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제6장 - 강호십수(江湖十秀) 2

수정 2026.10.12 1.2만자 조회 2 좋아요 0 댓글 0 15세 이상 이용가
독로무한
13화. 제6장 - 강호십수(江湖十秀) 2


“개봉이 있는 하남성으로 가려면 지금 위치에서는 이 길을 곧장 따라 올라가는 것이 가장 빠를 것이다.”
혁무빙의 목소리는 꼬박 반나절을 동행한 사람치곤 너무나 쌀쌀맞았다.
물론 두 사람이 동행을 하긴 했지만 그들 사이에 많은 말이 오간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몽뇌산과 혁무빙이 세 시진여에 걸쳐 산을 빠져 나오면서 주고 받은 말이라곤 단 한 마디였다.
“그쪽 길이 아니야.”
“그냥 한번 가본 거야.”
몽뇌산이 그의 말투를 흉내내어 퉁명스럽게 대꾸해도 혁무빙에게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들이 산을 벗어나 관도변에 내려서자마자 혁무빙은 바람결에 은빛 찬란한 옷자락을 휘날리며 우뚝 서서 길을 가리켰
몽뇌산은 고개만 한번 까딱거린 후 미련없이 몸을 휙 돌렸
더 오래 같이 있다가는 혁무빙이 풍기는 냉기(冷氣)에 동사하든지 아니면 껄끄러움을 못 견디고 지레 질리든지 둘 중 하나가 될 것 같았다.
뒤에 혁무빙이 서 있다는 것조차 잊은 채 앞으로 쭉쭉 걸어가던 몽뇌산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는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혁무빙의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 혁무빙은 자기의 이름도 모르고 그냥
가버리는 것은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되어서였다.
몽뇌산은 뒤로 잽싸게 돌아서서 벌써 저만치 아래로 걸어가고 있는 혁무빙을 불렀다.
“이봐`─`!”
혁무빙의 몸이 움찔하더니 천천히 발길을 멈췄다.
뒤를 힐끔 돌아보는 그를 향해 몽뇌산은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를 매달고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혁무빙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당혹감이 스치는 걸 본 몽뇌산은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 내 이름은 몽, 뇌, 산이야.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기회가 닿으면 다음에 또 보자구!”
몽뇌산은 즐거운 듯 계속 웃으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이 생각지도 않게 정말 현실로 나타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가뿐한 마음으로 길을 떠났다.
한편, 몽뇌산이 헤어지는 마당에 싱글거리며 난데없이 이름을 밝히고 돌아서자 혁무빙은 잠시 황당하단
느낌을 받았
그의 엉뚱함을 대하자 불현듯 개봉에 있는 천부(天富)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하여간 저 몽뇌산이란 친구는 천부가 보았다면 그 동그란 눈을 반짝거리며 어지간히 관심을 보였을 만한 사람이었다.
‘누구도 그의 호기심을 막을 수는 없지.’
혁무빙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죽마고우(竹馬故友)니 생사지교(生死之交)니 하는 말은 둘 다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지만 그들이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천부의 넉넉하고 푸짐하기 짝이 없는 덩치를 떠올리자 혁무빙의 단아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 친구, 어지간히도 먹는 것을 밝히더니만……!’
혁무빙은 일부러 걸음을 천천히 했다. 단순히 친구에 대한 그리움에 빠져 있기 위함이 아니었다.
본시 혁무빙도 개봉까지 가는 길이었으니 몽뇌산이 간 방향으로 가야 옳았지만 남과 어울리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 까닭에 그는 차라리 몽뇌산을 먼저 보내는 쪽을 택했다.
조금 둘러 가는 한이 있어도 혼자 조용히 가는 편이 좋았
마음이 다시 부동의 경지로 들어서고 나자, 자연 그의 보폭이 평상시로 돌아왔다.
