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제9장 - 부상(負傷) 1
독로무한
19화. 제9장 - 부상(負傷) 1
몽뇌산은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손에 단단히 쥐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장내에 있는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급박하게 돌아가던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주위의 공기는 급속도로 식어 갔다.
그 열쇠, 그리고 필시 죽거나 아니면 회생 불능의 상처를 입었으리라 여겼던 몽뇌산의 존재가 중인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내리눌렀다.
“자네……?”
하후극이 신음하듯 몽뇌산을 불렀다.
가슴에 선혈이 낭자한 몽뇌산의 모습을 바라보는 하후극의 눈에는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무엇도 열쇠의 중요성에는 견줄 수가 없으니……!
하후극은 몽뇌산을 향해 몇 번이나 입을 열려다가 결국은 그냥 물러나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몽뇌산은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석상처럼 서서 열쇠만 만지작거렸다.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어느새 지혈을 했는지 더 이상 피가 쏟아지진 않았지만 베어진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상처는 보기에도 끔찍할 정도였다.
몽뇌산의 창백한 얼굴이 그 상처가 피륙의 손상만으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내외상으로 인한 고통이 상당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몽뇌산의 표정은 종잡을 수 없으리만치 무덤덤했다.
입가에 늘상 감돌던 장난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영주! 임무를 잊으셨소?”
한 줄기 음산한 전음성(傳音聲)이 멍한 머릿속을 일깨움과 동시에 동령 영주의 눈빛이 다시 차갑게 빛을 발했다.
이어 그녀의 손에서 검광이 폭출했다.
그녀의 좌우에 있던 공야선표와 하후극이 기습적인 일검을 피하며 분분히 뒤로 물러서는 사이, 동령
영주는 장포를 휘날리며 순식간에 몽뇌산의 지척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상황을 변화시킨 그녀의 기세는 가히 만부막적(萬不莫敵)!
“서라!”
공야선표의 뒤늦은 고함이 장내를 흔들었다.
그러나 이미 선기(先氣)를 잡아 먼저 움직이고 있는 그녀를 막아설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아무 방비 없이 서 있는 몽뇌산을 향해 동령 영주의 싸늘한 외침이 비수처럼 날아갔다.
“손을 놓아라!”
스스스스`─`!
그것은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혁무빙은 허공에 몸을 고정시킨 채 자신을 붙들어맨 상대의 기(氣)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암경(暗勁)이 한층 거센 압력으로 몸을 눌러 오자 그는 공력을 배가시켰다.
나이답지 않게 절륜한 그의 공력과 정력에 놀랐음인지 거세게 밀고 들어오던 경기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상대의 뜻이 자신의 발을 묶어 놓자는 데 있는 것을 안 이상 필요 이상으로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혁무빙은 암중인과 미묘한 대치 상태를 유지하며 다시금 정신없이 돌아가는 장내의 상황을 한성(寒星) 같은 눈으로 주시했다.
갈색 장포를 펄럭이며 대붕처럼 몽뇌산을 덮쳐 가는 동령 영주의 모습이 눈에 잡힌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가공할 위세로 덮쳐 내리고 있는 동령 영주를 보면서도 몽뇌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상처가 심하여 움직일 수 없음인가, 아니면……?’
혁무빙은 이 짧은 대치 상태를 끝낼 순간이 왔음을 알아차렸
한데 암중인의 생각도 일치했음인가?
그의 손이 보는 이가 답답할 정도로 느릿하게 들리는 순간, 갑자기 거대한 힘이 사방에서 그의 몸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퍽, 퍽!
주변의 흙이 삽질당하듯이 패어 올랐다.
혁무빙의 주변은 삽시간에 돌풍이라도 몰아친 듯 아수라장으로 화했다.
앞쪽에 서 있던 공야선표 등이 놀란 눈으로 이편을 돌아보는 게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웅`─`!
심금을 떨어 울리는 소리가 천지를 메웠다.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혁무빙 주위를 무서운 속도로 맴돌던 흙먼지 사이로 눈부신 빛줄기가 솟구쳤다.
똑바로 마주볼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그래서 더 무서운 은빛 광채.
검은 그렇게 하늘을 갈랐다.
동령 영주의 외침은 땅이 들썩거릴 정도로 우렁차지도, 그렇다고 귀가 따가울 정도로 날카롭지도 않았다.
그러나 귓전에 선명하게 와 닿는 싸늘한 음성이 뜻하는 바는 몽뇌산의 머릿속에 정확히 전달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몽뇌산은 서 있기만 했다.
신지(神智)가 사라지고 육신이 마비된 사람처럼, 그냥 그렇게 서 있기만 했다.
아니, 한 가지 작은 변화가 있기는 있었다.
열쇠를 들고 있던 몽뇌산의 손이 아주 약간 움직인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손을 놓으려는 것일까?
아니었다.
몽뇌산의 손끝엔 이 순간 희미한 청광이 맺히고 있었다.
“당신과 나, 둘 중에 누가 더 빠를까……?”
불쑥 내뱉어진 몽뇌산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그러나 그 시기는 매우 적절했다.
그 순간, 막 발검(發劍)의 자세를 취하던 동령 영주의 눈동자가 크게 치떠졌다.
“아, 안 돼`─`!”
비명과 같은 고함이 터졌다. 그러나 소리의 임자는 동령 영주가 아니라 공야선표였다. 그의 안색은 숨넘어가는 사람처럼 파랗게 질려 있었다.
몽뇌산의 손끝에 맺힌 요요로운 청광!
그가 독문 출신이라는 것은 비밀도 아닌 터,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것이 독기임은 감히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발검을 포기한 동령 영주의 서늘한 눈빛이 몽뇌산의 얼굴을 직시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몽뇌산의 시선이 아주 잠깐이지만 조급한 심정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와 얽혀들었다.
“내게 이건 그냥 열쇠에 지나지 않지. 어떤 사람에겐 황금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가끔은 황금을 돌같이 보는 사람도 있는 법이거든.”
두말할 것도 없이 상황에 따라서 충분히 없애 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동령 영주의 복면이 바람도 없는데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얼어붙은 눈동자가 몽뇌산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예리하게 번뜩거렸다.
