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제8장 - 습격(襲擊) 1

등록 2026.10.12 9.6천자 조회 1 좋아요 0 댓글 0 15세 이상 이용가
독로무한
17화. 제8장 - 습격(襲擊) 1


불어 오른 물살이 넘실대는 다리 밑에 교묘히 몸을 숨기고 있던 흑의인은 이번 일이 식은죽 먹기라고 생각했다.
성명은 이광(李光).
살영대 제삼대 소속 십삼호(十三號) 무사.
스물다섯 명의 살영 제삼대 대원 중 중간을 차지하는 번호로도 알 수 있듯이 특출나지도,
그렇다고 빠지지도 않는 무난한 무공 실력.
그러나 지닌 바 살기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이광은 적의 존재가 가까워짐에 따라 팽창된 혈관을 빠르게 타고 도는 피의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가벼운 흥분, 그만큼의 실망!
흥분은 곧 보게 될 피에 대한 것이었고, 실망은 임무가 너무 빨리 끝날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대원들의 생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그의 견해론 윗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너무 몸을 사린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기껏 한 명의 적을 상대하면서 제이대를 제외한 살영대의 전고수가 동원되다니 말이 되는가?
이건 괜한 힘의 낭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 다가오는 적에게선 절정고수만이 지닐 수 있는 기도가 한 오라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령 그가 그런 기도를 감출 만한 고수라 하여도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놈은 독공을 쓴다지만 그것도 시간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 아닌가!
이광은 눈가에 찐득한 살소를 머금었다.
임무는 금방 끝날 것이다.
놈이 다리 가운데에 이르는 순간, 살영대 제삼대에 속한 동료들의 도가 그를 난자할 것이다.
그가 뛰어들 무렵에는 어쩌면 할 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약에, 혹시라도 온전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는 기꺼이 그곳에다 일도를 더 선사할 생각이었다.
죽음을 부르는 그림자들에 둘러싸여 놈은 반항할 생각조차 못 품고 죽어 갈 것이다.
이광은 가슴에 품은 도의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일 보, 이 보…… 칠, 팔, 구……
혼례 행렬의 어지러운 발소리에 섞여 곧 죽을 자의 발걸음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 왔다.
‘삼(三) 보(步)만 더 오면……!’
이광은 몸의 긴장을 바짝 돋우었다.
다리의 총 길이는 삼 장이 조금 못 미치는 거리였다.
보통 키의 어른 보폭으로 이십사 보!
놈의 행로를 파악하여 이 다리를 매복지로 결정한 후 가장 먼저 살펴본 것이 그것이었다.
놈의 발이 열두 번째 내밀어지는 순간 정확히 임무가 시작될 것이고, 열세 번째 걸음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십이(十二) 보(步)!’
이광은 힘차게 도를 뽑아 올렸다.
그러나 그것은…… 몽뇌산이 발을 완전히 땅에 대기 전이었다.
몽뇌산은 그리 넓지 않은 목교 위에 빽빽히 들어찬 마차와 족히 스무 명은 될 것 같은 사람들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그가 한쪽으로 비켜서 걸을 것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신부를 실은 마차를 앞뒤로
둘러싼 행렬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다가와 어느새 행렬의 머리부분이 몽뇌산이 지나온
다리 끝에 닿고 있었다.
다리 중간에서 행렬에 끼여 오도 가도 못 하게 된 형국이었다.
몽뇌산은 결국 한 발을 내딛으려 쳐든 상태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바로 그때였다.
행렬의 가운데에 위치한 마차의 휘장이 느닷없이 제쳐지며 붉은 비단 예복을 입고, 역시
붉은색의 천을 머리에 뒤집어쓴 신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는 몽뇌산이 채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다리 밑에서 거무스레한 것이 살벌한 기세로 솟아올랐다.
슈우우욱!
“엇!”
놀람에 찬 그의 시선이 다리의 난간으로 향했다.
도세를 피해 다리 안쪽으로 한걸음 내딛는 순간,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삼십대의 사내가 들고 있던 짐을 팽개치며 두꺼운 옷 속에서 칼을 꺼내 곧바로 허리를 베어 왔다.
몽뇌산은 경호성(驚呼聲)을 토하며 몸을 위로 솟구쳤다.
사내의 칼은 허공을 가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목교의 난간을 수수깡처럼 베어 넘겼다.
순식간에 발 디딜 곳을 잃은 몽뇌산은 다급히 주위를 쓸어보다가 아래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창졸간에 일권(一拳)을 내질렀다.