혁무빙이 길 중간에서 관도변에 잇닿아 있는 구릉의 숲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 자로 잰
듯 일정하던 그의 보폭이 점점 좁아지더니 이내 완전히 멈춰 섰다.
나무 사이로 관도를 바라보던 그의 눈 속에 빛살처럼 빠른 속도로 관도를 질주해 지나가는 이(二) 인(人)의 모습이 들어왔다.
순간, 혁무빙의 시원스레 쭉 뻗은 검미가 짧게 꿈틀거렸다.
“저분이 어떻게 여기에……?”
습관이 되어 버린 그의 서늘한 음성에는 숨길 수 없는 놀람이 드러나 있었다.
혁무빙은 방금 회의인과 갈의인이 관도를 지나 사라진 방향을 잠시 쳐다보더니 곧 그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앞서간 사람들 못지않을 정도로 그의 신형이 멀어져 가는 속도는 굉장했다.
아무튼 그가 전광석화(電光石火)란 말이 무색하게 사라지고 나자 인적없는 관도엔 어느새 저녁노을이
내려앉고 있었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몽뇌산은 다행히도 더는 헤매지 않고 무사히 무창성을 지나 인근
황주부(黃州府) 땅을 밟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혁무빙이 긴말하지 않고 단순하게 가르쳐 준 길은 너무나 정확했다.
몽뇌산은 씩씩하게 길을 재촉해서 날이 완전히 저물었을 무렵에는 백운산(白雲山)이 올려다보이는
황주부 산령현(山領縣)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따뜻한 불빛이 객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마을의 중심가를 몽뇌산은 느긋하게 걸었다.
그가 막 이층으로 된, 제법 번듯하게 생긴 주루 앞을 지나려 할 적에 갑자기 그 안에서 웬 화복사내 하나가 앞으로 꼬꾸라질 듯 계단을 달음질쳐 내려왔다.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이 언뜻 보아도 보통 대취(大醉)한 게 아닌 듯싶었다.
몽뇌산은 대충 서른 살은 넘어 보이는 사내를 힐끔거리며 행여 사내와 부딪칠세라 멀찌감치 돌아갈 생각을 했다.
길을 지나던 다른 행인들의 생각도 그와 다를 바가 없었는지 다들 발길을 조금씩
돌리는 바람에 주루 앞길에는 사내 혼자만 덩그러니 서 있는 꼴이었다.
그런데 비틀대며 행인들이 지나는 길 복판으로 나서던 사내가 무엇에 걸렸는지, 아니면 발이
엉킨 건지 갑자기 몸이 와락 앞으로 쏠렸다.
공교롭게도 그가 쓰러진 곳은 몽뇌산이 있던 쪽 바로 앞이었다.
몽뇌산은 그럴까 봐 미리 몸을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술 취한 사내가 자신의 발치께로 꼬꾸라지자 뛰어난
반사 신경을 발휘해 잽싸게 그를 부축했다.
“어이쿠! 이런, 이런! 대취했군.”
사문에서 무공을 익힌 뒤로 술이 무지막지하게 강해진 몽뇌산은 사내를 향해 안됐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무릎이 아주 풀려 버린 듯 흐느적거리던 사내가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몽뇌산의 어깨에 매달렸다.
“월향(月香)아`─`!”
사내가 잠꼬대하듯 중얼거린 말에 행인들이 웃음을 터뜨렸.
그러나 정작 이 당혹스런 상황의 당사자인 몽뇌산은 조금도 웃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다.
아예 한 손으론 목을, 다른 손으론 허리를 끌어안고 매달린 사내 때문에 다른 건 둘째 치고 갑갑해 죽을 지경이었다.
길에서 남자 둘이 이렇게 꼭 끌어안고 있다니, 이 무슨 해괴한 장면인가?
몽뇌산은 사내를 떼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술 취한 사람이 웬 힘이 그렇게 센지 사내는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우선 어깨에 놓인 손부터 잡아떼 내던 몽뇌산은 사내가 다른 손으로 이번엔 가슴팍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지자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찰거머리하고 친척인가?’