모두의 시선이 몽뇌산에게 쏠린 채 기이한 대치 상태가 이어졌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장내의 상황을 깨는 것은 뜻밖의 곳에서 일어났다.
장내의 공기가 갑작스레 뒤로 일제히 빨려드는가 싶더니 눈부신 빛이 솟구쳐
오르며 천지를 들썩이는 굉량(宏量)한 폭음(爆音)이 일었다.
콰과과광`─`!
강한 흙먼지가 장내를 한차례 휩쓸며 지나는 순간, 두 종류의 소리가 다시 허공을 갈랐다.
카앙`─`!
퍼어엉!
점차 가라앉고 있는 먼지 사이로 일보 후퇴하는 동령 영주와 그녀의 좌우에 자리를
바꾸어 갈라서 있는 공야선표, 하후극의 모습이 보였다.
중인들의 시선이 다른 데 쏠린 틈을 타서 몽뇌산에게 접근하려던 시도가 무위로 끝나자 동령 영주는 한 발 물러나며 시선을 힐끔 뒤로 향했다.
그곳에선 좀 전의 엄청난 충돌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혁무빙, 그리고 그로부터 삼 장 가량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낯선 백의노인.
백의노인의 인상은 얼굴을 대하자마자 북풍한설(北風寒雪)이란 말을 절로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차디찼다.
날카롭게 뻗은 하얀 눈썹과 깎아지른 듯 찬 기운이 도는 이마, 젊은 시절 한번 부러진 적이 있었던 듯 끝이 휜 매부리코에 핏기없는 얄팍한 입술은 그의 냉혹하고 잔인한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어 차가운 겨울바람조차 그를 비켜 갈 것처럼 보였다.
동령 영주, 몽뇌산을 지나 혁무빙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시선에서 백의노인이 누군지 짐작해 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구유수라마검(九幽修羅魔劍)! 어린 녀석이 제법이구나! 오백 년 전 검마의
구유수라마검이라면 노부의 유명빙백장(幽冥氷魄掌)을 받아 낼 자격이 있다 할 수 있지.”
백의노인의 종잇장같이 엷은 입술 사이를 비집고 음랭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가슴 앞에 검을 곧추세운 채 우뚝 서 있는 혁무빙에게선 아무런 대꾸도 나오질 않았다.
그사이 백의노인은 할말을 다 마친 듯, 벌써 몽뇌산과 대치하고 선 동령 영주에게로 돌아서 있었다.
지독히도 거만한 태도였다.
“영주! 그는 절대로 열쇠를 어쩌지 못하오. 그 열쇠가 필요한 건 우리뿐만이 아니오. 열쇠를 없애고 나면 아마 우리보다 회(會)에서 먼저 그를 죽이려들걸?”
“그렇구나! 그대가 바로 동령 영주였군.”
몽뇌산은 부지불식간에 나직한 부르짖음을 토하는 공야선표를 흘끗 바라보며 짧게 물었다.
“회란 게 뭐죠?”
공야선표의 눈빛이 난처하게 빛났다.
“오호!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른 채 말려든 거로구먼.”
“무슨 소리를 하려는……?”
몽뇌산은 발끈해서 소리치는 공야선표를 손짓으로 막으며 백의노인을 냉담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게 뭔지는 차차 알게 되겠지. 하여간 재미있군!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이걸 없애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단 말이지. 내가 이걸 없앤 다음에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어디 볼까?”
몽뇌산은 한 점의 허세(虛勢)도 들어 있지 않은 얼굴로 열쇠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몽뇌산의 손에서 파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백의노인은 설마 그가 그런 대담한 행동을 할 줄은 몰랐던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잠깐! 그 열쇠가 왜 필요한지 알고 싶지 않은가?”
백의노인의 벼락같은 외침은 그만한 효과가 있었다.
백의노인은 몽뇌산이 손에서 공력을 거둠과 동시에 보일 듯 말 듯 안도의 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얼음장 같은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이 잠깐 사이 그가 얼마나 간을 졸였나 보여 주었다.
몽뇌산의 눈길이 백의노인을 직시하자, 백의노인은 특유의 냉랭한 목소리로 얘기를 시작했다.
“그 열쇠는 사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필요한 수단에 지나지 않지.”
“당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 뭐요?”
질문을 던지는 몽뇌산의 시선을 외면하며 백의노인은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입에서 불쑥 엉뚱한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래된 무덤이 하나 있지. 그것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을 내 마지않는! 이유가 뭔지 아는가?”
몽뇌산은 고개를 흔들지도 끄덕이지도 않은 채 노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백의노인은 입을 굳게 다물고는 하늘을 한번 스윽 올려다보았다. 뜸을 들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백의노인이 다시 입을 열려 할 때, 불쑥 튀어나온 몽뇌산의 음성이 노인의 입을 다물게 했다.
“시간을 끌려는 방법치곤 좀 유치하지 않은가?”
깜짝 놀란 공야선표와 하후극이 바짝 긴장을 돋우는 순간, 흠칫했던 눈빛이 풀어지며 백의노인의 얄팍한 입술 사이로 웃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후후후! 보기완 달리 꽤 영리하구나, 어린 놈! 그러나 너무 늦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허공을 날아 몽뇌산을 덮쳐 가면서 터져 나왔다.
백의노인이 몸을 날림과 동시에 혁무빙의 신형도 날아올랐다.
주인과 똑같이 서늘한 기운을 피워올리는 그의 은검이 백의노인의 앞길을 막아 섰다.
곧 이어 혁무빙이 그답지 않게 큰 소리로 몽뇌산을 향해 소리쳤다.
“뒤를 조심해`─`!”
하후극과 공야선표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서둘러 몽뇌산에게 다가섰으나 이미 일은 벌어지고 있었다.
몽뇌산의 뒤에서 불쑥 솟아난 검은 그림자가 그를 뒤덮는 순
퍼어엉`─`!
“우욱`─`!”
누가 밀친 듯 앞으로 확 고꾸라지는 몽뇌산의 입에서 핏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면서 피비린내가 화악 퍼졌다.
