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네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Pride
17화. 네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창백한 얼굴, 산소마스크를 썼지만 지나치게 창백한 얼굴을 보자 잠시 멍해졌다.
"앞으로 2-3일간이 고비입니다."
그의 부하이던가.....항상 곁에 있던 그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으로 옮겨야 합니다."
"이 지경인데?"
"언제 놈들이 병원을 급습할지 모릅니다."
"경비를 더 강화하면 되잖아요. 이 상태로 어떻게 옮긴다는 겁니까!"
순간 왜 화가 났는지 나도 모르겠다.
모른다...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죽이고 싶어서 이렇게 몰아넣었는데.......
중환자실인데도 밤새도록 멋대로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몇 번이고 간호사들이나 의사들이 나가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도 병실 밖에 있는 진영이의 부하들 때문인지 더 이상 강경하게 쫓아내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며칠 째인가 지나서 새벽녘에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그가 경고했던 대로, 그나마 죽어가는 진영이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쳐들어온 것이다.
무식한 것들.
꼼짝 않고 있을 때 누군가 한 놈이 들어왔다. 칼을 들고.
이미 상당한 혈투 때문인지 군데군데 피가 나왔고,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힘은 쓸 것 같지만 정말 전문칼잡이답게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리 진영이가 위태하다고 하나, 이런 놈을 보내다니.....
나를 향해 달려드는 놈의 손을 겨냥해 의자로 쳐서 칼을 떨어뜨리고 몸을 날려 발로 턱을 갈겼다.
/빠각/
턱이 나가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렸고 그 소리를 신호로 주먹이 날아갔다. 정신없이 놈을 두들겨 팼다. 한참을 그렇게 때리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어깨를 집었다. 그 뒤에 놈을 향해 주먹을 돌리는 찰나........그대로 잡혔다.
"이제 됐습니다. 기절했어요."
".............."
"고맙습니다."
밖으로 나와 주저앉아 머리를 숙였다.
주먹이 얼얼하게 아파왔다. 손이 벗겨졌고-
한번도.........이렇게 누군가를 정신을 놓을 정도로 때려본 적이 없다.
******************************
"누구에요?"
"아.....그냥 좀 아는 애에요."
"원조교제 해요?"
"하, 하...뭐.."
의외인데.
웬만큼 사생활은 깔끔한 편이었던 매니저가 중학생이나 될까말까한 여자아이 하나를 붙들고 있었다. 그것도 거리에서. 내가 그를 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냥 지나치려다가......그 아이가 너무 어려 보여서 지나치지 못했다. 키는 140도 안되고 비쩍 마른 아이.
무안해 하는 매니저를 노려보고, 그 아이에게 고개 짓을 했다.
"타. 경찰서 가고 싶지 않으면."
아이는 나와 매니저를 한번씩 쳐다보더니 나를 알아본 듯이 눈을 빛내며 순순히 내 차에 올라탔다.
"형도 집에 들어가 보세요."
매니져는 난감해하며 어쩔줄 모르더니 이내 포기한 듯 차를 타고 출발했다.
"집 어디니."
".................."
"경찰서 갈까?"
"○○동."
"거기 아파트단지?"
"네."
한참을 갔을까.
"저...승현이 오빠. 맞죠? 그렇죠?"
선글래스 너머로 아이의 얼굴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오빠라니....내가 지금 네 나이에 사고를 쳤으면 너 만한 딸이 있었겠다.
"밥은 먹었니?"
신호등에 걸렸을 때, 편의점이 눈에 걸려 슬쩍 물어보았다.
"아뇨. 아까 그 아저씨가 사준다고 했는데-"
"기다려."
음료수와 도시락을 대충 사들고 아이에게 던져주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왜 그랬을까.
이런 이상한 친절이 나에게 남아 있다니.....
"오빠, 연예인은 어떻게 되는 거에요?"
"연예인 되고싶어?"
우물우물 김밥을 씹으며 묻는 아이의 질문에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그냥, 궁금해서요."
"좀...힘들어. 이것저것 잘해야하고..그런데 그럼 다른 거라도 하고 싶은 거야?"
"다른게 하고 싶다기 보다, 전 그냥요 나중에 예쁜 가족을 갖는게 꿈이에요."
".........."
"아파트에서 살면서요, 밥지어놓고 회사 다녀오는 남편을 기다리는 거에요. 애는 둘 정도면 좋구요."
그 소박한 꿈 이야기가 의외여서 순간 말이 막혔다.
"저 말고 제 친구들도 다 비슷해요."
천천히 아파트 입구 쪽으로 차를 세웠다.
