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제8장 - 습격(襲擊) 2
독로무한
18화. 제8장 - 습격(襲擊) 2
다시 나무 위에 내려선 몽뇌산은 향천의 흙탕물 주위 곳곳에 널브러진 흑의인들의 시체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모두 칠공에서 검은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볼 것도 없이 진천독기를 들이마신 결과였다.
적이지만 과히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몽뇌산은 한숨을 쉬며 목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교 위의 상황도 거의 끝을 맞고 있었다.
누구도 하후극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까 몽뇌산의 독공에 정면으로 부딪히고도 모자라 하후극의 검까지 맞닥뜨려야 했던 복면인은 이미 바닥에 몸을 눕힌 지 오래였다.
남은 적들 몇 명을 매섭게 몰아붙이고 있는 하후극의 기세는 가공(可恐), 그 자체였다.
그때, 마을로 향하는 목교 건너 공지(空地) 왼쪽에 자리한 작은 숲에서 몇 개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족히 사오 장은 될 듯한 거리를 순식간에 날아든 흑의복면인들은 목교 위에
날아내리자마자 하후극을 향해 몰려들었
하후극의 눈빛은 그들이 나타나는 순간, 딱딱하게 굳어들고 있었다.
‘적의 원군(援軍)이 나타나다니…… 그럼 공야(公冶) 선배(先輩)께서 당하셨단 말인가? 그럴 리가!’
하후극은 입술을 한 일 자로 꽉 다물었다.
좀 전까지 여유있던 상황은 다시 급박하게 흐르고 있었다.
하후극은 도를 놓친 적의복면인을 가차없이 베어 넘기며 피범벅이 되어 무너져 내리는 그의 몸을 뛰어넘어 방금 나타난 흑의복면인들을 검으로 휩쓸어 갔다.
그의 검에서는 무려 좀 전의 두 배인 넉 자에 가까운 백색 검기가 치솟으며 서릿발 같은 기운을 뿜어 냈다.
나뭇가지를 딛고 서서 구경만 하고 있는 몽뇌산의 모습이 답답했으나 우선은 한시바삐 적을 물리치고 이곳을
빠져 나가야만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몽뇌산이 지니고 있는 옥합을 지켜야 한
하후극은 차가운 눈으로 적의 움직임을 쫓으며 좌우에서 공격해 오는 두 명의 흑의인들의 공격을 피해 몸을
틀어 그들의 가슴을 검으로 꼬치처럼 꿰뚫었다.
그그극!
뼈가 검에 걸리는 선뜻한 느낌과 함께 흑의인들의 몸이 공중에 핏방울을 튀기며 쓰러졌다.
순간, 새로 나타난 적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흑의복면인이 요사(妖邪)한 빛을 뿌리는 적도(赤刀)를 휘두르며
수하들의 시신을 발로 걷어차올렸다.
하후극은 자유로운 왼손으로 시야를 가리는 시신을 밀어 내며 검을 가슴 앞에 곧추세워 전신을 방비했다.
유부(幽府)의 호곡 소리를 방불케 하는 살 떨리는 음향이 일며 사이롭고 음유(陰柔)한 기운이 엄습해 왔다.
적도에서 나온 음습한 도기가 거미줄처럼 전신을 휘감아 오자 하후극은 웅웅거리며
싸늘한 백광(白光)을 토해 내던 검을 비스듬히 쳐들며 붉은 도광(刀光) 속으로 뛰어들었다.
몽뇌산은 붉고 하얀 도기와 검기가 회오리 같은 바람을 일으키며 얽혀드는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대단한 고수였군!”
그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그의 능력은 상상 밖이로군. 대단한 사람을 호법(護法)으로 두었어!”
바로 곁에서 말하는 듯 선명한 목소리에 몽뇌산은 흠칫 놀라 휙 돌아섰다.
삼 장쯤 떨어진 시내〔川〕 반대편의 나무 위에 헐렁한 갈색 장포를 입고 동색(銅色)
면구(面具)를 쓴 왜소한 체격의 인물이 소리없이 나타나 서 있었다.
굳어 있던 몽뇌산의 눈빛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당신은 누군가?”
“그대에게서 한 가지 물건을 찾아가기 위해 온 사람이라고 해두지.”
동색 면구 밖으로 보이는 두 눈이 차갑게 번쩍였다.
몽뇌산은 남녀를 짐작할 수 없는 그의 중성적인 목소리를 들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물건? 아니, 그보다 그가 나의 호법이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모르는 척 내게 묻는 건가? 보기보다 교활하군! 다른 호법 한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나? 그는
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순순히 옥합을 내놓아라!”
몽뇌산은 갈의면구인의 음랭(陰冷)한 외침을 들으며 점점 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다른 호법?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하하하하!”
갈의면구인은 길게 웃어 젖혔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그의 웃음 소리가
기이하게 울려 퍼지자 주변에 있는 나무들의 잔가지가 뚝뚝 부러져 나갔다.
몽뇌산은 얼른 공력을 끌어올려 심맥(心脈)을 보호하며 그를 가만히 쏘아보았다.
갈의면구인의 웃음이 딱 멈춰졌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용만 당하고 있는 거란 얘긴데…… 좋아! 알든 모르든 상관없는 일이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갈의면구인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어둠의 장막(帳幕)이 일렁거리듯 헐렁한 장포 자락을 펄럭거리며 그의 신형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삼 장을
미끄러져 몽뇌산의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내놓아라!”