내심 투덜거리며 조금 공력을 돋우어서 힘주어 사내의 몸을 잡고 밀어내려는데 문득 가슴에서 뭔가
부대끼는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몽뇌산은 왼손으로 손목 안쪽에 커다란 점이 있는 사내의 오른팔을 붙잡아 쓰러지지 않게끔 지탱한 뒤, 오른손으로 그의 가슴을 멀찍이 밀어 냈다.
“어어? 이게 뭐야?”
몽뇌산은 자신의 가슴속에 들어가 있는 사내의 한 손을 떼어 내며 품안에서 사부께서 주신 옥합과 모서리가 닿아 있는 작은 옥합 하나를 꺼내 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던 사내의 몸이 보이지 않게 꿈틀거렸다.
“내 참! 전, 월향이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건 그 월향이란 여인에게나 가져다 주세요. 그
여자에게 줄 선물인가 본데……”
몽뇌산은 찬찬히 타이르듯 말하며 앙증맞게 생긴 작은 옥합을 사내의 품속에 깊숙이 찔러 넣어 주었다.
그제서야 사내는 어느 정도 술이 깬 듯 당황스런 얼굴로 몸을 가누기 위해 버둥거렸다.
겨우 몸을 가눈 사내가 꾸벅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해 보였다.
“혀, 형장의, 딸꾹! 친절하신 도움, 끅! 저, 정말 감사합니다. 딸꾹, 꺼억!”
딸국질을 해대면서도 혀 풀린 음성으로 감사의 인사까지 하는 사내를 몽뇌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점잖게
타일러 보냈
사내가 가고 난 뒤 상점 하나하나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던 몽뇌산의 신형이 문득 대로변 끄트머리에
자리한 대장간으로 향했다.
그 앞에 서자 이미 날이 저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쇠망치 소리가 요란했다.
“여기서 할 일이 있었지……”
묘한 뇌까림과 함께 구경하듯 기웃거리며 들어간 몽뇌산은 뭘 하는지 좀처럼 밖으로 나올 줄을 몰랐다.
아무튼 불쑥 대장간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그는 초점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던 그 술 취한 사내가 저만치
뒤에서 고개를 돌리고 자신을 짜증스런 눈빛으로 노려보다
감쪽같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음을 알지 못했다.
* * *
몽뇌산이 대장간에서 일을 마치고 나온 것은 삼경이 넘어서였다. 흡족한 얼굴로 길을 가던
그가 막 시골마을치곤 꽤나 고급스런 주루 앞을 지날 때였다.
그때, 그 일이 벌어졌다.
주루를 힐끔 보고 나서 몸을 돌리던 그가 그만 앞쪽에서 다급히 걸어오던 사람과 몸을 세게 부딪치고 만 것이다.
황망히 몸을 틀긴 했으나 서로 어깨를 부딪치는 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아이쿠!”
몽뇌산은 손으로 얼른 어깨를 감싸 쥐고 짧은 비명을 내뱉는데 상대는 별 충격을 못 느꼈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몹시 기분이 상했는지 고개를 든 몽뇌산의 면전에 대뜸 비난을 퍼부어댔다.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냐?”
몽뇌산의 초라한 마의를 쓸어 내리는 눈길이 퍽이나 거만했다.
몽뇌산은 속으로 ‘참 재수도 없는 날이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한눈에도 최고급 비단으로 만들었음 직한 남빛 무복을 걸친 상대의 준수한 얼굴을 보며 몽뇌산은 그의 성격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본 공자는 누가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그런데 감히 앞길을 가로막고도 사과 한마디 하지 않을 셈이냐?”
남의청년의 말은 오만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다.
몽뇌산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상대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빨리 사과하고 길을 가는 편을 택했다.