뒤에서 유령처럼 솟구친 흑영이 그의 머리를 타넘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바닥에 발이 닿지도 않은 상태에서 흑영의 몸이 휙 돌아서더니 앞으로 엎어지는 몽뇌산의 가슴을 발로 걷어차 올리며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열쇠를 간단히 낚아챘다.
흑영의 움직임은 처음부터 끝까지 군더더기 하나 없이 빠르고 냉혹했다.
혁무빙의 경고가 들리고 나서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돌아갑시다`─`!”
흑영이 열쇠를 손에 넣자마자, 끝을 보려는 듯 혁무빙과 거세게 맞붙어 있던 백의노인이 한소리 외침과 함께 몸을 솟구쳐
올렸다.
“마음대로 갈 수 있을 것 같은가?”
혁무빙의 서늘한 음성이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순간,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살기를 가득 담은 채 몸을 옆으로 비튼 백의노인의 손에서 파천(破天)의 위력이
담긴 장력이 쏟아져 나왔다.
혁무빙은 얼음가루같이 음랭한 장세 속으로 망설임없이 뛰어들며 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눈부신 은광이 다섯 자나 치솟았다.
좀 전의 격돌에 이어 두 번째 펼치는 검강이었다.
카가가가`─`!
그의 검이 바다를 가르듯 장세를 수직으로 끊어 내며 앞으로 쭈욱 뻗었다.
무인지경을 가듯 그대로 밀어닥치는 검세가 느껴지자, 백의노인은 흠칫하며 서둘러 돌아섰다.
“이런! 갈(喝)`─`!”
그에게서 터져 나온 다급한 외침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콰아앙`─`!
천지를 뒤집어 놓을 듯한 엄청난 폭음이 울렸다.
그 사이로 폭음을 뒤쫓아 윽! 하는 외마디 비명이 울리고, 곧 이어 펑,`하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냄새를 뿜어
내는 흑연(黑煙)이 장내에 자욱이 깔렸다.
흑연 속에서 날카로운 호통 소리와 경호성(驚呼聲)이 잇달아 터지며 몇 번의 충돌음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장내를 가득 메웠던 흑연이 바람에 밀려 흩어지고 나자 허탈함과 침통함으로
일그러진 공야선표와 하후극의 모습이 보였다.
검을 늘어뜨리고 눈을 반쯤 내리깐 채 서 있는 혁무빙 앞으로 보이는 끊어진 팔 하나만이 좀 전에 있었던 격돌의 흉험(凶險)함을 말해 주고 있을 뿐, 적들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
“으음`─`!”
혁무빙은 백의 조각을 걸친 채 아직도 꿈틀거리며 피를 쏟아 내고 있는 그 팔을 표정없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신음 소리가
난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 몽뇌산이 있었다.
걸레 조각처럼 바닥에 처박혀 있는 몽뇌산 곁으로 다가간 그는 천천히 몽뇌산의 몸을 바로 뉘었다.
그가 몽뇌산의 혈도를 막아 지혈을 하고 기를 불어넣어 혈맥을 보호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을 때, 겨우 정신을 수습한 하후극이 조용히 그들에게 다가왔다.
오는 길에 발을 멈춰 매끈하게 잘려 나간 팔의 단면을 유심히 살펴본 그는 이내 몽뇌산의 곁에 다가와 쭈그리고 앉았다.
하후극은 아직도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얼굴로 서 있는 공야선표를 한 번 힐끔 쳐다보더니 상세를 물어 왔다.
“어떠냐?”
“아무래도 의원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하후극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무겁게 감겨 있던 몽뇌산의 눈꺼풀이 힘겹게 들어올려지며 희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열, 허억…… 열쇠는……?”
하후극은 아무 말 없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오는 가운데 몽뇌산의 입에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웃음이었다.
“후후, 멍청한! 물…… 건의 지, 진위(眞僞)도 모르는……!”
몽뇌산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감겼다.
얼어붙은 얼굴로 의식 잃은 몽뇌산을 내려다보는 하후극의 어깨 너머로 공야선표가 머리카락에 불이 붙도록 바람을 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 * *
성심당(聖心堂)!
황주부 황주성(黃州城)에서 가장 알아주는 이름 하면 뭐니뭐니 해도 성심당이란 이름 석 자였다.
성심당이 뭐 하는 곳인가 하면 그 입구에 걸린 다음과 같은 문구(文句)에서 알 수 있다.
<성심치료하시하인(誠心治療何時何人)>
풀어서 얘기하면 어떤 시간, 어떤 신분의 사람을 막론하고 항상 성심을 다해 치료해 준다는 내용이다.
즉, 성심당은 의원(醫院)이었다.
다만 보통 의원이 아니라 호북성주가 친히 현판을 하사(下賜)했고 호북제일명의(湖北第一名醫)가 있다고 소문난, 명망있는
곳이었다.
호북제일명의 성심수(聖心手) 민하륜(閔崙)!
민하륜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강호에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민하륜이 강호상에서 그처럼 유명한 이유는 그의 의술이 고절(高絶)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상은 그가 수학(受學)한 곳의 명성이 워낙 높기 때문이었다.
그가 수학한 곳이 어디냐 하는 얘기를 하려면 그에 앞서 당금 강호를 주름잡는 문파들에 대한 얘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당금 천하는 누가 뭐라 해도 오대세가(五代世家)의 세상이었다.
팔십 년 전에 있었던 정사대회전(正邪大回戰) 이후, 그 길고 처절한 싸움의 당사자들이었던 백도의 구대문파와 마도의 혼천마교(混天魔敎) 이하 여러 문파들은 승패를 떠나서 모두 쇠퇴일로(衰退一路)를 걸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때 무림 전쟁의 승리자 자리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구대문파는 정사대회전의 종결과 동시에 성세를 회복하기
위한 봉문(封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입은 피해는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을 정도여서 족히 백 년은 봉문해야 꺼진 정기(精氣)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아무튼 그 정사대회전의 패배로 인한 혼천마교의 멸망 이후 마도의 각문파들도 지리멸렬(支離滅裂)하고 말아, 강호는
그야말로 무인지경(無人之境)이었다.
강호라는 이름 자체가 유명무실(有名無實)해졌다고나 할까?
