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제6장 - 강호십수(江湖十秀) 3

등록 2026.10.12 1.2만자 조회 1 좋아요 0 댓글 0 15세 이상 이용가
독로무한
14화. 제6장 - 강호십수(江湖十秀) 3


몽뇌산의 모습이 사라진 지는 오래였지만 여전히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는 마운창을
달래기 위해 모용휘와 백의청년은 아예 객잔에 방을 잡고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래서 사경이 넘었을 무렵엔 모두들 얼큰히 취해 있었다.
이미 곤죽이 되어 몸을 못 가누고 있는 마운창과 목까지 붉어진 모용휘를 뒤로하고
백의청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
모용휘가 그의 옷깃을 잡으며 약간 흐트러진 음성으로 물었다.
“어디 가나?”
“취기가 올라 차가운 바람 좀 쐬려고.”
모용휘는 갔다 오라고 손짓을 하곤 마운창을 부축해서 침상에 눕혔다.
모용휘가 마운창의 옆에 나란히 눕는 것을 보고 나서 백의청년은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간 백의청년은 아담하게 꾸며진 뜰을 천천히 거닐더니 제법 커다란 나무 아래 기대어 섰다.
다음 순간, 그의 손이 소매 안에서 작은 쪽지를 꺼냈다.
쪽지의 내용을 꼼꼼히 훑어본 그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했
어이없는 것 같기도 하고 분노하는 것 같기도 한……
“교에서 추적령이 내려진 자가 좀 전의 그자라니……! 먹이가 눈앞에서 왔다갔다한 것도
모르고 있었군. 몽뇌산이라 했던가? 제법 운이 좋은 친구로군. 훗…… 하지만 지금쯤 동령이 움직이고 있을 테니
언제까지 운이 좋다고만은 할 수 없겠지.”
백의청년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실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 * *
무창부 외곽의 어느 대장원.
“척중경(拓中暻)!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가 보군. 이번에도 자네의 칼이 제일 먼저 적들의 심장을 써늘하게 만들어 주었겠지?”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자마자 직속 상급자인 살영대(殺影隊) 제일대장에게 보고를 하고 나오는 그에게 살영대 제이대에 속한 동료인 단노서(單勞書)가 지나다가 말을 붙여 왔다.
척중경은 왼쪽 눈썹을 둘로 나눠 놓은 이마의 칼자국을 씰룩거리며 허리춤에 매달린 도집을 툭툭 쳤다.
단노서가 입가에 두텁게 난 흉터 자국을 꿈틀거리며 히죽히죽 웃었다. 그의 길다란 얼굴에는
‘역시’ 하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척중경은 꼬챙이 같은 검을 허리춤에 비끄러매고 활동하기 편한 흑의경장을 간편하게
차려입은 단노서의 모습을 보며 두 동강이 난 왼쪽 눈썹을 치켜 올려 보였다.
“임무를 맡아 대장에게 보고를 하고 지금 출정(出廷)하는 길이네. 오랜만에 몸풀게 생겼어. 피 냄새가 그리워
미칠 지경이었는데 잘됐지 뭔가.”
척중경은 검집조차 없는 검을 슬슬 쓰다듬으며 눈을 희번덕거리는 단노서의 모습을 보고는 얄팍한 입술을 비틀었다.
눈가에 잔독(殘毒)해 보이는 미소를 매단 채 척중경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엔 어딘가?”
“응! 악양에 있는 웬 관리 하나가 본 교의 행사가 의심스럽다 하여 조사를 한다고 설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나, 어쨌다나?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지! 흐흐! 감히 일개 관리 나부랭이 주제에 본
교에 대적하려들다니…… 어쨌거나 우리야 좋지! 자, 가봐야겠어. 자네는 이제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으니 한동안 심심하겠군. 또 보세.”
피에 굶주린 기색이 완연한 단노서의 모습이 멀어지자 척중경은 신상(神像)이 모셔진 신전(神殿)을 향해 걷기
시작했
신상은 그들 교의 상징이었고 믿음의 대상이었으며 신주의 충실한 대리인(代理人)이었다.
전각군들의 정중앙에 위치한 신전의 현판이 눈에 들어오자 척중경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교에 속한 사람이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신전에 참배해야만 한다.
<사령신전(蛇靈神殿)>
신전은 교에서 받드는 황금사(黃金蛇)의 영이 모셔져 있는 곳이었다.
