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제9장 - 부상(負傷) 2

등록 2026.10.12 9.4천자 조회 1 좋아요 0 댓글 0 15세 이상 이용가
독로무한
20화. 제9장 - 부상(負傷) 2


눈앞은 온통 암흑 천지였다.
몽뇌산은 저 멀리 보이는 한 줄기 불빛을 쫓아 숨을 헐떡거리며 뛰고 또 뛰었다.
웬일인지 그 불빛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 불빛을 등지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노란 것 같기도 하고 붉은 것 같기도 한 불빛이 서서히 그를 비추자 몽뇌산이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 드러났다.
사부님이었다.
반가움에 막 다가가려는 그를 향해 별안간 사부님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녀석! 말 못 하는 식물이라고 함부로 다루지 마라! 무릇 독초를 다룸에 있어서 진정한 독문인이라면 그 어떠한
기진영약(奇珍靈藥)보다 더 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허공에 둥둥 떠서 그를 내려다보는 사부님의 얼굴은 엄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냉기가 흐르는 사부님의 얼굴이 빙글빙글 돈다 싶더니 어느새 장소는 소사곡 안쪽의 절벽 앞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떠냐? 할 수 있겠느냐?”
“그간의 성취를 시험해 보려 한다.”
“넌 반드시 십 성의 경지를 뛰어넘어야 한다!”
“독중지성이 되는 방법만 안다면……?”
사부님의 얼굴이 점점 멀어져 가며 여러 가지 말이 제멋대로 뒤섞여서 귓속을 파고들었다.
몽뇌산은 점점 흐릿해져 가는 사부의 뒤를 쫓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어찌 된 일인지 두 발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들러붙은 듯 무겁기 짝이 없는 발을 떼어 내려 버둥대고 있는 자신의 앞으로 새로운 얼굴이 보였다.
‘하후극!’
몽뇌산은 그를 소리내어 불렀다. 그라면 자신의 몸을 땅에서 떼어 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부름은 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하후극은 그를 어딘가 허무(虛無)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를 흘려 냈다.
“검도의 길에는 끝이 없고 깨달음은 한 순간이다.”
몽뇌산은 언젠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을 중얼거리며 사라지는 하후극을 향해 안타까운 손짓을 했지만 그의 모습은 간데없고 어느새 눈앞엔 혁무빙의 무심한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차갑게 등을 돌린 채 멀어져 갔다.
그때, 몸을 움직이려 애쓰는 그의 눈앞으로 뭔가 반짝거리는 것이 포물선을 그리며 다가왔다.

몽뇌산은 무심결에 앞으로 한 발 내딛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까는 그렇게 노력해도 안 되더니 이번에는 아주 쉽게 몸이
움직였다.
몽뇌산은 손에 잡힌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그저 볼품없어 보이는 구릿빛 열쇠였다.
그때, 어디선가 싸늘한 음성이 메아리치며 음한(陰寒)한 기운이 그를 향해 밀려왔다.