몽뇌산은 다른 가지 위로 훌쩍 물러나며 만청독수의 제사수 독영만리를 운용하여 우수를 뻗어 빠르게 흔들었다.
장심(掌心)에서 푸른 기운이 솟아오르며 허공에 푸르스름한 꽃비〔花雨〕를 뿌리기 시작했다.
푸른 빛을 내는 꽃비에 스친 나뭇가지들이 남빛으로 물들었다.
“네 독공 따윈 본좌에게 어림도 없다!”
갈의면구인은 냉랭히 코웃음을 치더니 호흡을 멈춘 상태에서 얼룩덜룩하게 번들거리는 검은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밀려오는 장세를 단숨에 후려쳤다.
그가 낀 가죽장갑은 독에 대해 특별한 묘용(妙用)이 있는 듯, 정면으로 독기에 맞서 가는
그의 눈빛에선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산산이 흩어지는 푸른 장영 사이로 갈의면구인이 유령처럼 다가섰다.
‘호흡을 멈췄다고는 하나 전혀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건, 그럼……? 그렇군! 피독단이로군……’
바쁘게 염두를 굴리는 와중에서도 몽뇌산은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앞으로 끌어당겼다가 재빨리 손을 놓으며
몸을 솟구쳐 더 위쪽의 가지로 올라섰다.
그의 손을 벗어난 나뭇가지가 휘청거리며 채찍처럼 갈의면구인을 휘감아 몰아쳤다.
갈의면구인의 몸이 옆으로 주욱 미끄러지며 손가락을 꼿꼿이 펴서 나뭇가지 중간을 내리쳤다.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가 맥없이 부러져 나갔다.
몽뇌산은 거칠 것 없이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갈의면구인의 위세(威勢)에 내심 바짝 긴장했다.
속에서 많은 의문이 샘솟고 있었지만 일단은 가슴에 묻어 두고 적을 물리치는 것이 먼저였다.
귀신 같은 신법으로 성큼 다가선 갈의면구인이 검은 손으로 가슴팍을 움켜쥐어 오자
몽뇌산은 상체를 뒤로 젖힌 채 환운주(幻雲走)의 신법을 써서 나뭇가지를 따라 옆으로 미끄러지며 몸을 틀었다.
몽뇌산이 미꾸라지처럼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자 갈의면구인의 눈동자에 짤막한 이채가 떠올랐다.
“도망가는 실력이 제법이구나! 하나 언제까지 피할 수 있나 보자!”
갈의면구인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우수로는 여전히 몽뇌산의 가슴팍을 노려 옴과 동시에 좌수로는 그의 하반신을 노렸다.
검은 손 그림자가 번뜩이며 밀어닥치자 몽뇌산은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발끝에 힘을 주었다.
그가 누르는 힘을 못 견디고 나뭇가지가 휘청 아래로 늘어졌다.
순식간에 목표가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자 갈의면구인의 눈동자에 서늘한 광채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가지의 반동(反動)을 이용해 내려갈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솟구쳐 오른 몽뇌산은 양손으로 위쪽의 가지를 잡으며 허공을 한 바퀴 돌아 지면으로 날아내렸다.
목교 건너에 펼쳐진 공지 위로 사뿐히 내려서는 순간, 얼음송곳처럼 차갑고 예리한 기운이
살벌(殺伐)하게 휘몰아쳐 왔다.
쌔애애액`─`!
대기를 밀어 내며 가슴 한가운데로 날아드는 지력(指力)을 대하고 몽뇌산은 기겁을 했다.
“빠르구나!”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오른쪽으로 물러섬과 동시에 왼쪽 어깨를 뒤로 틀었다.
찌익`─`
간발의 차이로 지력이 빗나가며 길게 찢겨 나간 어깨 부분의 옷 사이로 붉은 혈흔이 생겼다.
“제기랄!”
자세를 가다듬을 새도 없이 어느새 지면에 내려선 갈의면구인의 공격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몽뇌산은 검은 빛을 토하며 쇄도하는 갈의면구인의 장력을 향해 똑바로 몸을 세웠다.
그의 쌍수가 지루하도록 천천히 들리는가 싶더니 만청독수의 제오수인 독영파천(毒影破天)이 허공에 푸른 불을 뿜었다.
쿠구구구!
눈이 시릴 정도로 투명한 빛을 뿌리는 청색 장영과 음산한 검은 장영이 정면으로 충돌을 일으켰다.
콰아앙`─`!
흙먼지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억눌린 듯한 신음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으음!”
동시에 재차 거친 음성이 먼지 사이를 뚫고 또렷하게 들렸다.
“재수에 옴 붙은 날이군.”
서서히 가라앉는 먼지 사이로 몽뇌산과 갈의면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제자리에 우뚝 서 있는 갈의면구인과는 달리, 몽뇌산은 일 장이 넘게 주르르 밀려가 가슴을 주무르며
오만가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
비록 갈의면구인보다 늦게 발동했다고는 하지만 입가에 살짝 엿보이는 혈흔이 이번 일전에서 그가 손해를 보았음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도대체 무슨 여자가……?”
그 순간, 몸을 바로 펴지 못하는 몽뇌산에게 천천히 다가들던 갈의면구인의 신형이 움찔하며 멈춰 섰다.