"그냥.....그렇게 사는게 꿈이야? 다른거 되고 싶은건 없어?"
"음.........아-. 예전에는 백댄서가 꿈이었어요."
에....
"왜 하필...백댄서야? 이왕이면 가수가 좋지 않아?"
"................"
"................"
"되고 싶지만......그런게 될 수 있을 턱이 없잖아요. 한번도 내가 뭔가 주인공이 된 적이 없는 걸요."
싸인을 해준 뒤 아이가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아파트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계속 지켜보았다. 군데군데 불이 켜져 있었지만 어쩐지 기분 나쁘게 크고 흉물스러운 건물이 마치 아이를 삼켜버리는 것 같았다.
저 아이는........
내일도 똑같은 거리에서 똑같은 일을 하겠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담배를 물고 서 있었다.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라.
중산층에서 태어나,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그 길 밖에 알지 못한다. 단 한번도 주인공이 되어보지 못한 저 아이의 삶의 어떤 것인지.....그건 아마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일 것이다. 그게 어떤 삶인지 내가 과연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벌써....저 어린 나이에 너무나도 현실적인 꿈밖에 꿀 수 없는 삶이란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있을까...
'당신이란 사람 난 존경하기까지 했어. 당신의 그 프라이드며, 그 확신에 찬 행동들, 항상 당당했고 비겁하지 않았고, 타협하지 않았고 그래서 당신은 빛났었어.'
'그런데 그런 당신이.......인간이 정말 끔찍한 존재란걸 나에게 알려주었어.'
그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도려지는 아픔을 느꼈다.
그 아픔을 느끼며 몸부림쳤지만 얻어지는 것은 없었다. 왜........내가 이렇게 추해졌는지. 도무지 스스로도 납득이 되질 않았다.
나의 프라이드란 것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정말 내가 그토록 당당하고 자신만만 할만 했기 때문일까?
저 아이 앞에서..........너무나도 지극히 현실적인 삶을 꿈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저 아이 앞에서 난 당당해질 수 있는 걸까?
내가 가졌던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지금은 이토록 우스워진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사실은..........
사실은..........아무 것도 아니었으니까.
-------------------------------------------
"어느 정도랍니까?"
"지금은 위험한 순간은 넘겼다고 하던데요? 하지만 이미 정상적으로 회복되기는 글렀죠 뭐."
수민이의 매니저를 통해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수민이는 매일매일을 병원에서 그 녀석의 간호를 하고 있었다. 일도 중단한 채.
정말이지 수민이가 어떻게 하고 있을 지는 눈에 빤히 보인다. 그 착한 녀석은 이때가 기회랍시고 진영이를 떠나지 못한다.
수민이를 그 자식에게 떼어놓겠다고 벌인 일인데........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사실상 진영이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거라고 생각지 못했기 때문 일거다.
수민이가........
정말.....그 녀석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러면.........이제 어쩌지?
병원으로 수민이를 찾아갔다.
"일은........하지 않을 생각이냐?"
"......진영이가 좀 낳아지면-"
"..............."
피곤이 역력한 모습에 말이 막혔다.
그럼에도 수민이의 눈은 이상하리 만치 생생했다.
"진영이........이렇게 된거, 내 탓이야."
비난을 예상하고 한 말이었다.
"................."
그 생생한 눈을 마주했을 때, 의외로 아무런 비난의 빛도 볼 수 없었다.
"알고 있었니?"
"알고 있었어."
다시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니?"
"왜 갑자기?"
"단순히 속죄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야. 거기까지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백퍼센트 잘못했다는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아. 다만 조금 미안할 뿐이지. 아직도 조금쯤은 잘됐다 싶은 마음이 있는건 부정할 수 없어.
".................."
"어찌되었든........네가 원하지 않은 일이었으니, 네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의미야."
"그럴 필요 없어. 우린......공범이니까."
거침없이 나오는 말에 아연실색했다.
공범?
바람이 불어왔다.
수민이의 머리카락이 날리며 그 눈을 가리웠다.
"말해봐. 형은 아직도 날 원해?"
"........그래. 아직도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널 원할거야."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진영이도 형도, 절대 쉽게 포기하고, 쉽게 나를 놔줄 사람들이 아니라고 느꼈어. 그 집착은 절대 그냥 평범한게 아니라고 말이야."
"..............."
"그러니 내가 자유로워지려면 한 명을 택해야했어. 그래서 진영이를 택했어. 진영이를 먼저 택해서 진영이를 완전히 죽일 생각이었지. 죽인건 내가 아니지만 내가 원한대로 형이 움직였어."
뭐........