척중경은 신전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
넓은 대전의 끝에 높다랗게 단이 올려져 있고 그 위엔 금빛 찬란한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황금관을 높게 쓰고 붉은 보석을 박아 넣어 사이한 기운을 풍기는 눈이 어둠침침한 신전을 굽어보고 있었다.

척중경은 신상을 향해 다섯 번 절을 했다.
신상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런 동작으로 향을 피운 그는 좀 붉게 충혈된 눈을 하고 신전 밖으로 나왔다.
척중경은 햇살에 눈이 부신 듯 찡그린 얼굴로 신전 앞에서 잠시 멈춰서 있다가 이내 야수가 움직이는 것처럼 가볍고 절제된 걸음걸이로 처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건물 사이를 지날 때마다 바쁘게 움직이는 무사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외부에 나가 있던 그 열흘 사이에 중원밀단(中原密團)의 움직임이 상당히 분주해진 것 같았다.
그건 요사이 교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더군다나 오자마자 들은 소식에 의하면 이곳으로 총단에서 고위층이 직접 와서 중원밀단의 일을 지휘한다고
하니 뭔가 큰 일이 벌어질 징조였다.
어쨌거나 교가 바쁘다는 것은 그가 속한 살영대의 일이 많아짐을 뜻했다.
척중경은 단노서만큼 드러내 놓고는 아니지만 앞날에 대한 기대감으로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중원밀단의 세력은 크게 살영대(殺影隊)와 혈영대(血影隊), 혼영대(魂影隊), 그리고 월영대(月影隊)의 네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이들 네 부류의 세력이 하는 역할을 보면, 우선 살영대와 혈영대는 둘 다 척살대(刺殺隊)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혼영대는 약물이나 황금을 이용해 사람들을
매수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고, 월영대는 여인을 이용한 덫으로써 교를 위해 충성할 사람을 모으는 일이 주요 임무였다.
그 중 실력으로 쳐서 제일은 당연히 살영대였다. 그래서 어렵고 중요한 일은 항상 살영대 차지였는데, 그런 살영대이니만큼 거기에 속한 대원들의 무공도 거의
대부분 일류고수 수준에 육박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강호 여타 방파의 고수들과는 달리 실전무예에 능하다는 점이었다.
살영대는 다시 제일, 이, 삼대로 나뉘는데 실력 면에서는 단연코 제일대가 가장 뛰어났다.
척중경은 바로 제일대 소속이었다. 그의 쾌도(快刀)는 살영대 내에서도 꽤 알아주는 편에 속했다.
중원밀단의 중심을 가로질러 좌우에 밀집해 있는 숙소로 걸어가는 도중, 척중경은 일반대원들보다
좀더 안쪽에 있는 대장들의 숙소 쪽에서 다급하게 달려나오는 살영 제삼대장을 보고 신속하게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살영 제삼대장은 그의 인사를 받을 정신도 없는지 본 체도 안 하고 금세 멀어져 갔다.
척중경은 접었던 허리를 바로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터졌나 보군! 기왕이면 외부로 출정하라는 영이 내리는 일이면 좋겠는데……”
척중경은 자신의 방안에 들어와서도 기대감을 떨치지 못하고 출정에 대비해 칼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어둑어둑해지도록 아무 명령이 없자 척중경은 실망스런 마음으로 일찌감치 잠잘 준비를 했다.
그가 막 침상에 누웠을 때, 중원밀단 전역을 울리는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함께 살영대 소집 신호가 떨어졌다.
척중경은 맹수처럼 날렵한 동작으로 침상을 벗어났다.
흑의경장을 입고 동색(同色)의 복면을 쓴 다음, 칼을 매고 나서 적에게 사로잡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독단까지 혀 밑에 잘 집어넣고 나자 완전한 출정 태세가 갖추어졌다.
척중경은 살수처럼 은밀하고 신속한 몸놀림으로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숙소를 빠져 나갔다.
신호에 의하면 집합 장소는 늘 쓰던 연무장이 아니라 밀단의 오른편에 위치한 제법 높다란 구릉 위였다.
저만치 구릉 위에는 이미 발 빠른 몇몇 대원들이 도착해서 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척중경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이나 긴장감이 아니라 기대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가 구릉 위에 내려서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낮에 출정한 제이대를 제외한 나머지 살영대원 오십 명 전원이 집합을 마쳤다.
그리고 잠시 후, 질서 정연하게 대오(隊伍)를 갖추고 서 있는 살영대원들 앞에 놓인 널찍한 바위 위에 소리도
없이 세 사람이 내려섰다.