그때 강호에 새로운 영도자로 떠오른 것이 바로 오늘날의 오대세가였다.
금릉의 남궁세가(南宮世家).
려산의 모용세가(慕容世家).
악양의 사공세가(司空世家).
사천당문(四川唐門).
산서의 벽력당(霹靂堂), 즉 벽력뇌가(霹靂雷家)!
마도에 이렇다 할 이름을 지닌 문파도 없는 당금 강호에서 오대세가의 존재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지난 삼십 년 이래로 이에 견줄 만한 곳이 몇 군데 생겨났으니 강호에서는 이들을 일러 삼성(三星)이라 하였다.
떠오르는 세 개의 별!바로 의황곡(醫皇谷), 검도원(劍道院), 사림(蛇林)의
세 문파를 말함이었다.
이 중 사림만이 정사 구분이 모호한 곳이었고 다른 두 곳은 모두 백도에 적(籍)을 둔 문파들이었다.
이제 이쯤 되면 민하륜이 수학한 곳이 어딘지 짐작이 가리라!
의황곡!
민하륜의 이름이 강호에서 그처럼 높았던 이유는 바로 현강호에서 의황곡이 지닌 무시할 수 없는 위치 때문이었다.
의황곡이 한낱 의술 연구에 매진(邁進)하는 의생들이 모여 세운 문파임에도 불구하고 무림에서 그처럼 큰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는 다른 게 없었다.
칼날 위에 사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언제 다치거나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무릇 언제 의원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바로 강호인들이었다.
그러니 검을 쥐고 세상에 나온 사람들이라면 의원이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들에겐 항시 잘 보여 둘 필요가 있었다.
자연 최고의 의술을 지닌 의원들이 바글바글하다는 의황곡의 이름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의황곡이 뒤에 버티고 있건 옆에 버티고 있건 간에 민하륜은 변함없이 호북제일의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성심당도 여전히 아픈 사람들과 그들의 보호자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그런 성심당으로 갈의를 입은 노인 하나가 찾아든 것은 날씨가 갑작스레 추워진
만력 사십년(四十年) 일월(一月) 십칠일(十七日), 성심당의 활기찬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 무렵이었다.
“허어, 이거 난감하군요. 이를 어쩌나……! 상세를 들어 보니 심각한 것 같은데 이곳에도 지금 사경을 헤매는 어린아이 하나가 있어서 도저히 자리를 비울 수가 없습니다. 어려우시겠지만 환자를 이곳으로 데려오심이……”
막 희끗거리기 시작한 턱수염이 곱게 늘어져 인상이 어질어 보이는, 오십 줄에 들어선 황의인이 이따금씩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는 서글서글한 눈을 들어 앞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앉아 있는 사방 이 장여에 가까운 반듯한 방안에는 쌉쌀한 약향(藥香)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막 환자에게 줄 우황(牛黃)을 고르고 있었던 참인 듯 벗겨 낸 우황 껍질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둥그스름한 얼굴에는 난감(難堪)한 기색이 가득했다.
“불가하오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데다가 무림고수에게 당한 상처라…… 어쩌면 이곳으로 데려오는 도중 불행한 일이 생길 수도…… 음……! 어떻게 안 되겠소이까?”
황의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갈의노인은 어지간히 사정이 급했던 듯 간곡히 청했다.
“허허, 이를 어쩌나? 낭패군, 낭패야! 그만한 상처를 다룰 만한 의원이 한 명만 더 있어도 좋으련만! 여기
있는 다른 의원들의 실력으론 가봐야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으니, 무작정 보내 드릴 수도 없고! 휴우`─`!”
황의인은 갈의노인의 초조한 얼굴을 보며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안절부절못하며 대책없이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던 두 사람의 귀로 뜻밖의 음성이 들려 왔다.
“민(閔) 당주(堂主)님! 여기 그만한 의원이 하릴없이 놀고 있음을 잊으셨나요?”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려 온 곳을 향했다.
그들이 앉아 있는 방 한편으로 안쪽으로 통하는 미닫이 문이 하나 있었는데, 반쯤 열린
문 위로 휘장이 드리워져 있어 안이 들여다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그곳에서 흘러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갈의노인이 묻는 듯한 시선으로 황의인, 성심수 민하륜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민하륜은 이때 희색이 만연한 채 휘장 너머의 사람과 얘기를 나누기에 정신이 없었다.
“정말 소저께서 가주시겠습니까?”
“의원으로서 사람의 목숨을 두고 어찌 농담을 하겠어요?”
안에서 들려 온 맑고 청아한 목소리에 민하륜의 표정은 대번에 밝아졌다.
“아, 잘됐습니다! 이제 그 환자는 살았군요.”
“안에 계신 분이 뉘신지……? 이런 말하면 실례되겠으나 목소리로 보아 아직 젊은 분 같은데 과연 믿어도 되겠소이까? 그 사람은 매우 중요한 사람이오이다. 만에 하나
그가 잘못된다면 이 늙은 목숨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소.”
민하륜은 갈의노인의 심각한 눈빛에 정색을 하고 단언했다.
“안에 계신 소저께선 저보다 월등히 뛰어난 의원이십니다. 믿으셔도 좋습니다. 정 의심이 나시면 이 민 모의 목숨이라도 걸고 보장해 드리지요.”
갈의노인은 민하륜의 확언에도 불구하고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망설임을 끝낸 것은 휘장 너머에 있던 여인의 한마디였다.
“그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실 건가요?”
그 말 한마디에 갈의노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주름진 얼굴이 휘장으로 가려진 안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결심이 선 듯 굳은 음성을 토해 냈다.
“그럼, 어서 가십시다!”
그의 음성이 울리기 무섭게 반쯤 열려 있던 방문이 마저 열리더니 갸름한 하얀 손이 나와 휘장을 가볍게 젖혔다.
휘장 옆으로 늘어진 남색 소맷자락에 수놓여진 ‘의황(醫皇)’이란 은빛 글자가 선명하게 두 눈을 파고들었다.
“자! 그럼 환자를 보러 가실까요?”
휘장을 젖히고 나온 여인, 묘인아(苗仁雅)의 첫마디였다.