"물론 진영이가 죽은 건 아니지만......이 정도면 된거겠지."
"............."
"그럼 이제 다음은 형 차례야."
"............."
"내가 어떻게 할거라고 생각해? 내가 어떻게 형을 죽일까? 응?"
바람이 멈췄다.
정지한 바람과, 시간 속에서 수민이의 눈만 뚜렷하게 보였다.
비감어린...
"형은........내가 남으라면 내 곁에 남을 거지? 그렇지?"
".....그...래."
"그래. 그럼 날 떠나지마."
수민아....
"하지만 나도 진영이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무슨 뜻인지 알아?"
"무......슨 뜻이야?"
"형은, 날 독점할 수 없다는 거지. 내 곁에 남고 남지 않고는 형 자유야. 하지만.......난 진영이 곁에 있을 거야. 평생-"
그 소리가 마치 영원처럼 길게 들렸다.
"날...........말려 죽이겠다는 거냐?"
"그래. 형 자존심에 견디기 힘들겠지?"
".............."
"하지만 새삼 어려운 일이 아닐 거야. 그렇지? 처음이 아니니까-"
비꼬는 음성은 너무나 슬프게 울렸다.
그리고, 그 음성이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 잘 알 수 있었다.
수민이는.......
내 자존심이, 내 대단한 자존심이 절대 그걸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 스스로를 포기하게 만들어서 나를 패배시키고 싶은 거다. 그래서 그 패배감에 분해하는 내 모습을 보고 싶은 거다. 차라리 진영이를 죽이면 죽였지 그런 어중간한 승리도 패배도 뭣도 아닌 것을.....택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애초에 진영이 녀석을 떼어내겠다는 목표가 없었다면 그 꼬임에 넘어가지 않았을 거다.
절박한 상황에서 그나마 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감수했던 것이다.
이기기 위해서, 타협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어떤 목표도, 성공의 보장도 없다. 영원히 그 상태.....
그런 승산 없는 것을 내가 택할 리가 없다.
내 자존심이 그런 말도 안 되는 결과를 용납하지 않는다.
예전의 나였다면........그랬을 것이다.
"그래........그렇게 라도.....네 곁에 있을 수 있다면.....그렇게 라도 네 곁에 있게 해준다면........ 그렇게 하겠어."
17화. 네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창백한 얼굴, 산소마스크를 썼지만 지나치게 창백한 얼굴을 보자 잠시 멍해졌다.
"앞으로 2-3일간이 고비입니다."
그의 부하이던가.....항상 곁에 있던 그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으로 옮겨야 합니다."
"이 지경인데?"
"언제 놈들이 병원을 급습할지 모릅니다."
"경비를 더 강화하면 되잖아요. 이 상태로 어떻게 옮긴다는 겁니까!"
순간 왜 화가 났는지 나도 모르겠다.
모른다...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죽이고 싶어서 이렇게 몰아넣었는데.......
중환자실인데도 밤새도록 멋대로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몇 번이고 간호사들이나 의사들이 나가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도 병실 밖에 있는 진영이의 부하들 때문인지 더 이상 강경하게 쫓아내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며칠 째인가 지나서 새벽녘에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그가 경고했던 대로, 그나마 죽어가는 진영이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쳐들어온 것이다.
무식한 것들.
꼼짝 않고 있을 때 누군가 한 놈이 들어왔다. 칼을 들고.
이미 상당한 혈투 때문인지 군데군데 피가 나왔고,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힘은 쓸 것 같지만 정말 전문칼잡이답게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리 진영이가 위태하다고 하나, 이런 놈을 보내다니.....
나를 향해 달려드는 놈의 손을 겨냥해 의자로 쳐서 칼을 떨어뜨리고 몸을 날려 발로 턱을 갈겼다.
/빠각/
턱이 나가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렸고 그 소리를 신호로 주먹이 날아갔다. 정신없이 놈을 두들겨 팼다. 한참을 그렇게 때리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어깨를 집었다. 그 뒤에 놈을 향해 주먹을 돌리는 찰나........그대로 잡혔다.
"이제 됐습니다. 기절했어요."
".............."
"고맙습니다."
밖으로 나와 주저앉아 머리를 숙였다.
주먹이 얼얼하게 아파왔다. 손이 벗겨졌고-
한번도.........이렇게 누군가를 정신을 놓을 정도로 때려본 적이 없다.
******************************
"누구에요?"
"아.....그냥 좀 아는 애에요."
"원조교제 해요?"
"하, 하...뭐.."
의외인데.