방금 나타난 그들 하나하나의 실력은 정말 놀라워서 장내에 모여 있는 살영대원들의 능력으론 그들이
바위에 내려서기까지 그 기척을 눈치챌 수조차 없었다.
그 중 특히 가운데에 자리한 동색면구인(銅色面具人)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은 마주한
사람을 위축시키는 힘이 있었다.
세 사람이 나타나자 대원들은 일제히 한 쪽 무릎을 꿇고 명을 기다렸다.
“오늘 한 가지 중요한 작전을 위해 본단에서 존귀하신 분이 오셨다. 영주! 말씀하시지요.”
척중경이 슬쩍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방금 말을 한 왼쪽의 중원밀단주(中原密團主)와 오른쪽에 있는 살영대주가 가운데의 동색면구인을 보필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동색면구인이 천천히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순간, 구릉 위의 모든 것이 완벽한 정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면구 밖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차갑게 반짝이며 보이지 않는 입을 통해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본좌는 총단(總團)에서 나온 동령 영주다.”
잠시 후, 구릉 위에 모였던 살영대의 대원들은 신속하고 소리없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척중경도 마찬가지였다.
날렵한 동작으로 숙소를 향해 몸을 날리는 그에게 같은 일대에 속해 있는 대원 하나가 말을 걸어 왔다.
“그깟 애송이 하나 때문에 살영대 전원이 나선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중경?”
턱에 거칠게 수염이 나 있는 사내의 말은 불만이 가득했다.
사실 그 점은 척중경 자신도 좀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로지 상부의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그자가 독공을 지녔다고 하질 않나? 이번 일은 어쩐지 흥미 진진할 것 같은데……”
“그런 애송이의 독공이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척중경은 코웃음을 치는 사내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지난번 혈영대가 당한 늙은이의 제자라니 혹시 또 모르지.”
“그래 봤자 우리 손에 죽을 것이 아닌가?”
그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였다.
척중경은 힐끔 사내를 쳐다보며 입가에 찐득한 웃음을 매달았다.
“후후! 그래. 놈은 우리에게 죽고, 놈이 지닌 물건은 우리가 손에 넣는다. 바뀔 수 없는 불변의 진리지.”
그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일 때 문득 사내가 음성을 낮추며 물어왔다.
“이봐! 자네 생각엔 어때? 그 애송이가 지녔다는 물건이 뭐기에 상부에서 저 난리인 것 같나?”
“죽고 싶나? 우린 그저 아는 것이 적을수록 좋아.”
척중경은 눈을 냉정하게 빛내며 사내를 외면했다.
“자네는 궁금하지도 않은가? 그저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기에 총단에서 영주급 인물이 직접 나왔나 싶어 물어
본 거야. 참! 그 동령 영주…… 어딘지 좀 이상하지? 총단의 세 영주 중 둘이 여자라는 소문이 사실인……!”
“입다물어! 자네 목이 두 개가 아니거든 말이야.”
척중경은 머쓱한 얼굴로 입을 다무는 사내를 차갑게 노려보곤 먼저 몸을 날려 사라졌다.
* * *
산령현의 야산에서 하룻밤을 보낸 몽뇌산은 이튿날 백령산을 넘어 산 아래 자리한 작은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외산현(畏山縣)에 속하는 그 마을에는 객잔이 하나, 주루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본의 아니게 선택의 기쁨을 박탈당한 몽뇌산은 별수없이 그 마을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객잔인 다화객잔(多花客棧)에 방을 하나 잡아 놓고, 식사를 위해 다화객잔주가 운영하는 다화주루(多花酒樓)로 들어갔다.
주루에 들어서도 인사하며 반기는 사람 하나 없었다.
회계대에 앉아 있는 뚱뚱한 중년인은 한창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중이었고, 주루의 유일한
점소이로 보이는 소년 하나는 막 꿈나라로 가려는 찰나였다.
몽뇌산은 한심한 표정으로 주루를 둘러보았다.
밖을 내다봐도 그저 그런 시골 풍경일 뿐 특별한 볼거리도 없었지만 몽뇌산은 개중에서 제일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루 안은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한산했다.