몽뇌산은 조금씩 몸을 바로 세우며 갈의면구인을 힐끔 쳐다보았다.
딱딱하게 굳어진 눈빛에서 몽뇌산은 미미한 떨림을 발견하곤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좀 전의 격돌에서 바람 때문에 몸에 달라붙은 갈의장포 위로 명확히 드러나는 가슴의 윤곽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스무 살이 넘도록 산에서만 주로 생활해 온 그였지만 남녀의 차이도 모를 정도로 무지하진 않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몽뇌산이 자세를 바로하는 사이 갈의면구인의 눈빛은 금세 본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욱 무심하게 빛나는 그 눈동자에서 그, 아니 그녀의 마음을 읽어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목교 위의 상황을 힐끔 살핀 갈의면구인, 동령 영주의 눈에서 단호한 빛이 떠올랐다.
‘저자가 살영대주를 죽이고 이쪽에 가세하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한다!’
“본래, 물건만 가져 가려 했으나, 네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
동령 영주는 점차 패색(敗色)이 짙어지고 있는 살영대주로부터 차갑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에서 검을 풀어 냈다.
“잠깐! 피차 손으로 싸우다가 이제 와서 무기를 꺼내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막 검을 뽑아 들던 동령 영주의 손이 멈칫했다.
다음 순간, 자신이 그의 말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不定)하기라도 하듯, 동령 영주는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검을 뽑아 들며 벼락같이 몸을 날렸다.
몽뇌산은 동령 영주의 심기를 흩뜨려 놓으려고 던진 말이 별 효과를 보지 못하자 신중한 눈빛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가슴 앞에 모인 그의 두 손에서 물빛처럼 연한 청색 기운이 소리없이 피어올랐다.
그러더니 이내 그 기운은 천천히 손 주위를 회전하며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실 타래를 말아 놓은 듯 둥글게 뭉친 그 기운에서 사방을 진동시키는 기이한 떨림이 흘러나왔다.
우우우웅`─`
그 광경에 동령 영주의 눈빛이 한층 매서워지며 그녀의 검세가 일변했다.
다섯 자 가까이 되는 검기가 검극(劍極)에서 쭈욱 뻗어 나오며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였다.
콰아아`─`!
검은 광채를 피워올리는 검기가 꿈틀대며 요동을 쳤다.
다음 순간, 동령 영주의 손목이 살짝 틀어지며 검기가 폭포수처럼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몽뇌산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몰려오는 그 검세에 내심 진저리를 치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손이 무겁게 앞으로 내밀어지며 투명한 하늘빛 구체가 느릿하게 앞으로 밀려갔다.
몽뇌산이 진천독경을 통해 오 년간 쌓여 응집된 독기의 구체와 동령 영주의 막강한 검기가 충돌을 일으켰다.
독기를 품고 있는 하늘빛 구체, 독정(毒精) 한가운데로 검은 빛이 스며들었다.
수박이 갈라지듯 반으로 쪼개져 허공에 산산이 흩어지는 구체를 보며 몽뇌산은 최대한 뒤로 물러섰다.
독정을 회수하기 무섭게 검기가 지척으로 쭈욱 다가들었.
검기 사이로 동령 영주의 번쩍거리는 면구가 발하는 금속성 빛이 눈에 들어온다 싶은 순간,
“으윽!”
고통에 찬 신음성과 함께 몽뇌산의 신형이 뒤로 튕겨졌다.
쩌억 갈라진 가슴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때, 너풀거리는 그의 옷자락 사이로 무언가가 툭 떨어져 내렸다.
바람에 날리는 종이인형처럼 뒤로 날아가는 그의 몸에서 튀어오른 그 물체가 검세의 여파를 타고
소용돌이치는 대기에 휘말려 올라갔다.
“안 돼!”
막 적도(赤刀)를 부수고 흑의복면인을 베어 넘긴 하후극이 그 광경에 대경(大驚) 실색(失色)하여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공지 좌측에 있는 숲속으로 나가떨어진 몽뇌산은 이미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하후극이 엄청난 속도로 한달음에 다리를 건너며 동령 영주에게 일검을 날렸다.
그의 검세를 가볍게 물리치며 동령 영주가 왼손으로 그 물건을 낚아채 갔다.
물건이 빨려 들어가듯 동령 영주의 손으로 들어오려는 찰나, 그녀의 좌측에서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 팔을 노리고 침습해 왔다.
‘고수다!’
난데없이 훼방꾼이 나타나자 동령 영주의 눈동자에서 지독히도 차가운 빛이 솟구쳤다.
속으로 분노에 찬 침음성(沈吟聲)을 삭이며 손을 거둔 그녀가 검기를 피해 뒤로 주욱 물러서며 외쳤다.
“누구냐?”
* * *
혁무빙은 옆에서 빠르게 달리고 있는 갈의노인을 힐끔 바라보았다.
대략 육십 줄에 들어서 보이는 갈의노인은 옷 여기저기에 피가 점점이 묻어 있어 얼른 보기에도 난전(亂戰)을 치른 사람 같았다.
“너무 늦지 않았을까?”
혁무빙은 희미하게 걱정이 묻어나는 갈의노인의 음성을 들으며 무심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공야 선배! 사형께서는 그리 쉽게 당하실 분이 아닙니다.”