매서운 파공음(破空音)을 흘리며 권풍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독이 있을지 모르니 맞붙지 마라!”
한소리 거친 외침이 마차 안에서 터져 나옴과 동시에 요란한 충돌음이 들렸다.
퍼엉!
채애애앵`─`!
길게 울리는 도신(刀身)의 떨림을 들으며 몽뇌산은 충돌의 반탄력을 이용해서 마차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한데 놀랍게도 그 순간, 마차의 지붕이 쩌억 갈라지며 불그스레한 형체가 희끗 눈앞을 스쳤다.
몽뇌산의 발이 지붕 위를 박차며 눈 깜짝할 사이 난간으로 옮겨 갔다.
일도양단(一刀兩斷)!
놀라운 기세로 가슴팍을 베어 오던 도기가 그대로 허공을 가르고 지나 갔다.
도기가 일어난 곳, 그곳엔 검은 빛을 뿌리는 도를 손에 쥔 적의복면 차림의 살수(殺手)가 있었다.
방금 전까지 휘감고 있던 신부의 복장은 벗어 던진 지 오래였다. 그가 내던진 붉은 천이 도기에 휘말려 미친 듯이 펄럭거렸다.
쑤아아`─`!
음산한 파공음을 내며 적의인의 도가 거침없이 밀어닥쳤.
몽뇌산은 검은 도기를 무시한 채 적의인의 팔목을 향해 일수를 쪼개어 냈다.
수영이 금세 도를 쥔 적의인의 팔목을 압박해 갔다.
팔목이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듯하자, 적의인이 이를 갈며 몸을 틀었다.
한숨 돌린 몽뇌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힐끔 아래를 살폈다.
악기며 깃발이며 짐보따리를 죄다 내팽개치고 손에 무기를 빼어 든 채 적들은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들 중엔 다리 밑에서 솟구친 이광과 그의 동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몽뇌산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켜 그의 옆을 비껴 지나간 도세의 여파(餘波)를 흘려 보냈다.
그러나 짧은 여유도 잠시, 숨 한 번 쉴 새도 없이 재차 적들의 공격이 밀어닥쳤다.
어이없게도 그 순간 몽뇌산의 머릿속엔 하후극이 했던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내게 경고해 주고 싶었던 게 이걸 말하는 거였나?’
몽뇌산은 굳은 얼굴로 적의 공격을 밀어 냈다.
그때, 그를 공격하는 데 끼여들지 않던 적들은 난간을 차례로 잘라 내버리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몽뇌산은 초조함에 바짝 몸을 긴장시켰다.
난간에 버티고 서서 사왕권을 연달아 쳐내던 그는 마차에서 나온 적의인의 도기가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의 괴음(怪音)을 흘리며 검은 뇌전(雷電)처럼 날아오자 바짝
긴장한 채 내심 호된 맛을 보여 주리라 결심하며 만청독수의 제일수 청무일변(靑霧逸變)을 펼칠 준비를 했다.
그가 막 발을 힘차게 구르며 허공으로 도약하려는 순간, 난간을 받치고 있던 나무기둥이 싹둑 베어져 나가며 그가 딛고 있던 목판이 우지끈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가 적의인의 공격에만 신경을 쏟는 틈을 타서 허를 찌른 적의 신속한 한 수였다.
“이런!”
찰나간에 몸의 균형이 흐트러진 몽뇌산은 허리를 갈라 오는 무지막지한 적의인의 도세(刀勢)에 눈빛을 굳혔다.
몸을 가볍게 띄우려 애쓰던 몽뇌산은 별안간 무슨 생각에서인지 무게를 발끝으로 모았다.
순간, 몽뇌산의 몸이 그대로 빠르게 추락했다.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적의인의 도가 머리 위로 스쳐 갔다.
그의 발이 목교의 바닥을 디디자마자 혼인 행렬의 수행꾼으로 가장했던 적들의 도가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밀어닥쳤
상황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몽뇌산은 공력을 배가시켜 손에 독기(毒氣)를 가득 모으며 적들이 가장 좋은 위치로 다가들기를 기다렸다.
적의인의 폭풍 같은 도기에 정수리의 머리카락이 쭈뼛하고 곤두서는 순간, 몽뇌산은 투명한 푸른
안개 빛을 흘려 내는 쌍수를 힘껏 내쳤다.
쿠우우우`─`!
독장(毒掌)이 적의인의 흑도를 향해 정면으로 밀려 갔다.
한데 양패구상을 각오한 것인가?