19화. 제9장 - 부상(負傷) 1
몽뇌산은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손에 단단히 쥐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장내에 있는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급박하게 돌아가던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주위의 공기는 급속도로 식어 갔다.
그 열쇠, 그리고 필시 죽거나 아니면 회생 불능의 상처를 입었으리라 여겼던 몽뇌산의 존재가 중인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내리눌렀다.
“자네……?”
하후극이 신음하듯 몽뇌산을 불렀다.
가슴에 선혈이 낭자한 몽뇌산의 모습을 바라보는 하후극의 눈에는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무엇도 열쇠의 중요성에는 견줄 수가 없으니……!
하후극은 몽뇌산을 향해 몇 번이나 입을 열려다가 결국은 그냥 물러나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몽뇌산은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석상처럼 서서 열쇠만 만지작거렸다.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어느새 지혈을 했는지 더 이상 피가 쏟아지진 않았지만 베어진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상처는 보기에도 끔찍할 정도였다.
몽뇌산의 창백한 얼굴이 그 상처가 피륙의 손상만으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내외상으로 인한 고통이 상당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몽뇌산의 표정은 종잡을 수 없으리만치 무덤덤했다.
입가에 늘상 감돌던 장난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영주! 임무를 잊으셨소?”
한 줄기 음산한 전음성(傳音聲)이 멍한 머릿속을 일깨움과 동시에 동령 영주의 눈빛이 다시 차갑게 빛을 발했다.
이어 그녀의 손에서 검광이 폭출했다.
그녀의 좌우에 있던 공야선표와 하후극이 기습적인 일검을 피하며 분분히 뒤로 물러서는 사이, 동령
영주는 장포를 휘날리며 순식간에 몽뇌산의 지척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상황을 변화시킨 그녀의 기세는 가히 만부막적(萬不莫敵)!
“서라!”
공야선표의 뒤늦은 고함이 장내를 흔들었다.
그러나 이미 선기(先氣)를 잡아 먼저 움직이고 있는 그녀를 막아설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아무 방비 없이 서 있는 몽뇌산을 향해 동령 영주의 싸늘한 외침이 비수처럼 날아갔다.
“손을 놓아라!”
스스스스`─`!
그것은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혁무빙은 허공에 몸을 고정시킨 채 자신을 붙들어맨 상대의 기(氣)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암경(暗勁)이 한층 거센 압력으로 몸을 눌러 오자 그는 공력을 배가시켰다.
나이답지 않게 절륜한 그의 공력과 정력에 놀랐음인지 거세게 밀고 들어오던 경기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상대의 뜻이 자신의 발을 묶어 놓자는 데 있는 것을 안 이상 필요 이상으로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혁무빙은 암중인과 미묘한 대치 상태를 유지하며 다시금 정신없이 돌아가는 장내의 상황을 한성(寒星) 같은 눈으로 주시했다.
갈색 장포를 펄럭이며 대붕처럼 몽뇌산을 덮쳐 가는 동령 영주의 모습이 눈에 잡힌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가공할 위세로 덮쳐 내리고 있는 동령 영주를 보면서도 몽뇌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상처가 심하여 움직일 수 없음인가, 아니면……?’
혁무빙은 이 짧은 대치 상태를 끝낼 순간이 왔음을 알아차렸
한데 암중인의 생각도 일치했음인가?
그의 손이 보는 이가 답답할 정도로 느릿하게 들리는 순간, 갑자기 거대한 힘이 사방에서 그의 몸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퍽, 퍽!
주변의 흙이 삽질당하듯이 패어 올랐다.
혁무빙의 주변은 삽시간에 돌풍이라도 몰아친 듯 아수라장으로 화했다.
앞쪽에 서 있던 공야선표 등이 놀란 눈으로 이편을 돌아보는 게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웅`─`!
심금을 떨어 울리는 소리가 천지를 메웠다.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혁무빙 주위를 무서운 속도로 맴돌던 흙먼지 사이로 눈부신 빛줄기가 솟구쳤다.
똑바로 마주볼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그래서 더 무서운 은빛 광채.
검은 그렇게 하늘을 갈랐다.
동령 영주의 외침은 땅이 들썩거릴 정도로 우렁차지도, 그렇다고 귀가 따가울 정도로 날카롭지도 않았다.
그러나 귓전에 선명하게 와 닿는 싸늘한 음성이 뜻하는 바는 몽뇌산의 머릿속에 정확히 전달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몽뇌산은 서 있기만 했다.
신지(神智)가 사라지고 육신이 마비된 사람처럼, 그냥 그렇게 서 있기만 했다.
아니, 한 가지 작은 변화가 있기는 있었다.
열쇠를 들고 있던 몽뇌산의 손이 아주 약간 움직인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손을 놓으려는 것일까?
아니었다.
몽뇌산의 손끝엔 이 순간 희미한 청광이 맺히고 있었다.
“당신과 나, 둘 중에 누가 더 빠를까……?”
불쑥 내뱉어진 몽뇌산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그러나 그 시기는 매우 적절했다.
그 순간, 막 발검(發劍)의 자세를 취하던 동령 영주의 눈동자가 크게 치떠졌다.
“아, 안 돼`─`!”
비명과 같은 고함이 터졌다. 그러나 소리의 임자는 동령 영주가 아니라 공야선표였다. 그의 안색은 숨넘어가는 사람처럼 파랗게 질려 있었다.
몽뇌산의 손끝에 맺힌 요요로운 청광!
그가 독문 출신이라는 것은 비밀도 아닌 터,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것이 독기임은 감히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발검을 포기한 동령 영주의 서늘한 눈빛이 몽뇌산의 얼굴을 직시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몽뇌산의 시선이 아주 잠깐이지만 조급한 심정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와 얽혀들었다.
“내게 이건 그냥 열쇠에 지나지 않지. 어떤 사람에겐 황금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가끔은 황금을 돌같이 보는 사람도 있는 법이거든.”
두말할 것도 없이 상황에 따라서 충분히 없애 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동령 영주의 복면이 바람도 없는데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얼어붙은 눈동자가 몽뇌산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예리하게 번뜩거렸다.