웬만큼 사생활은 깔끔한 편이었던 매니저가 중학생이나 될까말까한 여자아이 하나를 붙들고 있었다. 그것도 거리에서. 내가 그를 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냥 지나치려다가......그 아이가 너무 어려 보여서 지나치지 못했다. 키는 140도 안되고 비쩍 마른 아이.
무안해 하는 매니저를 노려보고, 그 아이에게 고개 짓을 했다.
"타. 경찰서 가고 싶지 않으면."
아이는 나와 매니저를 한번씩 쳐다보더니 나를 알아본 듯이 눈을 빛내며 순순히 내 차에 올라탔다.
"형도 집에 들어가 보세요."
매니져는 난감해하며 어쩔줄 모르더니 이내 포기한 듯 차를 타고 출발했다.
"집 어디니."
".................."
"경찰서 갈까?"
"○○동."
"거기 아파트단지?"
"네."
한참을 갔을까.
"저...승현이 오빠. 맞죠? 그렇죠?"
선글래스 너머로 아이의 얼굴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오빠라니....내가 지금 네 나이에 사고를 쳤으면 너 만한 딸이 있었겠다.
"밥은 먹었니?"
신호등에 걸렸을 때, 편의점이 눈에 걸려 슬쩍 물어보았다.
"아뇨. 아까 그 아저씨가 사준다고 했는데-"
"기다려."
음료수와 도시락을 대충 사들고 아이에게 던져주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왜 그랬을까.
이런 이상한 친절이 나에게 남아 있다니.....
"오빠, 연예인은 어떻게 되는 거에요?"
"연예인 되고싶어?"
우물우물 김밥을 씹으며 묻는 아이의 질문에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그냥, 궁금해서요."
"좀...힘들어. 이것저것 잘해야하고..그런데 그럼 다른 거라도 하고 싶은 거야?"
"다른게 하고 싶다기 보다, 전 그냥요 나중에 예쁜 가족을 갖는게 꿈이에요."
".........."
"아파트에서 살면서요, 밥지어놓고 회사 다녀오는 남편을 기다리는 거에요. 애는 둘 정도면 좋구요."
그 소박한 꿈 이야기가 의외여서 순간 말이 막혔다.
"저 말고 제 친구들도 다 비슷해요."
천천히 아파트 입구 쪽으로 차를 세웠다.
"그냥.....그렇게 사는게 꿈이야? 다른거 되고 싶은건 없어?"
"음.........아-. 예전에는 백댄서가 꿈이었어요."
에....
"왜 하필...백댄서야? 이왕이면 가수가 좋지 않아?"
"................"
"................"
"되고 싶지만......그런게 될 수 있을 턱이 없잖아요. 한번도 내가 뭔가 주인공이 된 적이 없는 걸요."
싸인을 해준 뒤 아이가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아파트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계속 지켜보았다. 군데군데 불이 켜져 있었지만 어쩐지 기분 나쁘게 크고 흉물스러운 건물이 마치 아이를 삼켜버리는 것 같았다.
저 아이는........
내일도 똑같은 거리에서 똑같은 일을 하겠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담배를 물고 서 있었다.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라.
중산층에서 태어나,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그 길 밖에 알지 못한다. 단 한번도 주인공이 되어보지 못한 저 아이의 삶의 어떤 것인지.....그건 아마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일 것이다. 그게 어떤 삶인지 내가 과연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벌써....저 어린 나이에 너무나도 현실적인 꿈밖에 꿀 수 없는 삶이란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있을까...
'당신이란 사람 난 존경하기까지 했어. 당신의 그 프라이드며, 그 확신에 찬 행동들, 항상 당당했고 비겁하지 않았고, 타협하지 않았고 그래서 당신은 빛났었어.'
'그런데 그런 당신이.......인간이 정말 끔찍한 존재란걸 나에게 알려주었어.'
그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도려지는 아픔을 느꼈다.
그 아픔을 느끼며 몸부림쳤지만 얻어지는 것은 없었다. 왜........내가 이렇게 추해졌는지. 도무지 스스로도 납득이 되질 않았다.
나의 프라이드란 것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정말 내가 그토록 당당하고 자신만만 할만 했기 때문일까?
저 아이 앞에서..........너무나도 지극히 현실적인 삶을 꿈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저 아이 앞에서 난 당당해질 수 있는 걸까?
내가 가졌던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지금은 이토록 우스워진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사실은..........
사실은..........아무 것도 아니었으니까.
-------------------------------------------
"어느 정도랍니까?"
"지금은 위험한 순간은 넘겼다고 하던데요? 하지만 이미 정상적으로 회복되기는 글렀죠 뭐."