“손을 놓아라!”
순간, 가슴에 섬뜩한 충격이 느껴졌다.
몽뇌산은 천천히 앞을 내려다보았다. 가슴 부근의 옷자락이 베어진 채 축축한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몽뇌산은 손으로 그것을 가만히 만져 보았다.
약간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것은 꽤나 미끌거리는 게, 그다지 좋은 감촉은 아니었다.
몽뇌산은 손을 불빛 쪽으로 들어올렸다. 손에 붉은 것이 묻어 있는 게 보였다.
그것은 이상하리만치 붉디붉었다.
피였다.
“이제 정신이 좀 드나요?”
몽뇌산은 목소리가 들린 곳에다 초점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한꺼풀 막을 씌운 듯 눈앞이 뿌연 게 목소리의 임자를 찾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몇 번씩 눈을 깜박거리고 나서야 시야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몽뇌산은 자신을 향해 밝은 미소를 보내는 젊은 여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름이 뭐죠?”
몽뇌산의 질문이 뜻밖인 듯 여인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묘인아예요.”
“묘인아……!”
몽뇌산은 희미하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곁에서 그를 깨우는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있었지만 몽뇌산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지금은 너무 피곤했다.
“말해 보게, 소형제! 열쇠, 그 열쇠의 진위가 어쩌고 한 말이 무슨 뜻인가, 응?”
“자, 그만 하세요. 이제 쉬어야 해요.”
묘인아라고 했던가? 그녀의 음성이 다급하게 떨리는 나이 든 음성을 차분하게 막았다.
몽뇌산은 그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어딘지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
그러나저러나 열쇠라니? 무슨 열쇠를 말하는 거지?
점점 흐릿해져 가는 그의 머릿속에 문득 어떤 열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 그거! 그 얘긴 나중에 해도 되겠지……’
몽뇌산은 눈을 감아 버렸다.
다시 잠속으로 빠져 드는 건 아주 쉬웠다.
모든 게 멀어져 갔다.
* * *
널따란 대전(大殿) 안에는 아까부터 괴이한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나직하고 단조로운 그 소리는 노래 같기도 했고 주문 같기도 했다. 자세히 들어 보니 그 소리는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반복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대전 안에 기이한 열기(熱氣)가 퍼져 나갔다. 그 음울한 가락(哥樂)을 읊조리는 사람들의
눈동자엔 번들거리는 광기(狂氣)마저 어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몸은 모두 한쪽 방향을 향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자리한 대전의 상단(上段)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階段) 하나가 시작되고 있었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어둠 속에서도 검붉은 광채를 뿜어 내는 그 계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숨막히는 흥분(興奮)을 느끼게 했다.
대전 바닥에 엎드린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괴이한 소리는 이제 절정(絶頂)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들의 몸 전체가 흥분으로 학질 걸린 사람처럼 떨리는 순간, 느닷없이 모든 소리가 일제히 멈췄다.
전율과 같은 긴장이 대전 안에 흘렀다.
그때였다.
계단이 자리한 쪽의 허공에서 귀화(鬼火)처럼 붉은 빛을 뿌리는 두 개의
등이 켜졌다. 자세히 보니 오른편의 등에는 ‘신(身)’ 자가, 왼편의 등에는
‘혼(魂)’ 자가 검은색으로 쓰여져 있었다.
등불 사이로 계단 끝의 윤곽이 어슴푸레 드러났다.
허공에서 귀등(鬼燈)이 섬뜩한 빛을 뿌리는데도 대전 안에 있던 사람들은 조금도 놀라지 않은 채 머리를 더 깊숙이 조아릴 뿐 미동도 없었다.

그 귀등 사이로 하얀 천으로 전신을 휘감은 인영이 나타났다. 그 인영은 황금탈(黃金奪)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 황금탈의 모양이 실로 섬뜩했다.
탈의 이마 부분에는 마치 살아 있는 듯 보이는 정교(精巧)한 뱀의 문양(文樣)이 조각되어 있었다. 사악한 빛을 뿌리는 뱀의 눈도 무엇을 박아 넣었는지 귀등의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게
오싹한 느낌을 주었다.

허공에 떠 있는 그 인영의 모습은 붉게 빛나는 그 등불 때문에 더 음사해 보였다.