“미안하게 됐소. 오는 걸 못 봐서 그렇게 됐으니 이해해 주시오. 그럼……!”
몽뇌산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길을 비켜 주었다.
청년이 지나가면 그도 길을 떠날 생각이었으나 청년은 쉽게 갈 마음이 없는 듯했다.
몽뇌산은 청년의 싸늘한 눈길을 접하곤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갈 길은 바쁜데 달갑지 않은 일만 생기니……
“사과가 신통치 않은 걸 보니, 나 파천권(破天拳) 마운창(麻雲槍)을 우습게 본 모양이구나! 건방진……”
몽뇌산은 별호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청년의 안하무인 격인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게 또 청년의 비위를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흥! 강호십수(江湖十秀)의 이름을 우습게 아는 자를 예서 만나다니…… 오늘 이런 일을 당하고도
그냥 지나친다면 세상 사람들이 내 이름을
허명(虛名)인 줄 알 것이니, 네게 한 수 가르침을 내려야겠다!”
몽뇌산을 훈계하기로 단단히 작정한 듯 마운창의 음성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강호십수 소리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힐끔힐끔 청년을 쳐다보았지만 몽뇌산은 별다른 표정을 떠올리지 않고 있었다.
물론 몽뇌산도 그 말을 들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거들먹거리는 마운창의 모습을 보니 강호십수란 이름이 오히려 하찮게 여겨졌다.
‘강호십수라……!’
탐탁치 않은 표정이 얼굴에 드러난 것일까?
“어디, 강호십수를 우습게 알 만한 실력이 있나 보자! 간다`─`!”
짤막한 경고와 함께 반쯤 말아 쥔 마운창의 주먹이 화악 뻗어 나왔다.
단순히 내지르는 동작 하나에도 가벼이 볼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하긴, 좀 전에 별호가 무슨 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운창의 주먹이 금방이라도 배에 틀어박힐 듯하자 몽뇌산은 일단 생각을 접어 두고 왼발을 오른발 뒤로
옮기며 상체를 틀었다.
쏴아악`─`!
주먹은 간발의 차이로 옷자락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위험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마운창의 눈동자에 의외라는 빛이 서리더니 자존심이 상한 듯 소맷자락에서 우웅, 하는 바람 소리가 일었다.
놀랍게도 그의 주먹이 수직으로 꺾이며 몽뇌산의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희뿌연 경기가 먼저 다가들었다.
주먹이 직접 꽂힌 것도 아닌데 피부가 싸하니 따가웠다.
몽뇌산은 다시 몸을 틀며 훌쩍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번엔 그도 물러나는 걸로만 그치지 않았다.
단단히 쥐여진 몽뇌산의 주먹이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목표는 마운창의 주먹!
파아아앙`─`!
두 사람의 주먹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면으로 충돌하자 막대한 권경(拳勁)이 소용돌이치며 주변을 휩쓸었다.
강호에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왕권이건만 그 위세는 마운창의 권법에 결코 뒤짐이 없었다.
마운창이 익힌 것은 강호십대권법(江湖十代拳法) 중 하나인 파천신권(破天神拳)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몽뇌산에게 조금의 손해도 입힐 수 없었다.
이 순간, 그가 느끼는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류잡배의 솜씨는 아니구나!”
주먹이 저릿해 옴을 느끼며 감탄 비슷하게 중얼거리던 마운창의 손엔 어느새 단봉(短棒)이 하나 들려져 있었다.
굵기가 어린아이 손목만한 그것은 봉(棒)이라기보다는 짧은 곤(棍)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마운창이 꺼내 든 무기를 보고 몽뇌산이 눈을 반짝일 때, 은빛을 번쩍거리던 그것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저자의 진재절학은 따로 있었나 보군. 제대로 해보자는 건가?’
몽뇌산은 속으로 덤덤하게 중얼거렸지만, 그의 말이 맞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마운창은 강호에서 권법 하나로 당당히 강호십수에 그 이름을 올린 자였다.