수민이의 매니저를 통해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수민이는 매일매일을 병원에서 그 녀석의 간호를 하고 있었다. 일도 중단한 채.
정말이지 수민이가 어떻게 하고 있을 지는 눈에 빤히 보인다. 그 착한 녀석은 이때가 기회랍시고 진영이를 떠나지 못한다.
수민이를 그 자식에게 떼어놓겠다고 벌인 일인데........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사실상 진영이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거라고 생각지 못했기 때문 일거다.
수민이가........
정말.....그 녀석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러면.........이제 어쩌지?
병원으로 수민이를 찾아갔다.
"일은........하지 않을 생각이냐?"
"......진영이가 좀 낳아지면-"
"..............."
피곤이 역력한 모습에 말이 막혔다.
그럼에도 수민이의 눈은 이상하리 만치 생생했다.
"진영이........이렇게 된거, 내 탓이야."
비난을 예상하고 한 말이었다.
"................."
그 생생한 눈을 마주했을 때, 의외로 아무런 비난의 빛도 볼 수 없었다.
"알고 있었니?"
"알고 있었어."
다시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니?"
"왜 갑자기?"
"단순히 속죄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야. 거기까지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백퍼센트 잘못했다는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아. 다만 조금 미안할 뿐이지. 아직도 조금쯤은 잘됐다 싶은 마음이 있는건 부정할 수 없어.
".................."
"어찌되었든........네가 원하지 않은 일이었으니, 네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의미야."
"그럴 필요 없어. 우린......공범이니까."
거침없이 나오는 말에 아연실색했다.
공범?
바람이 불어왔다.
수민이의 머리카락이 날리며 그 눈을 가리웠다.
"말해봐. 형은 아직도 날 원해?"
"........그래. 아직도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널 원할거야."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진영이도 형도, 절대 쉽게 포기하고, 쉽게 나를 놔줄 사람들이 아니라고 느꼈어. 그 집착은 절대 그냥 평범한게 아니라고 말이야."
"..............."
"그러니 내가 자유로워지려면 한 명을 택해야했어. 그래서 진영이를 택했어. 진영이를 먼저 택해서 진영이를 완전히 죽일 생각이었지. 죽인건 내가 아니지만 내가 원한대로 형이 움직였어."
뭐........
"물론 진영이가 죽은 건 아니지만......이 정도면 된거겠지."
"............."
"그럼 이제 다음은 형 차례야."
"............."
"내가 어떻게 할거라고 생각해? 내가 어떻게 형을 죽일까? 응?"
바람이 멈췄다.
정지한 바람과, 시간 속에서 수민이의 눈만 뚜렷하게 보였다.
비감어린...
"형은........내가 남으라면 내 곁에 남을 거지? 그렇지?"
".....그...래."
"그래. 그럼 날 떠나지마."
수민아....
"하지만 나도 진영이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무슨 뜻인지 알아?"
"무......슨 뜻이야?"
"형은, 날 독점할 수 없다는 거지. 내 곁에 남고 남지 않고는 형 자유야. 하지만.......난 진영이 곁에 있을 거야. 평생-"
그 소리가 마치 영원처럼 길게 들렸다.
"날...........말려 죽이겠다는 거냐?"
"그래. 형 자존심에 견디기 힘들겠지?"
".............."
"하지만 새삼 어려운 일이 아닐 거야. 그렇지? 처음이 아니니까-"
비꼬는 음성은 너무나 슬프게 울렸다.
그리고, 그 음성이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 잘 알 수 있었다.
수민이는.......
내 자존심이, 내 대단한 자존심이 절대 그걸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 스스로를 포기하게 만들어서 나를 패배시키고 싶은 거다. 그래서 그 패배감에 분해하는 내 모습을 보고 싶은 거다. 차라리 진영이를 죽이면 죽였지 그런 어중간한 승리도 패배도 뭣도 아닌 것을.....택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애초에 진영이 녀석을 떼어내겠다는 목표가 없었다면 그 꼬임에 넘어가지 않았을 거다.
절박한 상황에서 그나마 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감수했던 것이다.
이기기 위해서, 타협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어떤 목표도, 성공의 보장도 없다. 영원히 그 상태.....
그런 승산 없는 것을 내가 택할 리가 없다.
내 자존심이 그런 말도 안 되는 결과를 용납하지 않는다.
예전의 나였다면........그랬을 것이다.
"그래........그렇게 라도.....네 곁에 있을 수 있다면.....그렇게 라도 네 곁에 있게 해준다면........ 그렇게 하겠어."
작가의 저작권 보호를 위해 에피소드 본문 복사가 제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