“그래도 그 영주란 자가 그들을 찾아간 지 꽤 오래 되었는데…… 무슨 일이 없으면 좋으련만…… 자네에게
대강 얘기했듯이 그 물건은 절대 빼앗겨서는 아니 되네.”
갈의노인, 공야선표(公冶禪)는 혁무빙의 무표정한 얼굴을 초조한 얼굴로 바라보더니 곧 속도를 배가(倍加)시켰다.
아! 그런데 공야선표라면……?
이십 년 전 강호에서 사라진 그가 오늘날에 이르러 이 한적한 관도에 모습을 다시 나타내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당시 공야선표는 한 자루 섭선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정교함과 쾌속함을 장기로 삼는 선법과 표홀함이 돋보이는 신법으로 강호를 거칠 것 없이 누비고 다녔었
불의를 참지 못하고 협을 실천하기를 꺼리지 않으니 사람들은 그런 그를 가리켜 선풍은협(扇風隱俠)이라고 했다.
이제 불현듯 다시 나타나 호젓한 관도를 달려나가는 그의 신법은 여전히 지난날의 무위를 보여 주고 있었다.
빛살을 방불케 하는 속도로 관도를 한 식경 가량 치달린 그들의 앞쪽에서 아련하게 싸움 소리가 들려 왔다.
공야선표의 눈동자에서 강렬한 안광이 일며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공야선표가 막 다산현의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 찰나, 혁무빙의 신형이 그의 곁을 쏜살같이 스쳐 가며 이쪽에서 저쪽까지, 폭이 족히 삼 장은 될
듯한 시내를 단숨에 훌쩍 뛰어넘었다.
흠칫 놀라던 공야선표도 이내 속력을 배가시켜 뒤를 쫓았다.
공야선표가 동령 영주의 일검에 밀려 뒤로 물러서는 하후극에게로 화급히 다가서는 순간, 분노에 찬 날카로운 음성이 앞에서 터져 나왔다.
“누구냐?”
목교 건너의 공터에 내려선 공야선표의 눈으로 웬 옥합 하나를 잡아 가는 혁무빙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 안도감이 퍼져 갔다.
그런데 혁무빙이 옥합을 막 손에 넣으려는 순간, 그의 검을 피해 옆으로 물러났던
동령 영주가 옥합을 향해 지력을 날렸다.
따앙!
금속성과 함께 지력에 의해 이 장쯤 밀려 날아가던 옥합의 뚜껑이 작은 균열(龜裂)을 일으키며 살짝 틀어졌다.
옥합을 따라 눈부신 속도로 몸을 날리는 혁무빙 앞으로 동령 영주가 나타났다.
“두 분! 뭣 하고 계시는 겁니까?”
동령 영주를 향해 재차 검을 뿌리며 혁무빙은 싸늘한 외침을 발했다.
동시에 이제껏 넋을 놓고 있던 하후극과 공야선표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서둘러 동령 영주를 막아 섰다.
두 사람으로 인해 동령 영주의 발길이 주춤하자 혁무빙은 한데 얽혀 싸움을 시작한 그들의
머리 위를 대붕(大鵬)처럼 단숨에 뛰어넘었다.
대번에 옥합을 따라잡은 그의 손이 옥합을 쥐려는 찰나였
하후극과 공야선표의 공격을 피한 동령 영주의 일지(一指)가 재차 옥합에 격중되었다.
순간, 옥합에 다시 엄지손톱만한 구멍이 나며 잘게 균열(龜裂)이 일더니 기어이 공중에서 산산조각났다.
빠직`─
분해된 옥합 속에서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열쇠 하나가 쑥 빠져 나왔다.
중요한 물건이란 게 고작 열쇠?
혁무빙의 서늘한 동공(瞳孔)으로 뜻밖이라는 빛이 스쳐 지나는 것도 잠시, 그는 몸을 쭈욱 뽑아 올리며 저만치에서 떨어져 내리는 열쇠를 쫓아갔다.
열쇠가 지척으로 다가온 순간, 어디선가 으스스한 바람이 불며 혁무빙의 전신으로 강한 살기가 감겨들었다.
몸을 쇠밧줄로 옭아매는 듯한 강렬한 기운에 혁무빙의 몸이 잠깐 멈칫하는 사이, 열쇠는
벌써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
쨍그랑!
열쇠가 흙바닥에 박힌 조약돌에 부딪히며 위로 조금 튕겨 올랐다가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투둑!
열쇠가 나무 둥치 아래에 얌전히 내려서며 내는 소리에 장내의 모든 것이 일순간 숨을 멈췄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던 하후극, 공야선표, 동령 영주는 물론이고 암중의 인물과 기를 겨루던
혁무빙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이 철렁하기는 혁무빙의 발길을 묶어 둔 암중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영주! 뭐 하고 계시오?”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사이로운 음성이 긴장으로 바짝 굳어 있는 동령 영주를 질책했다.
동령 영주의 눈빛이 서늘함을 되찾았다.
빛살처럼 몸을 날리는 동령 영주의 뒤를 하후극과 공야선표가 황망히 따라붙었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의 손이 나무 뒤에서 나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는 열쇠를 향해 곧바로 다가갔다.
동령 영주는 눈빛을 초조하게 빛내며 이제까지의 중성적인 음성 대신 맑지만 다급함을 드러내는 앙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멈춰라!”
순간, 허공에 뜬 상태로 정지하고 있던 혁무빙의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성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몽…… 뇌산?”