마을이 속해 있는 외산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다른 곳보다 월등히 빼어난 명승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는 교역지도 아니니, 별다른 일이 없는 한 마을 자체가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몽뇌산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방금 몽계(夢界)에 들었다가 현실 세계로 쫓겨난 점소이가 부스스한 얼굴로 흐느적거리며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어깨에 걸친 수건을 들어 건성으로 탁자를 닦으려는 점소이를 만류하며 몽뇌산은 짧게 주문을 했다.
“만두 여섯 개에 소면 한 그릇, 그리고 야채볶음……”
“네엣! 좀 기다리십시오.”
점소이는 따분한 표정으로 주문을 들은 체 만 체하더니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휙 돌아섰다.
몽뇌산은 말을 멈추며 어이없는 얼굴로 점소이를 불러 세웠다.
“주문 안 끝났어`─`!”
점소이는 다시 올 생각이 별로 없는 듯 제자리에 서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손님께서 말씀하신 그 음식들 외에는 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추가로 주문하셔도 소용없지요.”
언뜻 보아도 열대여섯이 안 넘게 생긴 점소이의 대답은 뻔뻔스러웠다.
몽뇌산은 황당했다.
저 조그만 점소이 녀석은 도대체 무엇을 먹었기에 손님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한단 말인가?
“내가 하려던 말은 야채볶음은 필요없단 얘기였어. 자, 내가 뭘 주문했는지 이제 확실히 알겠지? 한번 외워 봐!”
몽뇌산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자 점소이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볼이 퉁퉁 부어서 웅얼거렸다.
“만두 여섯 개에 소면 한 그릇……!”
“야채볶음은?”
“빼고……”
“좋았어. 보기와는 달리 제법 머리가 좋군. 자, 그만 가봐!”
몽뇌산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점소이는 곧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성마른 얼굴로 쿵쿵거리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몽뇌산은 봇짐에서 소 여물에나 들어갈 것같이 생긴 풀을 꺼내 질겅질겅 씹어댔다. 그렇게 독초 몇 개를 꺼내 씹고 나자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족히 한 식경은 지난 것 같은데 음식이 나올 생각을 안 하자 몽뇌산은 고개를 빼고 주방 쪽을 기웃거렸다.
“밭에 밀 베러 갔나, 왜 이렇게 더디지?”
몽뇌산의 툴툴거림은 지극히 당연했다.
본래 몽뇌산이 시킨 만두와 소면은 어느 주루에서나 다 취급하는 음식이었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시키는 음식들 중 하나였다. 사람들이 많이 시키는 이유는
그 음식들이 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음식이 빨리 나오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집은 다른 주루에서 걸리는 시간의 몇 배나 잡아먹고서도 접시 그림자조차 보여 주질 않았다.
그가 젓가락 장난으로 무료함을 때우고 있을 때, 주루 안으로 한 명의 손님이 더 들어왔다.
낡았지만 깨끗한 회의를 걸치고 등에 천으로 둘둘 감싼 길다란 물건을 하나 둘러맨 그 사내는 군데군데 희끗해진 머리로 보아 대강 사십대 후반정도로 보였다.
그는 주방에서 막 음식을 가지고 나오던 점소이를 손짓해서 부르더니 귓속말을 속닥거렸다.
그리곤 느닷없이 몽뇌산의 음식접시를 받아 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몽뇌산은 탁자 위에 접시를 내려놓고 털썩 자리에 앉는 그 사내를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 사람 없는 주루에서, 그 많은 자리를 놔두고, 왜 하필 이 자리로 와서 앉았을까?
강호에서 아무 까닭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걸 사문을 떠난 뒤부터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그였다.
몽뇌산은 눈으로 말없는 의문을 던졌다.
사내답게 선이 굵은 얼굴의 회의사내는 웃는 눈빛으로 그를 한번 바라보더니 주루 한가운데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점소이를 손짓해서 불렀다.
“여기, 만두 여섯 개하고 소면 하나, 빨리!”
회의사내는 얼굴과 잘 어울리는 굵직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사내의 말이 끝난 후 점소이가 보여 준 행동은 경이(驚異)에 가까웠다. 주방으로 후닥닥 뛰어든다
싶더니 곧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만두와 소면을 가지고 나왔다.
몽뇌산은 식을 대로 식어 있는 자신의 음식과 회의사내의 음식을 비교해 보았다.
뭔가 속은 듯한 기분이었다.
몽뇌산은 뾰로통한 얼굴로 만두를 집어 들었다. 서늘하게 식은 겉과는 달리 한입 깨물자 제법 온기가 남아 있었다.