적의인은 지척으로 밀어닥친 장력을 무시한 채 도를 그대로 날리고 있었다.
검은 도기가 금방이라도 그의 머리에 내리꽂힐 것 같은 순간, 몽뇌산의 눈앞으로 뭔가가 휙 다가들었다.
검고 흰 빛이 번쩍거리며 뒤엉킴과 동시에 지독한 금속성(金屬性)이 주위를 울리더니 목교가 지진이라도
만난 듯 흔들렸다.
카가아앙!
“으음……”
행렬의 짐보따리를 건드렸는지 분분히 날리는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천조각들 사이로 한
줄기 신음성(呻吟聲)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몽뇌산의 신형이 목교 아래에서 굽이치는 누런 물살 속으로 뛰어들었다.
몸을 거슬러 오르는 바람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놀람에 찬 외침이 그의 귓전을 스쳤다.
“앗!”
순간, 넘실거리는 누런 흙탕물이 코앞으로 다가들었다.
* * *
인내(忍耐)!
세상에 중요한 일치고 인내를 요하지 않는 일이란 거의 없
지금 척중경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런 엄청난 인내를 요하는 일이었고 그가 속한 살영대가 하는 일도 거의
다 그런 종류였다.
교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교의 뜻을 수호하고 교의 결정을 집행하는 전사(戰士)들이라고 얘기하곤 했지만
강호상의 기준으로 쉽게 풀어 말하면 결국 살수(殺手)라는 얘기였다.
살수에게 있어서 인내란 임무를 성공시키는 지름길이요, 실수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살수 생활에서
목숨을 부지해 주는 밑바탕이었다.
척중경은 한 사람의 살수로서 인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살수 행동 수칙 제일조인 인내를 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 있는 곳은 추워도 너무 추운 곳이었다. 한겨울에 물속에 몸을 담그고 따뜻하기를 바라는 것부터가 사실 우스운 일이겠지만.
물은 정말 차가웠다.
다른 해에 비해 비교적 따뜻한 겨울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한겨울인 데다 며칠 전에
비가 오는 바람에 물까지 불어나 장시간 같은 자세로 기다리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밑바닥까지 온통 헤집어 놓은 세찬 빗줄기 때문에 시내가 완전히 흙탕물이 되어 굳이 은신법(隱身法)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이 가려진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세찬 물소리가 귀식대법(龜息大法)을 쓴다 해도 은연중에 나타나는 미세한 호흡 속의 살기마저 가려 주고 있으니 실로 금상첨화(錦上添花)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흙탕물이 눈, 코, 귀 등 여기저기 안 가리고 마구 들이닥친다는 것일까?
그러나 그러한 불편과 고통 역시 살수 본연의 인내로써 극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척중경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먹이가 가장 공격하기 좋은 위치에 서는 그 한 순간을 노리기 위해 그는 긴 시간을 인내했다.
그리고 하늘이 무심치 않아 노력이 헛되지 않게 그때가 왔
풍덩`─`!
머리 위에서 엄청난 포말(泡沫)이 일며 목표물의 신형이 바로 지척으로 다가들자, 향천(香川) 바닥에 박혀 있는
제법 큼지막한 바위 뒤에서 납작 자세를 취하고 있던 척중경은 내심 쾌재(快哉)를 불렀다.
공력을 있는 대로 끌어모은 척중경은 상대를 베어 넘길 일도(一刀)를 준비했다.
척중경의 눈빛이 음사(陰邪)하게 타올랐다.
‘놈이 수면 밖으로 나가는 순간 베는 것이다!’
일격필살(一擊必殺)!
살수에게 두 번의 기회란 없다!
마음속으로 그러한 말을 뇌까림과 동시에 척중경은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고 공격할 준비를 했다.
두 토막으로 나뉜 그의 왼쪽 눈썹이 꿈틀거리는 순간, 척중경의 몸이 쭈욱 물살을 갈랐다.

누런 흙탕물이 온몸을 철썩 때리는 순간, 몽뇌산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하였다.
‘지독히도 차갑구나!’
정말이지 물은 너무나 차가웠다.
살갗에 소름이 쫙 돋는 섬뜩한 추위에 몽뇌산은 순간적으로 십만대산이 그리워졌다.
줄기줄기 엮어 놓은 구슬같이 흘러내리는 땀방울.
어느 물속에 뛰어들어도 미지근한 그 느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만 해도 살짝 벌린 입 속으로 흙탕물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통에 숨이 다 막힐 정도였다.