< 제1권 출도지로편 끝 >
18화. 제8장 - 습격(襲擊) 2
다시 나무 위에 내려선 몽뇌산은 향천의 흙탕물 주위 곳곳에 널브러진 흑의인들의 시체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모두 칠공에서 검은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볼 것도 없이 진천독기를 들이마신 결과였다.
적이지만 과히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몽뇌산은 한숨을 쉬며 목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교 위의 상황도 거의 끝을 맞고 있었다.
누구도 하후극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까 몽뇌산의 독공에 정면으로 부딪히고도 모자라 하후극의 검까지 맞닥뜨려야 했던 복면인은 이미 바닥에 몸을 눕힌 지 오래였다.
남은 적들 몇 명을 매섭게 몰아붙이고 있는 하후극의 기세는 가공(可恐), 그 자체였다.
그때, 마을로 향하는 목교 건너 공지(空地) 왼쪽에 자리한 작은 숲에서 몇 개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족히 사오 장은 될 듯한 거리를 순식간에 날아든 흑의복면인들은 목교 위에
날아내리자마자 하후극을 향해 몰려들었
하후극의 눈빛은 그들이 나타나는 순간, 딱딱하게 굳어들고 있었다.
‘적의 원군(援軍)이 나타나다니…… 그럼 공야(公冶) 선배(先輩)께서 당하셨단 말인가? 그럴 리가!’
하후극은 입술을 한 일 자로 꽉 다물었다.
좀 전까지 여유있던 상황은 다시 급박하게 흐르고 있었다.
하후극은 도를 놓친 적의복면인을 가차없이 베어 넘기며 피범벅이 되어 무너져 내리는 그의 몸을 뛰어넘어 방금 나타난 흑의복면인들을 검으로 휩쓸어 갔다.
그의 검에서는 무려 좀 전의 두 배인 넉 자에 가까운 백색 검기가 치솟으며 서릿발 같은 기운을 뿜어 냈다.
나뭇가지를 딛고 서서 구경만 하고 있는 몽뇌산의 모습이 답답했으나 우선은 한시바삐 적을 물리치고 이곳을
빠져 나가야만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몽뇌산이 지니고 있는 옥합을 지켜야 한
하후극은 차가운 눈으로 적의 움직임을 쫓으며 좌우에서 공격해 오는 두 명의 흑의인들의 공격을 피해 몸을
틀어 그들의 가슴을 검으로 꼬치처럼 꿰뚫었다.
그그극!
뼈가 검에 걸리는 선뜻한 느낌과 함께 흑의인들의 몸이 공중에 핏방울을 튀기며 쓰러졌다.
순간, 새로 나타난 적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흑의복면인이 요사(妖邪)한 빛을 뿌리는 적도(赤刀)를 휘두르며
수하들의 시신을 발로 걷어차올렸다.
하후극은 자유로운 왼손으로 시야를 가리는 시신을 밀어 내며 검을 가슴 앞에 곧추세워 전신을 방비했다.
유부(幽府)의 호곡 소리를 방불케 하는 살 떨리는 음향이 일며 사이롭고 음유(陰柔)한 기운이 엄습해 왔다.
적도에서 나온 음습한 도기가 거미줄처럼 전신을 휘감아 오자 하후극은 웅웅거리며
싸늘한 백광(白光)을 토해 내던 검을 비스듬히 쳐들며 붉은 도광(刀光) 속으로 뛰어들었다.
몽뇌산은 붉고 하얀 도기와 검기가 회오리 같은 바람을 일으키며 얽혀드는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대단한 고수였군!”
그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그의 능력은 상상 밖이로군. 대단한 사람을 호법(護法)으로 두었어!”
바로 곁에서 말하는 듯 선명한 목소리에 몽뇌산은 흠칫 놀라 휙 돌아섰다.
삼 장쯤 떨어진 시내〔川〕 반대편의 나무 위에 헐렁한 갈색 장포를 입고 동색(銅色)
면구(面具)를 쓴 왜소한 체격의 인물이 소리없이 나타나 서 있었다.
굳어 있던 몽뇌산의 눈빛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당신은 누군가?”
“그대에게서 한 가지 물건을 찾아가기 위해 온 사람이라고 해두지.”
동색 면구 밖으로 보이는 두 눈이 차갑게 번쩍였다.
몽뇌산은 남녀를 짐작할 수 없는 그의 중성적인 목소리를 들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물건? 아니, 그보다 그가 나의 호법이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모르는 척 내게 묻는 건가? 보기보다 교활하군! 다른 호법 한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나? 그는
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순순히 옥합을 내놓아라!”
몽뇌산은 갈의면구인의 음랭(陰冷)한 외침을 들으며 점점 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다른 호법?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하하하하!”
갈의면구인은 길게 웃어 젖혔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그의 웃음 소리가
기이하게 울려 퍼지자 주변에 있는 나무들의 잔가지가 뚝뚝 부러져 나갔다.
몽뇌산은 얼른 공력을 끌어올려 심맥(心脈)을 보호하며 그를 가만히 쏘아보았다.
갈의면구인의 웃음이 딱 멈춰졌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용만 당하고 있는 거란 얘긴데…… 좋아! 알든 모르든 상관없는 일이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갈의면구인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어둠의 장막(帳幕)이 일렁거리듯 헐렁한 장포 자락을 펄럭거리며 그의 신형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삼 장을
미끄러져 몽뇌산의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내놓아라!”