사람인지 귀신인지 분간도 안 가는 그 황금탈의 인영이 미끄러지듯 아홉 계단을 내려왔다.
그 순간 다시 두 개의 등이 켜졌다.
백포의 황금탈인영이 아홉 계단을 내려오고 그때마다 두 개의 등이 더 켜지고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마침내 인영의 발이 대전의 상단 바닥에 닿자 양쪽으로 각각 스무 개씩의 등이 켜졌다.
어둠침침하던 대전은 그 등불로 인해 붉은 빛으로 가득 찼다.
무려 그 수가 백팔십 개에 이르는 웅장한 계단이 황금탈인영 뒤에 지옥(地獄)으로 가는 입구인 양 버티고 섰다.
번들거리는 뱀의 눈으로 주위를 한번 쓸어본 황금탈인영은 대전에 엎드린 채 숨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끈끈하게
혼을 빨아들이는 마력(魔力)을 지닌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날이 멀지 않았도다!”
“대사령(大蛇領)이시여! 인도해 주소서!”
바닥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광기 어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대사령이라 불린 자는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부르기 위해 너희의 힘을 바쳐라!”
“따르겠나이다.”
절규(絶叫)와도 같은 소리을 내지르며 사람들은 대사령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착각인지 몰라도 황금탈의 뱀눈이 붉게 보이기 시작했다.
대사령의 손이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을 가리켰다.
“너! 새로운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느냐?”
지적을 받은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기꺼이 바치겠나이다.”
이윽고 그와 지적 받은 또 다른 한 사람이 대전의 상단으로 올라왔다.
그들의 눈은 희열(喜悅)로 반짝이고 있었다.
눈동자가 흥분과 광기로 번들거리기는 했으나 미약(迷藥) 종류에 취했을 때처럼 몽롱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걸어가 어느새 상단에 마련된 제단(祭壇) 위에 누웠다.
대사령이 제단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입에서 이상한 주문 같은 중얼거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제단 위에 누운 두 사람을 보며 대사령은 양손을 그들의 가슴 위에 올렸다.
치치치직`─`!
뭔가가 불에 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대사령은 양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런데 그의 양손에 들린 물체!
놀랍게도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방금까지 제단 위에서 살아 숨쉬던 두 사람의 간이었다.
아직도 미미하게 꿈틀거리며 뜨거운 김을 내고 있는 그 간을 보면서 대전 안의 누구도 충격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긴장된 시선으로 제물이 바쳐지는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대사령의 손에 붉은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생간이 들려지자 두 손을 높이 들며 환호했다.
광란(狂亂)과도 같은 흥분의 물결이 지나자 대사령이 두 개의 생간을 계단 아래의 좌우에 놓여
있던 향로(香爐)에다 집어넣었다.
대사령은 그 일을 마치고는 곧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내려올 때와는 달리 올라갈 때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 계단씩 오르기 시작했다.
대사령의 모습이 계단 너머로 사라지고 계단을 밝히던 귀등이 다 꺼지자 대전 안은 다시 어둠으로 화했다.
어둠 속에서 의식(儀式)을 끝낸 사람들이 하나둘씩 대전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영주를 뵈오이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붉은 노을빛에 휩싸여 타오르는 듯 보이는 전각의 입구 앞에서 회색장포를 입은 노인 둘이 표정없는 얼굴로 길게 읍했다.
영주라 불린 은의복면인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거침없는 동작으로 그들을 지나쳤다.
그그그긍`─`!
전각의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안으로 들어섰다.
쿵,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을 뒤로하고 긴 회랑을 따라 전각 깊숙이 들어가자 회랑의 끝에는 육중한
문 하나가 자리해 있었
문 앞엔 천장에 박힌 야명주의 흐릿한 불빛 속에 두 명의 흑의검수가 서 있었다.