모두의 시선이 몽뇌산에게 쏠린 채 기이한 대치 상태가 이어졌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장내의 상황을 깨는 것은 뜻밖의 곳에서 일어났다.
장내의 공기가 갑작스레 뒤로 일제히 빨려드는가 싶더니 눈부신 빛이 솟구쳐
오르며 천지를 들썩이는 굉량(宏量)한 폭음(爆音)이 일었다.
콰과과광`─`!
강한 흙먼지가 장내를 한차례 휩쓸며 지나는 순간, 두 종류의 소리가 다시 허공을 갈랐다.
카앙`─`!
퍼어엉!
점차 가라앉고 있는 먼지 사이로 일보 후퇴하는 동령 영주와 그녀의 좌우에 자리를
바꾸어 갈라서 있는 공야선표, 하후극의 모습이 보였다.
중인들의 시선이 다른 데 쏠린 틈을 타서 몽뇌산에게 접근하려던 시도가 무위로 끝나자 동령 영주는 한 발 물러나며 시선을 힐끔 뒤로 향했다.
그곳에선 좀 전의 엄청난 충돌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혁무빙, 그리고 그로부터 삼 장 가량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낯선 백의노인.
백의노인의 인상은 얼굴을 대하자마자 북풍한설(北風寒雪)이란 말을 절로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차디찼다.
날카롭게 뻗은 하얀 눈썹과 깎아지른 듯 찬 기운이 도는 이마, 젊은 시절 한번 부러진 적이 있었던 듯 끝이 휜 매부리코에 핏기없는 얄팍한 입술은 그의 냉혹하고 잔인한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어 차가운 겨울바람조차 그를 비켜 갈 것처럼 보였다.
동령 영주, 몽뇌산을 지나 혁무빙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시선에서 백의노인이 누군지 짐작해 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구유수라마검(九幽修羅魔劍)! 어린 녀석이 제법이구나! 오백 년 전 검마의
구유수라마검이라면 노부의 유명빙백장(幽冥氷魄掌)을 받아 낼 자격이 있다 할 수 있지.”
백의노인의 종잇장같이 엷은 입술 사이를 비집고 음랭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가슴 앞에 검을 곧추세운 채 우뚝 서 있는 혁무빙에게선 아무런 대꾸도 나오질 않았다.
그사이 백의노인은 할말을 다 마친 듯, 벌써 몽뇌산과 대치하고 선 동령 영주에게로 돌아서 있었다.
지독히도 거만한 태도였다.
“영주! 그는 절대로 열쇠를 어쩌지 못하오. 그 열쇠가 필요한 건 우리뿐만이 아니오. 열쇠를 없애고 나면 아마 우리보다 회(會)에서 먼저 그를 죽이려들걸?”
“그렇구나! 그대가 바로 동령 영주였군.”
몽뇌산은 부지불식간에 나직한 부르짖음을 토하는 공야선표를 흘끗 바라보며 짧게 물었다.
“회란 게 뭐죠?”
공야선표의 눈빛이 난처하게 빛났다.
“오호!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른 채 말려든 거로구먼.”
“무슨 소리를 하려는……?”
몽뇌산은 발끈해서 소리치는 공야선표를 손짓으로 막으며 백의노인을 냉담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게 뭔지는 차차 알게 되겠지. 하여간 재미있군!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이걸 없애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단 말이지. 내가 이걸 없앤 다음에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어디 볼까?”
몽뇌산은 한 점의 허세(虛勢)도 들어 있지 않은 얼굴로 열쇠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몽뇌산의 손에서 파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백의노인은 설마 그가 그런 대담한 행동을 할 줄은 몰랐던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잠깐! 그 열쇠가 왜 필요한지 알고 싶지 않은가?”
백의노인의 벼락같은 외침은 그만한 효과가 있었다.
백의노인은 몽뇌산이 손에서 공력을 거둠과 동시에 보일 듯 말 듯 안도의 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얼음장 같은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이 잠깐 사이 그가 얼마나 간을 졸였나 보여 주었다.
몽뇌산의 눈길이 백의노인을 직시하자, 백의노인은 특유의 냉랭한 목소리로 얘기를 시작했다.
“그 열쇠는 사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필요한 수단에 지나지 않지.”
“당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 뭐요?”
질문을 던지는 몽뇌산의 시선을 외면하며 백의노인은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입에서 불쑥 엉뚱한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래된 무덤이 하나 있지. 그것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을 내 마지않는! 이유가 뭔지 아는가?”
몽뇌산은 고개를 흔들지도 끄덕이지도 않은 채 노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백의노인은 입을 굳게 다물고는 하늘을 한번 스윽 올려다보았다. 뜸을 들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백의노인이 다시 입을 열려 할 때, 불쑥 튀어나온 몽뇌산의 음성이 노인의 입을 다물게 했다.
“시간을 끌려는 방법치곤 좀 유치하지 않은가?”
깜짝 놀란 공야선표와 하후극이 바짝 긴장을 돋우는 순간, 흠칫했던 눈빛이 풀어지며 백의노인의 얄팍한 입술 사이로 웃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후후후! 보기완 달리 꽤 영리하구나, 어린 놈! 그러나 너무 늦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허공을 날아 몽뇌산을 덮쳐 가면서 터져 나왔다.
백의노인이 몸을 날림과 동시에 혁무빙의 신형도 날아올랐다.
주인과 똑같이 서늘한 기운을 피워올리는 그의 은검이 백의노인의 앞길을 막아 섰다.
곧 이어 혁무빙이 그답지 않게 큰 소리로 몽뇌산을 향해 소리쳤다.
“뒤를 조심해`─`!”
하후극과 공야선표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서둘러 몽뇌산에게 다가섰으나 이미 일은 벌어지고 있었다.
몽뇌산의 뒤에서 불쑥 솟아난 검은 그림자가 그를 뒤덮는 순
퍼어엉`─`!
“우욱`─`!”
누가 밀친 듯 앞으로 확 고꾸라지는 몽뇌산의 입에서 핏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면서 피비린내가 화악 퍼졌다.