몽뇌산은 다른 가지 위로 훌쩍 물러나며 만청독수의 제사수 독영만리를 운용하여 우수를 뻗어 빠르게 흔들었다.
장심(掌心)에서 푸른 기운이 솟아오르며 허공에 푸르스름한 꽃비〔花雨〕를 뿌리기 시작했다.
푸른 빛을 내는 꽃비에 스친 나뭇가지들이 남빛으로 물들었다.
“네 독공 따윈 본좌에게 어림도 없다!”
갈의면구인은 냉랭히 코웃음을 치더니 호흡을 멈춘 상태에서 얼룩덜룩하게 번들거리는 검은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밀려오는 장세를 단숨에 후려쳤다.
그가 낀 가죽장갑은 독에 대해 특별한 묘용(妙用)이 있는 듯, 정면으로 독기에 맞서 가는
그의 눈빛에선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산산이 흩어지는 푸른 장영 사이로 갈의면구인이 유령처럼 다가섰다.
‘호흡을 멈췄다고는 하나 전혀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건, 그럼……? 그렇군! 피독단이로군……’
바쁘게 염두를 굴리는 와중에서도 몽뇌산은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앞으로 끌어당겼다가 재빨리 손을 놓으며
몸을 솟구쳐 더 위쪽의 가지로 올라섰다.
그의 손을 벗어난 나뭇가지가 휘청거리며 채찍처럼 갈의면구인을 휘감아 몰아쳤다.
갈의면구인의 몸이 옆으로 주욱 미끄러지며 손가락을 꼿꼿이 펴서 나뭇가지 중간을 내리쳤다.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가 맥없이 부러져 나갔다.
몽뇌산은 거칠 것 없이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갈의면구인의 위세(威勢)에 내심 바짝 긴장했다.
속에서 많은 의문이 샘솟고 있었지만 일단은 가슴에 묻어 두고 적을 물리치는 것이 먼저였다.
귀신 같은 신법으로 성큼 다가선 갈의면구인이 검은 손으로 가슴팍을 움켜쥐어 오자
몽뇌산은 상체를 뒤로 젖힌 채 환운주(幻雲走)의 신법을 써서 나뭇가지를 따라 옆으로 미끄러지며 몸을 틀었다.
몽뇌산이 미꾸라지처럼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자 갈의면구인의 눈동자에 짤막한 이채가 떠올랐다.
“도망가는 실력이 제법이구나! 하나 언제까지 피할 수 있나 보자!”
갈의면구인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우수로는 여전히 몽뇌산의 가슴팍을 노려 옴과 동시에 좌수로는 그의 하반신을 노렸다.
검은 손 그림자가 번뜩이며 밀어닥치자 몽뇌산은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발끝에 힘을 주었다.
그가 누르는 힘을 못 견디고 나뭇가지가 휘청 아래로 늘어졌다.
순식간에 목표가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자 갈의면구인의 눈동자에 서늘한 광채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가지의 반동(反動)을 이용해 내려갈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솟구쳐 오른 몽뇌산은 양손으로 위쪽의 가지를 잡으며 허공을 한 바퀴 돌아 지면으로 날아내렸다.
목교 건너에 펼쳐진 공지 위로 사뿐히 내려서는 순간, 얼음송곳처럼 차갑고 예리한 기운이
살벌(殺伐)하게 휘몰아쳐 왔다.
쌔애애액`─`!
대기를 밀어 내며 가슴 한가운데로 날아드는 지력(指力)을 대하고 몽뇌산은 기겁을 했다.
“빠르구나!”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오른쪽으로 물러섬과 동시에 왼쪽 어깨를 뒤로 틀었다.
찌익`─`
간발의 차이로 지력이 빗나가며 길게 찢겨 나간 어깨 부분의 옷 사이로 붉은 혈흔이 생겼다.
“제기랄!”
자세를 가다듬을 새도 없이 어느새 지면에 내려선 갈의면구인의 공격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몽뇌산은 검은 빛을 토하며 쇄도하는 갈의면구인의 장력을 향해 똑바로 몸을 세웠다.
그의 쌍수가 지루하도록 천천히 들리는가 싶더니 만청독수의 제오수인 독영파천(毒影破天)이 허공에 푸른 불을 뿜었다.
쿠구구구!
눈이 시릴 정도로 투명한 빛을 뿌리는 청색 장영과 음산한 검은 장영이 정면으로 충돌을 일으켰다.
콰아앙`─`!
흙먼지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억눌린 듯한 신음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으음!”
동시에 재차 거친 음성이 먼지 사이를 뚫고 또렷하게 들렸다.
“재수에 옴 붙은 날이군.”
서서히 가라앉는 먼지 사이로 몽뇌산과 갈의면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제자리에 우뚝 서 있는 갈의면구인과는 달리, 몽뇌산은 일 장이 넘게 주르르 밀려가 가슴을 주무르며
오만가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
비록 갈의면구인보다 늦게 발동했다고는 하지만 입가에 살짝 엿보이는 혈흔이 이번 일전에서 그가 손해를 보았음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도대체 무슨 여자가……?”
그 순간, 몸을 바로 펴지 못하는 몽뇌산에게 천천히 다가들던 갈의면구인의 신형이 움찔하며 멈춰 섰다.