몽뇌산은 뻣뻣하게 굳어 오는 손발로 힘껏 물을 박차며 위로 몸을 솟구쳤다.
그때였다.
‘뒤다!’
대뜸 뒤를 향해 일장을 뿌리며 몸을 틀던 몽뇌산은 그의 장력에 별 영향을 받지 않은 듯 빠르게 다가오는
적을 보며 진천독공을 일으켰다.
한데 다가오는 적을 보면서도 몽뇌산은 독공을 발휘하는 걸 머뭇거리고 있었다.
결국 독기를 철회한 그의 쌍수가 연환으로 맹렬히 장력을 쳐냈다.
장세가 물살을 휘저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적에게 다가드는 것을 힐끔 확인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대로 몸을 뽑아 올려 수면을 뚫고 밖으로 솟구쳤다.
수중이라 얼마만한 위력을 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물속에도 적이 있다는 걸
안 이상, 우선은 물 밖으로 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물기를 뚝뚝 떨어뜨리며 솟구친 그의 머리 위로 알록달록한 갖가지 천조각들이 날아내렸다.
코끝에 닿는 찬바람을 느끼며 그가 숨을 몰아쉬는 순간, 어지럽게 날리는 천조각들 사이로 뼈가 시릴 정도로 음험(陰險)한 살기가 강하게 엄습했다.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진 셈이었다.
수중에서 황망간에 내친 그의 연환장력은 별 효과가 없었
어쨌거나 지금 그를 공격하는 적이 있던 곳이 물속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상대는 상당한 쾌도(快刀)를 구사하고 있었다.
써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가르려는 찰나, 몽뇌산은 허공에서 벼락같이 돌아서며 사왕권(蛇王拳)을 쳐냈다.
파파파밧`─`!
예리한 음향을 동반한 권영(拳影)이 물속에서 따라 나온 흑의인의 도를 강하게 밀어 냈다.
특이하게도 눈썹 가운데로 길게 상처가 난 그 흑의인이 주춤 뒤로 미끄러지는
사이, 물속에서 다른 흑의인들이 몸을 뽑아 올리며 몽뇌산을 향해 일제히 도를 쳐냈다.
“조심하게!”
목교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의 임자를 확인할 새도 없이 몽뇌산의 주먹이 눈에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며 허공을 난타(亂打)했다.
회오리바람 같은 권풍(拳風)이 대기를 밀어 내며 흑의인들의 도세를 무너뜨렸다.
사왕권을 다시 한 번 연환(連環)으로 쳐낸 후, 몽뇌산은 그 여세(餘勢)를 빌려 냇가에 있는 나무 위로 올라섰다.
목교 위에서 첫 공격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상황을 제대로 살펴볼 여유를 갖게 된 그는 좀 전에 자신에게
주의를 주었던 사람을 찾아 목교 위를 기웃거렸다.
“아니, 저 사람은?”
몽뇌산은 목교 위에서 정체 모를 적들을 하나씩 베어 넘기고 있는 회의검수(灰衣劍手)를 바라보며 짧은 놀람의 외침을 토해 냈다.
그의 등에 매여 있던 검이 어느새 손에 쥐여져 있다는 걸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길쭉하니 볼품없게 싸여 있던 검은, 이 순간 놀라운 위력을 보이고 있었다.
하후극의 검에서 주욱 뻗어 나온 두 자 가까이 되는 하얀 검기(劍氣)에 부딪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루가 되었다.
아래로 시선을 돌린 몽뇌산의 시야에 좀 전에 권풍에 휩쓸려 시내 위로 떨어졌던 흑의인들이 흙탕물을 튀겨 올리며 분분히 몸을 솟구치는 모습이 들어왔다.
쌍둥이처럼 음산한 눈빛에 무표정한 얼굴을 한 흑의인들은 몽뇌산이 내려선 나무를 빙
둘러싼 채로 점점 거리를 좁혀 왔다.
좀 전엔 정신이 없어 제대로 보질 못했는데 지금 보니 물속에서 나온 흑의인들의 수는
거의 목교 위에 있는 자들과 맞먹을 정도였다.
몽뇌산은 두 손에 공력을 가득 모으고 만청독수를 쳐낼 준비를 했다.
아까는 물속이어서 혹시 무고한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 망설였지만 지상으로 나온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무 위로 몸을 솟구치는 흑의인들을 향해 그가 막 공격을 하려는 찰나, 뒤통수가 서늘해지는 느낌과 함께 공기의 파동이 느껴졌다.