뒤에서 유령처럼 솟구친 흑영이 그의 머리를 타넘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바닥에 발이 닿지도 않은 상태에서 흑영의 몸이 휙 돌아서더니 앞으로 엎어지는 몽뇌산의 가슴을 발로 걷어차 올리며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열쇠를 간단히 낚아챘다.
흑영의 움직임은 처음부터 끝까지 군더더기 하나 없이 빠르고 냉혹했다.
혁무빙의 경고가 들리고 나서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돌아갑시다`─`!”
흑영이 열쇠를 손에 넣자마자, 끝을 보려는 듯 혁무빙과 거세게 맞붙어 있던 백의노인이 한소리 외침과 함께 몸을 솟구쳐
올렸다.
“마음대로 갈 수 있을 것 같은가?”
혁무빙의 서늘한 음성이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순간,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살기를 가득 담은 채 몸을 옆으로 비튼 백의노인의 손에서 파천(破天)의 위력이
담긴 장력이 쏟아져 나왔다.
혁무빙은 얼음가루같이 음랭한 장세 속으로 망설임없이 뛰어들며 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눈부신 은광이 다섯 자나 치솟았다.
좀 전의 격돌에 이어 두 번째 펼치는 검강이었다.
카가가가`─`!
그의 검이 바다를 가르듯 장세를 수직으로 끊어 내며 앞으로 쭈욱 뻗었다.
무인지경을 가듯 그대로 밀어닥치는 검세가 느껴지자, 백의노인은 흠칫하며 서둘러 돌아섰다.
“이런! 갈(喝)`─`!”
그에게서 터져 나온 다급한 외침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콰아앙`─`!
천지를 뒤집어 놓을 듯한 엄청난 폭음이 울렸다.
그 사이로 폭음을 뒤쫓아 윽! 하는 외마디 비명이 울리고, 곧 이어 펑,`하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냄새를 뿜어
내는 흑연(黑煙)이 장내에 자욱이 깔렸다.
흑연 속에서 날카로운 호통 소리와 경호성(驚呼聲)이 잇달아 터지며 몇 번의 충돌음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장내를 가득 메웠던 흑연이 바람에 밀려 흩어지고 나자 허탈함과 침통함으로
일그러진 공야선표와 하후극의 모습이 보였다.
검을 늘어뜨리고 눈을 반쯤 내리깐 채 서 있는 혁무빙 앞으로 보이는 끊어진 팔 하나만이 좀 전에 있었던 격돌의 흉험(凶險)함을 말해 주고 있을 뿐, 적들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
“으음`─`!”
혁무빙은 백의 조각을 걸친 채 아직도 꿈틀거리며 피를 쏟아 내고 있는 그 팔을 표정없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신음 소리가
난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 몽뇌산이 있었다.
걸레 조각처럼 바닥에 처박혀 있는 몽뇌산 곁으로 다가간 그는 천천히 몽뇌산의 몸을 바로 뉘었다.
그가 몽뇌산의 혈도를 막아 지혈을 하고 기를 불어넣어 혈맥을 보호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을 때, 겨우 정신을 수습한 하후극이 조용히 그들에게 다가왔다.
오는 길에 발을 멈춰 매끈하게 잘려 나간 팔의 단면을 유심히 살펴본 그는 이내 몽뇌산의 곁에 다가와 쭈그리고 앉았다.
하후극은 아직도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얼굴로 서 있는 공야선표를 한 번 힐끔 쳐다보더니 상세를 물어 왔다.
“어떠냐?”
“아무래도 의원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하후극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무겁게 감겨 있던 몽뇌산의 눈꺼풀이 힘겹게 들어올려지며 희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열, 허억…… 열쇠는……?”
하후극은 아무 말 없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오는 가운데 몽뇌산의 입에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웃음이었다.
“후후, 멍청한! 물…… 건의 지, 진위(眞僞)도 모르는……!”
몽뇌산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감겼다.
얼어붙은 얼굴로 의식 잃은 몽뇌산을 내려다보는 하후극의 어깨 너머로 공야선표가 머리카락에 불이 붙도록 바람을 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 * *
성심당(聖心堂)!
황주부 황주성(黃州城)에서 가장 알아주는 이름 하면 뭐니뭐니 해도 성심당이란 이름 석 자였다.
성심당이 뭐 하는 곳인가 하면 그 입구에 걸린 다음과 같은 문구(文句)에서 알 수 있다.
<성심치료하시하인(誠心治療何時何人)>
풀어서 얘기하면 어떤 시간, 어떤 신분의 사람을 막론하고 항상 성심을 다해 치료해 준다는 내용이다.
즉, 성심당은 의원(醫院)이었다.
다만 보통 의원이 아니라 호북성주가 친히 현판을 하사(下賜)했고 호북제일명의(湖北第一名醫)가 있다고 소문난, 명망있는
곳이었다.
호북제일명의 성심수(聖心手) 민하륜(閔崙)!
민하륜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강호에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민하륜이 강호상에서 그처럼 유명한 이유는 그의 의술이 고절(高絶)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상은 그가 수학(受學)한 곳의 명성이 워낙 높기 때문이었다.
그가 수학한 곳이 어디냐 하는 얘기를 하려면 그에 앞서 당금 강호를 주름잡는 문파들에 대한 얘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당금 천하는 누가 뭐라 해도 오대세가(五代世家)의 세상이었다.
팔십 년 전에 있었던 정사대회전(正邪大回戰) 이후, 그 길고 처절한 싸움의 당사자들이었던 백도의 구대문파와 마도의 혼천마교(混天魔敎) 이하 여러 문파들은 승패를 떠나서 모두 쇠퇴일로(衰退一路)를 걸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때 무림 전쟁의 승리자 자리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구대문파는 정사대회전의 종결과 동시에 성세를 회복하기
위한 봉문(封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입은 피해는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을 정도여서 족히 백 년은 봉문해야 꺼진 정기(精氣)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아무튼 그 정사대회전의 패배로 인한 혼천마교의 멸망 이후 마도의 각문파들도 지리멸렬(支離滅裂)하고 말아, 강호는
그야말로 무인지경(無人之境)이었다.
강호라는 이름 자체가 유명무실(有名無實)해졌다고나 할까?