몽뇌산은 조금씩 몸을 바로 세우며 갈의면구인을 힐끔 쳐다보았다.
딱딱하게 굳어진 눈빛에서 몽뇌산은 미미한 떨림을 발견하곤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좀 전의 격돌에서 바람 때문에 몸에 달라붙은 갈의장포 위로 명확히 드러나는 가슴의 윤곽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스무 살이 넘도록 산에서만 주로 생활해 온 그였지만 남녀의 차이도 모를 정도로 무지하진 않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몽뇌산이 자세를 바로하는 사이 갈의면구인의 눈빛은 금세 본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욱 무심하게 빛나는 그 눈동자에서 그, 아니 그녀의 마음을 읽어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목교 위의 상황을 힐끔 살핀 갈의면구인, 동령 영주의 눈에서 단호한 빛이 떠올랐다.
‘저자가 살영대주를 죽이고 이쪽에 가세하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한다!’
“본래, 물건만 가져 가려 했으나, 네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
동령 영주는 점차 패색(敗色)이 짙어지고 있는 살영대주로부터 차갑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에서 검을 풀어 냈다.
“잠깐! 피차 손으로 싸우다가 이제 와서 무기를 꺼내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막 검을 뽑아 들던 동령 영주의 손이 멈칫했다.
다음 순간, 자신이 그의 말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不定)하기라도 하듯, 동령 영주는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검을 뽑아 들며 벼락같이 몸을 날렸다.
몽뇌산은 동령 영주의 심기를 흩뜨려 놓으려고 던진 말이 별 효과를 보지 못하자 신중한 눈빛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가슴 앞에 모인 그의 두 손에서 물빛처럼 연한 청색 기운이 소리없이 피어올랐다.
그러더니 이내 그 기운은 천천히 손 주위를 회전하며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실 타래를 말아 놓은 듯 둥글게 뭉친 그 기운에서 사방을 진동시키는 기이한 떨림이 흘러나왔다.
우우우웅`─`
그 광경에 동령 영주의 눈빛이 한층 매서워지며 그녀의 검세가 일변했다.
다섯 자 가까이 되는 검기가 검극(劍極)에서 쭈욱 뻗어 나오며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였다.
콰아아`─`!
검은 광채를 피워올리는 검기가 꿈틀대며 요동을 쳤다.
다음 순간, 동령 영주의 손목이 살짝 틀어지며 검기가 폭포수처럼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몽뇌산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몰려오는 그 검세에 내심 진저리를 치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손이 무겁게 앞으로 내밀어지며 투명한 하늘빛 구체가 느릿하게 앞으로 밀려갔다.
몽뇌산이 진천독경을 통해 오 년간 쌓여 응집된 독기의 구체와 동령 영주의 막강한 검기가 충돌을 일으켰다.
독기를 품고 있는 하늘빛 구체, 독정(毒精) 한가운데로 검은 빛이 스며들었다.
수박이 갈라지듯 반으로 쪼개져 허공에 산산이 흩어지는 구체를 보며 몽뇌산은 최대한 뒤로 물러섰다.
독정을 회수하기 무섭게 검기가 지척으로 쭈욱 다가들었.
검기 사이로 동령 영주의 번쩍거리는 면구가 발하는 금속성 빛이 눈에 들어온다 싶은 순간,
“으윽!”
고통에 찬 신음성과 함께 몽뇌산의 신형이 뒤로 튕겨졌다.
쩌억 갈라진 가슴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때, 너풀거리는 그의 옷자락 사이로 무언가가 툭 떨어져 내렸다.
바람에 날리는 종이인형처럼 뒤로 날아가는 그의 몸에서 튀어오른 그 물체가 검세의 여파를 타고
소용돌이치는 대기에 휘말려 올라갔다.
“안 돼!”
막 적도(赤刀)를 부수고 흑의복면인을 베어 넘긴 하후극이 그 광경에 대경(大驚) 실색(失色)하여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공지 좌측에 있는 숲속으로 나가떨어진 몽뇌산은 이미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하후극이 엄청난 속도로 한달음에 다리를 건너며 동령 영주에게 일검을 날렸다.
그의 검세를 가볍게 물리치며 동령 영주가 왼손으로 그 물건을 낚아채 갔다.
물건이 빨려 들어가듯 동령 영주의 손으로 들어오려는 찰나, 그녀의 좌측에서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 팔을 노리고 침습해 왔다.
‘고수다!’
난데없이 훼방꾼이 나타나자 동령 영주의 눈동자에서 지독히도 차가운 빛이 솟구쳤다.
속으로 분노에 찬 침음성(沈吟聲)을 삭이며 손을 거둔 그녀가 검기를 피해 뒤로 주욱 물러서며 외쳤다.
“누구냐?”
* * *
혁무빙은 옆에서 빠르게 달리고 있는 갈의노인을 힐끔 바라보았다.
대략 육십 줄에 들어서 보이는 갈의노인은 옷 여기저기에 피가 점점이 묻어 있어 얼른 보기에도 난전(亂戰)을 치른 사람 같았다.
“너무 늦지 않았을까?”
혁무빙은 희미하게 걱정이 묻어나는 갈의노인의 음성을 들으며 무심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공야 선배! 사형께서는 그리 쉽게 당하실 분이 아닙니다.”
“그래도 그 영주란 자가 그들을 찾아간 지 꽤 오래 되었는데…… 무슨 일이 없으면 좋으련만…… 자네에게
대강 얘기했듯이 그 물건은 절대 빼앗겨서는 아니 되네.”