몽뇌산은 몸을 납작하게 낮추며 왼발을 축으로 하여 뒤로 돌아섰다.
몽뇌산이 물속에서 나온 뒤 처음으로 맞부딪혔던, 눈썹이 특이한 흑의인이 그의 머리를 노리던 도를 아래로 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를 공격해 오는 무리들 중에 이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니만 어느새 은신해서 등뒤로 다가들다니……!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몽뇌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 동강을 내려는 듯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정수리로 떨어지는 흑의인의 도를
피해 뒤로 상체를 젖힘과 동시에 두 손을 내밀었다.
흑의인의 음산(陰散)한 눈동자에 득의(得意)한 빛이 스쳐 갔다.
최대한의 공력을 실은 듯, 그의 흑도 끝에서 검은 기운이 맺히며 몽뇌산과의 거리를 단축시켰다.
퍼어엉!
몽뇌산의 양손에서 빛살처럼 솟구친 파르스름한 경기(勁氣)와 흑도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서로 얽혀들었다가 떨어졌다.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며 뒤로 밀려났던 흑의인이 나무 둥치를 가볍게 구르며 빠르게 하강하는 몽뇌산을 따라잡았다.
흑의인의 도가 몽뇌산의 지척으로 다가드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아래쪽에 있던 흑의인들이 일제히
도를 휘두르며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꼬치가 되어 난도질을 당하려는 찰나, 몽뇌산은 몸을 수평으로 뉘여 팽이처럼 돌며 허공에다 무수한
장영을 피워올렸
막대한 경력에 섞여 나온 푸르스름한 기운이 흡사 새벽 안개와 같이 주위를 물들였다.
스스스스`─
기괴한 음향이 일대를 휘감음과 동시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서서히 흑의인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따다다당!
도끼리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일대를 소란스럽게 만들었
몽뇌산은 몸을 바로하며 머리 위에서 재차 공격을 시도하는 흑의인에게 맹렬히 연환장을 뿌렸다.
만청독수의 제일수 청무일변(靑霧逸變)에서부터 제삼수 독화비천(毒花飛天)까지였다.
흑의인은 순간적으로 삼(三) 도(刀)를 쳐내며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푸른 장영을 막았다.
그런데 장영을 막아 내는 흑의인의 눈동자에 기괴(奇怪)한 빛이 스쳤다.
흑의인, 척중경의 반 토막난 눈썹이 꿈틀거리며 동시에 입술이 일그러졌다.
‘뭔가 잘못됐다!’
그랬다.
분명 뭔가 이상했다.
척중경은 애초에 놈의 공격을 막기 위해 도의 방향을 모두 다섯 번 바꿨다.
그런데 실제 겉으로 드러난 것은 겨우 삼 도에 불과했다.
마지막 사도(四刀)와 오도(五刀)는 어찌 된 영문인지 공력이 따라 주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게 점점 손발이 무거워졌다.
척중경은 왼발로 오른발을 찍어 다시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는 적의 허점을 찾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어느 순간, 갑자기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왔다. 척중경은 눈에 먼지라도 낀 듯한 기분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몸을 솟구치는 바람에 적의 옆구리에 빈틈이 생긴 걸 포착하자 척중경은 순식간에 이(二) 장(丈) 거리를 따라붙으며 이 일전을 끝낼 결심을 했다.
그가 막 최후의 일도를 몽뇌산의 옆구리에 꽂으려는 순간, 도가 천근만근인 양 무거워지며 가슴에 극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적의 숨통을 끊어 놓을 좋은 기회를 놓친 채 맥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척중경은 계속 이상하단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왜, 내가 왜……?’
눈앞이 암흑 속처럼 깜깜해지면서 얼굴 여기저기에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있는 대로 치떠진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피가 허공으로 방울방울 튀어올랐다.
온몸의 감각이 마비됨과 동시에 척중경은 흙탕물 속으로 첨벙, 하고 빠졌다.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떠올랐다를 반복하며 떠내려가는 척중경의 몸은 언뜻 보기에도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칠공(七空)으로 검은 피를 흘려 내는 척중경의 몸은 곧 물살에 휩쓸려 멀어져 갔다.
‘놈이 물속으로 들어오자마자 바로 두 토막을 냈어야만 했어. 등을 노리는 게 아니라 입수할 때 정면을 노렸어야 하는 건데…… 살수에게 두 번째 기회란 없거늘……’
죽음을 맞는 순간, 척중경은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가슴을 쳤다.
하지만 언제나 후회란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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