그때 강호에 새로운 영도자로 떠오른 것이 바로 오늘날의 오대세가였다.
금릉의 남궁세가(南宮世家).
려산의 모용세가(慕容世家).
악양의 사공세가(司空世家).
사천당문(四川唐門).
산서의 벽력당(霹靂堂), 즉 벽력뇌가(霹靂雷家)!
마도에 이렇다 할 이름을 지닌 문파도 없는 당금 강호에서 오대세가의 존재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지난 삼십 년 이래로 이에 견줄 만한 곳이 몇 군데 생겨났으니 강호에서는 이들을 일러 삼성(三星)이라 하였다.
떠오르는 세 개의 별!바로 의황곡(醫皇谷), 검도원(劍道院), 사림(蛇林)의
세 문파를 말함이었다.
이 중 사림만이 정사 구분이 모호한 곳이었고 다른 두 곳은 모두 백도에 적(籍)을 둔 문파들이었다.
이제 이쯤 되면 민하륜이 수학한 곳이 어딘지 짐작이 가리라!
의황곡!
민하륜의 이름이 강호에서 그처럼 높았던 이유는 바로 현강호에서 의황곡이 지닌 무시할 수 없는 위치 때문이었다.
의황곡이 한낱 의술 연구에 매진(邁進)하는 의생들이 모여 세운 문파임에도 불구하고 무림에서 그처럼 큰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는 다른 게 없었다.
칼날 위에 사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언제 다치거나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무릇 언제 의원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바로 강호인들이었다.
그러니 검을 쥐고 세상에 나온 사람들이라면 의원이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들에겐 항시 잘 보여 둘 필요가 있었다.
자연 최고의 의술을 지닌 의원들이 바글바글하다는 의황곡의 이름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의황곡이 뒤에 버티고 있건 옆에 버티고 있건 간에 민하륜은 변함없이 호북제일의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성심당도 여전히 아픈 사람들과 그들의 보호자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그런 성심당으로 갈의를 입은 노인 하나가 찾아든 것은 날씨가 갑작스레 추워진
만력 사십년(四十年) 일월(一月) 십칠일(十七日), 성심당의 활기찬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 무렵이었다.
“허어, 이거 난감하군요. 이를 어쩌나……! 상세를 들어 보니 심각한 것 같은데 이곳에도 지금 사경을 헤매는 어린아이 하나가 있어서 도저히 자리를 비울 수가 없습니다. 어려우시겠지만 환자를 이곳으로 데려오심이……”
막 희끗거리기 시작한 턱수염이 곱게 늘어져 인상이 어질어 보이는, 오십 줄에 들어선 황의인이 이따금씩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는 서글서글한 눈을 들어 앞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앉아 있는 사방 이 장여에 가까운 반듯한 방안에는 쌉쌀한 약향(藥香)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막 환자에게 줄 우황(牛黃)을 고르고 있었던 참인 듯 벗겨 낸 우황 껍질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둥그스름한 얼굴에는 난감(難堪)한 기색이 가득했다.
“불가하오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데다가 무림고수에게 당한 상처라…… 어쩌면 이곳으로 데려오는 도중 불행한 일이 생길 수도…… 음……! 어떻게 안 되겠소이까?”
황의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갈의노인은 어지간히 사정이 급했던 듯 간곡히 청했다.
“허허, 이를 어쩌나? 낭패군, 낭패야! 그만한 상처를 다룰 만한 의원이 한 명만 더 있어도 좋으련만! 여기
있는 다른 의원들의 실력으론 가봐야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으니, 무작정 보내 드릴 수도 없고! 휴우`─`!”
황의인은 갈의노인의 초조한 얼굴을 보며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안절부절못하며 대책없이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던 두 사람의 귀로 뜻밖의 음성이 들려 왔다.
“민(閔) 당주(堂主)님! 여기 그만한 의원이 하릴없이 놀고 있음을 잊으셨나요?”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려 온 곳을 향했다.
그들이 앉아 있는 방 한편으로 안쪽으로 통하는 미닫이 문이 하나 있었는데, 반쯤 열린
문 위로 휘장이 드리워져 있어 안이 들여다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그곳에서 흘러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갈의노인이 묻는 듯한 시선으로 황의인, 성심수 민하륜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민하륜은 이때 희색이 만연한 채 휘장 너머의 사람과 얘기를 나누기에 정신이 없었다.
“정말 소저께서 가주시겠습니까?”
“의원으로서 사람의 목숨을 두고 어찌 농담을 하겠어요?”
안에서 들려 온 맑고 청아한 목소리에 민하륜의 표정은 대번에 밝아졌다.
“아, 잘됐습니다! 이제 그 환자는 살았군요.”
“안에 계신 분이 뉘신지……? 이런 말하면 실례되겠으나 목소리로 보아 아직 젊은 분 같은데 과연 믿어도 되겠소이까? 그 사람은 매우 중요한 사람이오이다. 만에 하나
그가 잘못된다면 이 늙은 목숨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소.”
민하륜은 갈의노인의 심각한 눈빛에 정색을 하고 단언했다.
“안에 계신 소저께선 저보다 월등히 뛰어난 의원이십니다. 믿으셔도 좋습니다. 정 의심이 나시면 이 민 모의 목숨이라도 걸고 보장해 드리지요.”
갈의노인은 민하륜의 확언에도 불구하고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망설임을 끝낸 것은 휘장 너머에 있던 여인의 한마디였다.
“그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실 건가요?”
그 말 한마디에 갈의노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주름진 얼굴이 휘장으로 가려진 안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결심이 선 듯 굳은 음성을 토해 냈다.
“그럼, 어서 가십시다!”
그의 음성이 울리기 무섭게 반쯤 열려 있던 방문이 마저 열리더니 갸름한 하얀 손이 나와 휘장을 가볍게 젖혔다.
휘장 옆으로 늘어진 남색 소맷자락에 수놓여진 ‘의황(醫皇)’이란 은빛 글자가 선명하게 두 눈을 파고들었다.
“자! 그럼 환자를 보러 가실까요?”
휘장을 젖히고 나온 여인, 묘인아(苗仁雅)의 첫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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