갈의노인, 공야선표(公冶禪)는 혁무빙의 무표정한 얼굴을 초조한 얼굴로 바라보더니 곧 속도를 배가(倍加)시켰다.
아! 그런데 공야선표라면……?
이십 년 전 강호에서 사라진 그가 오늘날에 이르러 이 한적한 관도에 모습을 다시 나타내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당시 공야선표는 한 자루 섭선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정교함과 쾌속함을 장기로 삼는 선법과 표홀함이 돋보이는 신법으로 강호를 거칠 것 없이 누비고 다녔었
불의를 참지 못하고 협을 실천하기를 꺼리지 않으니 사람들은 그런 그를 가리켜 선풍은협(扇風隱俠)이라고 했다.
이제 불현듯 다시 나타나 호젓한 관도를 달려나가는 그의 신법은 여전히 지난날의 무위를 보여 주고 있었다.
빛살을 방불케 하는 속도로 관도를 한 식경 가량 치달린 그들의 앞쪽에서 아련하게 싸움 소리가 들려 왔다.
공야선표의 눈동자에서 강렬한 안광이 일며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공야선표가 막 다산현의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 찰나, 혁무빙의 신형이 그의 곁을 쏜살같이 스쳐 가며 이쪽에서 저쪽까지, 폭이 족히 삼 장은 될
듯한 시내를 단숨에 훌쩍 뛰어넘었다.
흠칫 놀라던 공야선표도 이내 속력을 배가시켜 뒤를 쫓았다.
공야선표가 동령 영주의 일검에 밀려 뒤로 물러서는 하후극에게로 화급히 다가서는 순간, 분노에 찬 날카로운 음성이 앞에서 터져 나왔다.
“누구냐?”
목교 건너의 공터에 내려선 공야선표의 눈으로 웬 옥합 하나를 잡아 가는 혁무빙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 안도감이 퍼져 갔다.
그런데 혁무빙이 옥합을 막 손에 넣으려는 순간, 그의 검을 피해 옆으로 물러났던
동령 영주가 옥합을 향해 지력을 날렸다.
따앙!
금속성과 함께 지력에 의해 이 장쯤 밀려 날아가던 옥합의 뚜껑이 작은 균열(龜裂)을 일으키며 살짝 틀어졌다.
옥합을 따라 눈부신 속도로 몸을 날리는 혁무빙 앞으로 동령 영주가 나타났다.
“두 분! 뭣 하고 계시는 겁니까?”
동령 영주를 향해 재차 검을 뿌리며 혁무빙은 싸늘한 외침을 발했다.
동시에 이제껏 넋을 놓고 있던 하후극과 공야선표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서둘러 동령 영주를 막아 섰다.
두 사람으로 인해 동령 영주의 발길이 주춤하자 혁무빙은 한데 얽혀 싸움을 시작한 그들의
머리 위를 대붕(大鵬)처럼 단숨에 뛰어넘었다.
대번에 옥합을 따라잡은 그의 손이 옥합을 쥐려는 찰나였
하후극과 공야선표의 공격을 피한 동령 영주의 일지(一指)가 재차 옥합에 격중되었다.
순간, 옥합에 다시 엄지손톱만한 구멍이 나며 잘게 균열(龜裂)이 일더니 기어이 공중에서 산산조각났다.
빠직`─
분해된 옥합 속에서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열쇠 하나가 쑥 빠져 나왔다.
중요한 물건이란 게 고작 열쇠?
혁무빙의 서늘한 동공(瞳孔)으로 뜻밖이라는 빛이 스쳐 지나는 것도 잠시, 그는 몸을 쭈욱 뽑아 올리며 저만치에서 떨어져 내리는 열쇠를 쫓아갔다.
열쇠가 지척으로 다가온 순간, 어디선가 으스스한 바람이 불며 혁무빙의 전신으로 강한 살기가 감겨들었다.
몸을 쇠밧줄로 옭아매는 듯한 강렬한 기운에 혁무빙의 몸이 잠깐 멈칫하는 사이, 열쇠는
벌써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
쨍그랑!
열쇠가 흙바닥에 박힌 조약돌에 부딪히며 위로 조금 튕겨 올랐다가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투둑!
열쇠가 나무 둥치 아래에 얌전히 내려서며 내는 소리에 장내의 모든 것이 일순간 숨을 멈췄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던 하후극, 공야선표, 동령 영주는 물론이고 암중의 인물과 기를 겨루던
혁무빙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이 철렁하기는 혁무빙의 발길을 묶어 둔 암중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영주! 뭐 하고 계시오?”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사이로운 음성이 긴장으로 바짝 굳어 있는 동령 영주를 질책했다.
동령 영주의 눈빛이 서늘함을 되찾았다.
빛살처럼 몸을 날리는 동령 영주의 뒤를 하후극과 공야선표가 황망히 따라붙었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의 손이 나무 뒤에서 나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는 열쇠를 향해 곧바로 다가갔다.
동령 영주는 눈빛을 초조하게 빛내며 이제까지의 중성적인 음성 대신 맑지만 다급함을 드러내는 앙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멈춰라!”
순간, 허공에 뜬 상태로 정지하고 있던 혁무빙의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성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몽…… 뇌산?”
< 제1권 출도지로편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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