벽에 등을 대고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은 입고 있는 흑의 때문인지 검은 벽에 녹아든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두 흑의검수는 은의복면인이 다가오는데도 별반 표정이 없었다.
그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는 양 꼿꼿하게 석상처럼 서 있던 그들은 은의복면인이 문 앞에서 멈춰 서자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창문마다 휘장을 쳐서 오직 등불에만 의존하고 있는 방안에 들어서자 흐릿한 불빛 속에 탁자를 둘러싸고 네 사람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은의복면인은 가벼운 긴장을 느끼는 듯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앞에 보이는 저들이야말로 교의 실세들이었다.
방금 전 의식을 주재했던 백의복면 차림의 대사령과 금색면구를 착용한 금의인, 갈의복면인,
그리고 상석에 앉은 청의복면인은……
청의복면인을 본 은의복면인의 눈빛이 짧은 순간 무수한 떨림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은의복면인의 몸은 매끄럽게 다시 움직이며 상석에 앉아 있는 대사령과 청의복면인을 향했다.
“대사령! 늦어서 죄송합니다. 서문후께서 와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하좌가 인사드립니다, 문후!”
청의복면인, 서문후(西文侯)를 향하는 은의복면인의 목소리는 탁한 와중에서도 희미한 긴장을 드러내고 있었다.
교 내에 있는 동, 서, 남, 북의 사방호교존(四方護敎尊)!
그 중 교 안팎에 걸친 모든 일에 관여하는 동무후(東武侯)와 서문후.
교의 대소사엔 일체 관여하지 않은 채, 늘 신주 곁을 떠나지 않는 비밀스런 존재인 남법령(南法令)과 북법령(北法令).
이들을 통틀어 사방호교존이라 하거니와, 서문후는 그 중에서도 교 내의 일에 가장 강한 입김을 발휘하는 실권자라 할 수 있었다.
교 내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동무후의 세력도 결코 적지 않을 것이라 했으나, 대다수의 교도들은 서문후의
힘을 위로 보고 있었다.
“은령 영주를 보는 건 오랜만인 것 같군. 그 동안 근신 중이었다지?”
서문후의 부드러운 음성에 은의복면인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을 받았다.
“예, 한데 서문후께서 총단에 오신 것을 보니 중요한 일이 있나 보군요.”
은령 영주는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쭈욱 훑어보며 가볍게 말했다.
머리에 여전히 백색복면을 뒤집어쓰고 있던 대사령이 옆에 있는 갈의복면인을 돌아보며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문후께선 사혼영(死魂影)의 일 때문에 오신 것이고, 오늘 본 령이 여러 영주들을 모이라고 한 것은 이번에 동령 영주가 훌륭히 임무를 완수한 덕분에 천총비도를
꺼낼 수 있는 열쇠가 우리 손에 들어왔단 얘기를 해주기 위함이오.”
“그것이 어찌 하좌의 공이겠습니까? 대사령께서 보내 주신 두 분 호법장로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것입니다.”
대사령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는 동령 영주의 음성은 변함없이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건 그렇지. 확실히 호법들의 공이 컸소. 그로 인해 좌호법의 한 팔이 잘리는 희생을 감수해야 했으나 하여간 이번 일에 신주께선 대단히 만족하고 계시오.”
대사령의 음성이 만족스런 기색을 내비치자 은령 영주의 눈동자에 독한 빛이 이글거렸다.
그런 은령 영주와 동령 영주의 모습을 묵묵히 살피던 서문후가 청명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그의 눈은
현기롭게 빛나고 있었다.
“이번에 교를 위해 동령이 정말 중요한 일을 해낸 거지. 축하하네, 영주!”
“별말씀을…… 감사합니다, 문후! 그런데 비도는 언제쯤 빼내 올 것인지……”
서문후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동령 영주가 물어 오자 대사령은 이제껏 한마디도 없이 앉아 있던 금의인을 바라보았다.
금색면구 속의 덤덤한 눈동자가 자신에게 향하는 대사령의 눈길을 받았다.
“그 일은 내가 맡게 되었네, 영주!”
금의인, 금령 영주의 간단하고 무뚝뚝한 대답을 들으며 동령 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입을 여는 사람이 없자 대사령은 세 영주를 차례로 쓸어보았다.
“자! 이제 물러가도 좋소. 금령 영주는 나와 얘기한 대로 일을 진행시키시오. 비도의 위치를 알아 내는
게 급선무이니 서두르시오. 적에게 대처할 시간을 줘선 안 되오. 이건 본 령의
뜻이기 전에 신주, 그분의 뜻이오.”
대사령이 신주의 뜻을 전하자 금령 영주는 눈동자 가득 공경의 빛을 떠올리며 가볍게 허리를 꺾었다.
금령, 동령 영주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서면서 은령 영주는 힐끔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곧 아무 일 없다는 듯 총총히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을 서문후의 차분한 눈동자가 길게 따라붙고 있었다.