그런 그가 권으로 상대해서 제압할 수 없는 상대에게 다른 방법으로 맞선다면 그것이야말로 경인(驚人)할
위력을 지닌 것이 아니겠는가!
몽뇌산은 주루에서 나오는 불빛을 받아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하는 마운창의 무기를 눈여겨보았다.
마운창의 무기!
그것은 어느새 봉도 아니고 곤도 아닌 대창(大槍)으로 변모해 있었다.
일 장이 넘는 길이에 창끝에서 싸늘한 예기를 토해 내는 은창으로.

그리고 그것이 움직였다.
위이이잉`─`!
몽뇌산은 위압적으로 공기를 말아 올리는 은창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은창의 날카로운 움직임을 똑바로 바라보며 은빛 소용돌이 속으로 망설임없이 뛰어들었다.
“운창이 저렇듯 놀라운 창술을 지니고 있었다니…… 저건 마치, 마치……”
“창술이 그의 본신절기인 듯하단 얘긴가?”
“자네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 것 같군.”
몽뇌산과 마운창이 싸우고 있는 모습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주루의 이층 자리에서 호박색 유삼을 단정히
차려입은 청년문사 한 명이 의아한 얼굴로 맞은편에 앉은 이를 건너다보았.
의문이 담긴 얼굴이었으나 범상한 인물이 아닌 듯 신기가 감돌았다.
맞은편에 있던 백의청년이 싸움 장면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렇게 신기해 할 것 없네. 자네답지 않군. 천하의 십전공자(十全公子) 모용휘(募容煇)가 그래, 저만한
일에 놀란단 말인가?”
담담히 웃으며 청년문사, 모용휘를 쳐다보는 백의청년의 용모는 실로 대단했다.
천하에 그와 외모를 견줄 사람은 한두 사람도 안 될 성싶었다.
더군다나 그의 전신에 서린 탈속한 기품은 앞에 앉은 모용휘로서도 감히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시원스런 검미, 단아한 모양의 붉은 입술, 호수처럼 맑고 고요한 눈동자, 높은 콧날과 하얀 피부!
반듯한 어깨와 눈빛에서 은연중 드러나는 영웅의 기개만 아니라면 절세가인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감당키 어렵군, 감당키 어려워! 강호십수에 이름을 올려 준 것이 감사하긴 하나 언제 들어도 그 십전공자란
말은 내게 과분한 듯하이. 자, 자네 얘기나 들어 보도록 하지.”
모용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백의청년에게 얘기를 재촉했다.
모용휘의 그러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백의청년은 그가 정말 모른다고는 생각지 않는 듯했다.
백의청년은 아래를 한번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가문인 신권보(神拳堡)가 비록 오대세가에는 들지 않는다 하나 예로부터 권법으론
알아주는 가문이지. 하지만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게 하나 있어.”
“잊고 있는 게 있다?”
“팔십 년 전 있었던 백도연맹과 혼천마교 간의 정사대회전을 기억하나? 그때, 혼천마교의 인물을
상대로 엄청난 무위(武威)를 보여 일약 신권보 제일고수라
불리게 된 사람이 있었네. 그런데 혼천마교를 상대한 그의 무공은 놀랍게도 권법이 아니었어.”
모용휘가 무릎을 치며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파사신창(破邪神槍) 마영걸(麻英傑)!”
“맞네. 나는 평소 운창(雲槍)의 이름 끝 자를 생각할 때마다 파사신창의 무공이
신권보에서 그대로 잊혀지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지.”
“하긴…… 그러한 무공을 사장(死藏)시킨다는 건 신권보뿐 아니라 강호 전체의 큰 손실이라 할 수 있지. 파사신창의 창술을 운창이 이어받았다……?”
고개를 끄덕이던 모용휘의 말을 끝으로 침묵이 조용히 자리잡았다.