단숨에 만두 여섯 개를 먹어 치운 몽뇌산은 어느새 식사를 마치고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회의사내의 시선을 느꼈다.
몽뇌산이 고개를 들어 멀뚱멀뚱 바라보자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하후극(夏侯極)이라 하네. 자네 이름은 뭔가?”
나직하지만 힘있는 목소리였다.
“몽뇌산입니다. 그런데 아까 점소이에게 어떻게 하셨기에 음식이 그렇게 빨리 나온 거죠?”
하후극이란 사내는 중년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몽뇌산은 그러한 그를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사내다운 목소리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그 미소는 묘하게도 그의 몸에서 풍기는 묵직한 기도를 조금도 깎아 내리지 않았다.
“자네 덕분이지.”
“예? 제 덕분이라구요?”
몽뇌산은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네. 좀 전에 내가 그의 귀에 대고 자네 얘기를 하자 점소이의 행동이 금방 달라지더구먼!”
“뭐라고 하셨기에……?”
“자네가 엄청난 무공을 지닌 강호의 고수라고 했지.”
하후극은 여전히 미소를 매단 채 간단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뿐인가요?”
“그리고 또한 자네는 반로환동(反老還童)한 나의 사부님으로 성격이 좀…… 괴팍해서 한 번은 참아도 두 번은 못 참는다고 했다네.”
몽뇌산은 할말을 잃었다.
하후극에 대한 첫인상은 밤하늘에 흐르는 푸르스름한 달빛을 받고 서 있는 바위 같다는 것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서늘하고 담담한 느낌이랄까?
몽뇌산은 자신의 거짓말에 대해 전혀 거리낌없이 고백하는 하후극의 담담한 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건너다보았다.
‘스스로에게만 떳떳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 같군.’
이런 부류의 사람은 대부분 외곬인 데가 있지만 무인이라면 그것도 나쁘진 않았다.
몽뇌산은 속으로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림인이시군요?”
그의 단정에도 하후극은 아무 대답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
“뭔가 의도적인 느낌이 드는데요? 반로환동 어쩌구 하며 절 웃기시려는 것도 그렇고!”
“하하하하!”
하후극는 두툼한 입술을 벌리고 굵직하니 무게있는 음성으로 웃었다.
“재미있는 사람이군, 자네는! 자넬 보니 문득 한 사람이 생각나서 결례를 했네. 이상도 하지? 그 사람은 자네와 전혀 다른 성격의 사람인데 말이야.”
“그 사람이 누구죠?”
“내 사제지. 사제라곤 하지만 실력은 오히려 그가 더 뛰어나지. 대단한 사람이야, 그는!”
“아! 사람 같지 않단 얘기군요?”
하후극의 고요한 눈동자가 잠깐 뜻밖이라는 듯 반짝거렸
“후후! 자네 말도 일리가 있군. 그는 확실히 보통 사람의 범주에는 들지 않지. 언젠가 그는 천하제일검이 될지도 모른다네……”
하후극의 마지막 말은 희미해서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몽뇌산이 다시 물으려 했을 때, 하후극이 돌연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초면에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고 욕할 수도 있겠네만, 나에 대해서 좀 얘기해도 되겠나? 자네는 어쩐지 낯설지가 않아서…… 괜찮겠나?”
“뭐, 심심한데 잘됐네요. 술이라도 좀 시킬까요?”
하후극은 고개를 저었다.
“술은 안 하는 게 좋겠군. 나도 그렇고, 자네도 길을 떠나야 할 사람 아닌가?”
“내일 아침에나 떠날 텐데……”
“아니! 마시지 말게. 술은 여행길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지. 간혹 가다 목숨을 앗아 가기도 한다네.”
하후극의 말은 뭔가 묘한 여운을 담고 있었다.
몽뇌산은 이 눈앞의 사내가 자신에게 무엇을 알려 주고자 하는 건지 궁금했다.
하후극은 싱긋 웃은 뒤 고개를 돌려 이미 밤이 내려앉은 길을 내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처음 검을 잡은 것은 내 나이 여섯 살 때라네. 나의 사부님께서는 평생을 검과 더불어
살아 오신 분으로, 한 자루 검만 들면 두려울 것이
없는 분이셨지. 사부님께서 처음 어린 내게 목검(木劍)을 쥐여 주셨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나?”