은령 영주를 끝으로 세 영주가 모두 방을 나서자 방문이 소리없이 닫혔다.
“왜 나를 은밀히 보자고 했는가, 은령 영주?”
학식 높은 문사처럼 깊이있고 맑은 목소리가 조용히 방안을 울렸다.
은령 영주는 창가에 기품있는 모습으로 서 있는 청의복면인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청의복면인, 서문후는 그녀가 입을 열기를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여유로운 행동은 은령 영주에게 또 다른 중압감(重壓感)을 안겨 주고 있었다.
짧은 망설임 끝에 은령 영주는 서문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았다.
다만 복면 밖으로 보이는 서문후의 흔들리는 눈빛만이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오가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서찰에 적힌 글은 고대문자 중 하나인 신성문(神聖文)입니다. 이름조차 아는
이가 드물지만 하좌는 우연히 전에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 하좌는 그 글을 알아볼 또다른 사람이 천하에 있을 거라
생각지 않습니다.”
“그 글을 알아볼 자가 없을 거라 장담하면서 내게 그 글로 서찰을 써 보낸 이유는? 나조차
알아볼 수 없는 글이라면 서찰을 보내나마나 한 것 아닌가?”
그의 물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은령 영주의 대답은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문후의 박학 다식함은 교 내에선 모두 아는 사실 아닙니까?”
“내가 당연히 신성문을 알 거라고 생각했나?”
“예!”
딱 잘라 말하는 은령 영주를 보며 서문후는 눈가에 잠시 이채를 피워올렸다.

“하면 추적대에게선 소식이 있나?”
자기에게 보냈던 서찰을 도둑질해 간 그놈을 잡았냐고 묻는 서문후의 물음에 은령 영주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직……”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슬며시 고개를 드는 은령 영주의 눈 속으로 소름 끼칠 정도로 완벽한 고요 상태에 놓여 있는 서문후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최선을 다해 그자를 찾게, 영주! 교 내의 이목이 있으니 영주의 세력을 함부로 움직이게 하지 말고
밖의 세력을 이용하게. 명심할 것은, 이 일은 어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는 거야.
알겠는가?”
“예, 수하들이 전력을 다하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절대 문후께 누가 안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서찰을 회수하지 못해 만에 하나라도 내 신분이 노출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영주도 충분히
짐작할 테지. 그렇게 되면 그대의 목숨은 부지하기가 어려울 걸세. 서두르게!”

냉정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뱉어 낸 청의복면인은 유생같이 온화한 동작으로 돌아섰다.
그때, 떠나려는 그의 모습을 초조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은령 영주가 느닷없이 복면을 벗어 던지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문후! 소녀를 도와 주십시오. 부디 제 앞길을 열어 주시길 바랍니다. 저에게 힘이 되어 주실 분은 문후밖에 안 계십니다, 문후!”
복면을 벗은 은령 영주의 모습은 화려한 아름다움을 지닌 이십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은은한 염기를 풍기는 그녀의 낭랑한 음성에 떠나려던 서문후의 발길이 멈춰 섰다.
그리고 서문후의 신형이 스르르 돌아섰다.
그는 심중을 알 수 없는 담담한 눈초리로 긴 흑발을 치렁거리며 자신을 향해 고개를 치켜 든 은령 영주의 아름다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은령 영주는 흑백이 뚜렷한 눈동자 가득 애원의 빛을 담은 채 유혹적인 자세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만 보고 있던 서문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 문제는 이번 일을 해결한 후에 생각해 보도록 하지.”
말을 마친 후 서문후는 창가로 몸을 돌렸다.
‘멍청한 계집!’
속으로 차가운 음성을 내뱉으며 그는 어둠이 내려앉은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열려진 창문을 통해 스르르 사라지자 은령 영주는 자리에서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동령, 아니, 백연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이기고 말 테다.”
촛불조차 밝히지 않은 방안에는 독랄한 기운을 머금은 그녀의 중얼거림만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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