두 사람이 방금 주고받은 대화는 얘깃거리 좋아하는 강호의 호사가들이 들었으면 얼씨구나 하고 달려들
만한 것이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히 얘기했지만 백의청년의 말은 정말 놀라웠다.
그러한 추측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실례로 강호에서는 이제껏 마영걸의 신창술이 누구에게 전해졌는지 아무도 관심을 두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팔십 년 전의 강호 상황이 그만큼 어지러웠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는 얘기도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잊고 있는 걸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백의청년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다.
강호십수 중 두 사람을 친구로 두고 있는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모용휘의 시선이 싸움터로 돌아간 백의인의 눈길을 쫓아갔을 때, 싸움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쐐애애액!
마운창의 창술, 그의 선조인 마영걸에게 파사신창이란 외호를 안겨다 준 천화난창법(天花亂槍法)은 실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창끝에서 피어난 은빛 꽃송이들이 마치 암기처럼 몽뇌산의 전신요혈을 노리고 다가왔다.
일 장이 넘는 장병임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무쌍하여 허와 실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몽뇌산은 이름조차 몰랐지만 주루 위의 두 사람이 보기에는 ‘난창(亂槍)’이란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찌이익`─`!
몽뇌산은 간발의 차이로 옷소매만 찢긴 채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대로 공격을 피한 것이 아니라 어느새 그의 좌수는 반월 같은 호선을 그리며 되돌아오고 있는 은창의 창대를 후려치고 있었다.
몽뇌산의 장력에 창대가 버들가지처럼 휘어졌다.
몽뇌산은 창대를 후려치자마자 일보 앞으로 다가들며 연달아 이 장을 뿌렸다.
창대가 되돌아와 변화를 일으킬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마운창의 은창이 물러날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튕겨지다가 연이은 장세에 변화를 잃고 말았다.
그러나 선기(先機)를 빼앗겼음에도 마운창의 눈빛은 시종일관 냉정했다.
만일 그의 상대가 경험 많은 고수였다면 그와 같은 점을 결코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 마운창의 눈빛을 눈여겨보며 속으로 이렇게 뇌까렸을 것이다.
선기를 잡았다 하여 방심하지 말고 차근차근 승기를 점할
하나 몽뇌산은 경험 많은 고수가 아니었다.
싸움다운 싸움은 지금 처음 해보는 강호초출의 애송이, 그게 바로 몽뇌산이었다.
몽뇌산은 다시 한걸음 성큼 내딛으며 사 장을 연속적으로 내쳤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전적으로 본능에 따른 것이었다.
‘기회를 줘선 안 된다! 창이 파고들 만한 거리를 두어선 안 된다!’
손아귀를 벗어날 듯 요동치는 창대를 힘주어 잡으며 손목을 트는 마운창의 모습이 보였다.
몽뇌산은 안쪽으로 깊이 파고들며 전광석화와 같이 팔 장을 연환식으로 쳐냈다.
순간, 마운창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이내 그의 손목이 교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거만한 얼굴만큼이나 자신만만한 동작이었다.
위이이잉`─`!
뾰족한 창날이 요란한 진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작 몽뇌산의 가슴팍을 찔러 온 것은 창자루의 끝이었다.
‘헛!’
몽뇌산은 속으로 크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렇다!
애초에 마운창이 창을 잡은 위치에 신경을 썼어야 했다.
창의 가운데도 아니고 끝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
‘그러나 뒤로 돌려 공격하기엔 가장 좋은 위치!’
막아 내기엔 너무 거리가 가까웠다. 장병이 움직일 만한 거리를 주지 않기 위해
바짝 다가선 것인데 그것이 지금은 가장 큰 위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몽뇌산은 입술을 깨물며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뒤가 아니라 앞으로.
언뜻 부나방 같아 보이는 몽뇌산의 행동에 흠칫하는 마운창의 모습이 보였다.
