아닌가보군. 그런데 일가 친척 다 잡혀 들어갔는데......왜 나만 무사한 거지?
목표가..........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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