고적(孤寂)한 길가 어디쯤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천천히 얘기를 풀어나가던 하후극이
문득 몽뇌산을 돌아보며 물었
몽뇌산은 가만히 고개만 저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네. 난 그때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지. 그땐 그저 그 목검이 좋은 놀잇감이었을 뿐 평생을 함께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
“그거야, 어린애니까 당연히……”
“아니,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네.”
하후극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사제라는 사람 말입니까?”
“처음 사제가 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내 사부님을 찾아왔을 때, 나는 이미 어느 정도 검을 터득했다고 자부하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지. 나는
사제가 들어온 게 기뻐서 그애를 잘 돌봐 줘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네. 그런데 내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것이었던지…… 후후!”
몽뇌산은 왜냐고 묻지 않고, 그저 허탈함과 씁쓸함이 섞인 그의 웃음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애는 내가 돌봐 줄 필요가 전혀 없었다네. 사부님께서 그애에게 여섯 살 때 내가 들고 놀았던 목검을
쥐여 주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만 했지. 자네도 이제 대강 짐작이 가겠지? 검을 들고 서 있는 어린 사제의 모습은 이미 검도고수 그 자체였지. 그애는 그 검과 완전히 동화되어 있었네.”
하후극은 말을 멈추고는 다시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렸다.
몽뇌산은 도대체 그런 일이 가능한가 생각하느라고 하후극이 얘기를 멈췄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다섯 살짜리가 완숙의 경지에 이른 검도고수처럼 검과 동화된 모습을 보여 주었단 말인가?
몽뇌산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괴물이 아니면 천재……”
몽뇌산은 혼자말하듯 중얼거렸다.
“사제의 나이 열여섯이 되었을 때, 그는 나에게 비무를 청했다네.”
“설마 패하진 않았겠죠?”
어느새 얘기 속으로 빨려든 몽뇌산이 흥분한 기색으로 물어 오자 하후극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지진 않았지.”
“다행이네요.”
왜 다행인지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몽뇌산은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하지만 그 다음해엔 패하고 말았지.”
“예?”
몽뇌산의 눈이 휘둥그래지는 걸 하후극은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
“나이 어린 사제에게 패했다는 충격에 그 길로 사문을 뛰쳐 나가는 나를 막고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군.”
몽뇌산은 귀를 쫑긋 세우고 하후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검도(劍道)의 길에는 끝이 없고 깨달음은 한 순간이다. 네 사제에게는 그 깨달음의 순간이 좀더 빨리 왔을 뿐, 결코 검도의 끝을 본 것은 아니다. 내
말을 네가 이해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
잠시 마음을 식히고자 한다면 가는 길을 막지는 않으마…… 그게 사부님을
뵌 마지막이었다네.”
하후극은 그때를 떠올리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몽뇌산은 하후극의 말을 곱씹으며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검도의 길에는 끝이 없고 깨달음은 한 순간이다?
끝이 없다는 게 사실일까?
“그때 사부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셨습니까?”
몽뇌산은 불쑥 고개를 쳐들고 하후극에게 질문을 던졌다.
“글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는 게 지금의 솔직한 마음이야. 하하! 내 지루한 얘기를 끝까지
들어 줘서 고맙네, 젊은 친구! 자네가 낯설지 않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다 보니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어. 벌써 밤이 깊었군.”
몽뇌산은 하후극의 시선을 따라 밖을 내다보았다.
“머무를 곳은 정하셨나요?”
“이 옆에 붙어 있는 다화객잔에 방을 잡았다네. 자! 일어나지, 그만.”
몽뇌산과 하후극은 사이좋게 다화객잔으로 향했다. 자신이 묵을 방에 이르자 몽뇌산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하후극이 돌아서는 순간, 막 닫혔던 방문이 도로 열리며 몽뇌산이 빠끔히 얼굴을 내밀었다.
“언젠가는 그 끝을 보실 겁니다. 꼭!”
하후극은 눈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담고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몽뇌산의 시선을 뒤로하고 그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뒤에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하후극은 자신이 묵을 방 앞에서 잠시 몸을 세우고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푸른 하늘에서 수많은 별들이 금세라도 쏟아질 듯 반짝였다.
시선을 내리고 방으로 몸을 돌리던 그가 문득 담담한 음성을 토해 냈다.
“계속 그러고 있을 참이오, 친구?”
“친구가 아니라 접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사형!”
객방 앞 뜰에 드문드문 세워진 나무 아래서 어둠을 두른 채 한 사람이 조용히 걸어나왔다.
달빛이 그에게 이르러 찬란하게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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