몽뇌산은 있는 대로 공력을 끌어올려 쌍수를 모았다.
이어 그의 쌍수에서 쏘아져 나온 뇌전 같은 광채가 창끝에 불룩하게 맺힌 백광에 정확히 꽂혔다.
퍼어엉`─`!
우레 같은 소리가 터지며 바닥이 파이고 돌덩이가 날아올랐다.
“으음!”
“윽!”
분분히 휘날리는 먼지 사이로 두 줄기의 신음이 엇갈렸다.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사람들이 본 것은 이 장의 거리를 두고 서서 서로 노려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외관상으로는 누가 패했는지 알기 어려웠다.
너덜거리는 옷과 헝클어진 머리.
둘 다 거지가 따로 없을 정도였다.
몽뇌산은 마운창이 천천히 창대를 앞에 곧추세우자 바짝 긴장했다.
눈빛을 빛내며 몽뇌산이 쌍수를 다시 모을 때였다.
“이제 그만 하게, 운창!”
“그래, 두 사람 모두 그만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운창, 우리를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참인가? 그만 하고 올라오게.”
연달아 들려 온 목소리에 마운창이 마지못해 고개를 들자 몸을 내밀고 있는 모용휘와 백의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나더러 이대로 물러서란 말인가?”
마운창의 음성에 돋아 있는 뾰족한 날을 느끼곤 모용휘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무리한 요구였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모른다 하여 그가 어찌 무명소배이겠는가? 강호엔 기인이사(奇人異士)가 많고
많으니 이번 싸움은 마음에 두지 말게. 무승부로
끝냈다 하여 자네를 비웃을 강호인은 아무도 없을 걸세.”
모용휘는 발끈하려는 마운창을 조용히 다독였다.
그 말이 효과가 있었음인가?
마운창이 창을 거두며 몽뇌산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다음번에 우리가 또 만나게 되면 그땐 승부를 매듭 지어야 할 것이다.”
몽뇌산은 자기 할말만 마치고 몸을 획 돌려 주루로 올라가 버리는 마운창의 모습을 어이없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가 어깨를 한번 으쓱한 후 몸을 돌려 막 발길을 옮기려 할 때, 난데없이 그를 부르는 음성이 있었다.
“형장의 고명(高名)을 알 수 있겠소?”
몽뇌산은 그 음성이 지닌 담담한 기품에 놀라 고개를 돌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백의청년과 몽뇌산의 눈길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몽뇌산이오.”
몽뇌산은 퉁명스럽게 대답한 뒤 소리나게 몸을 돌렸다.
“몽 형의 손을 보니 독공을 연마한 것 같은데……”
백의청년의 입에서 나온 ‘독공’ 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순간, 몽뇌산의 걸음이 딱 멎었다.
힐끔거리며 주춤주춤 피하는 행인들의 모습이 안 봐도 눈에 훤했다.
그들을 탓할 마음은 없었다.
예로부터 독이란 것은 경원(敬遠)의 대상이 아니었던가?
독공을 지닌 사람으로 떳떳하게 강호를 누빌 수 있는 것은 현재로선 당문인밖에 없었다.
몽뇌산은 어느새 백의청년 옆에 앉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마운창의 시선을
접하자 순간적으로 속에서 뭔가 불끈 치미는 것을 느꼈다.
몽뇌산은 화를 누르며 백의청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수려한 얼굴 어디에도 비웃음은 보이지 않았다.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온 몽뇌산의 입에서 또렷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까는 소개가 부족했소. 천독문의 몽뇌산이오.”
당당한 눈길로 세 사람을 둘러본 후 몽뇌산은 미련없이 걸음을 옮겼다.

“천독문이라면…… 과거 절대독유를 추종하던 무리가 세운 문파가 아닌가? 강호에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아 멸문한 게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모용휘에게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 백의청년의 눈이 오랫동안 몽뇌산의 뒤를 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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