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제10장 - 패배(敗北) 2

등록 2026.10.12 9.4천자 조회 1 좋아요 0 댓글 0 15세 이상 이용가
독로무한
22화. 제10장 - 패배(敗北) 2


달빛만이 희미하게 스며들 뿐 방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몽뇌산은 이미 밤이 깊었는데도 불구하고 불을 밝힐 생각도, 그렇다고 잘 생각도 안 한 채 침상 위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몽뇌산의 체력이 워낙 좋은 탓인지, 아니면 묘인아의 의술이 신의 경지에 도달해서인지는 몰라도 몽뇌산의 회복 속도는
묘인아도 놀라고 돌아갔을 정도로 빨랐다.
내상은 그가 독공을 익혔다는 것에 착안해서 독초와 약초들 간의 상승 작용을 이용해 적당히 손을 쓴 묘인아 덕에 회복은 물론 오히려 공력이 늘어나는 행운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젠 거의 피륙이 상처만 남았을 정도였다.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이 베인 검상도 사흘 동안 묘인아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놀라운 속도로 아물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새로이 금창약을 바르고 거기에 살을 빨리 돋게 하는 데 탁월한 효능이 있는 속생단(速生丹)까지 가루를
내어 뿌린 뒤, 잠시 얘기를 나누다 묘인아가 돌아간 지도 한참이 되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묘인아의 마지막 말이 맴돌고 있었다.
─`저는 좀 전에 나가신 두 분이나 몽 공자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제가 환자를 돌보는 의원이라
그런지, 저는 사람의 목숨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게 아닐까 생각해요. 일의 전후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언뜻 들으니 하후 대협께서 이번 일에 많은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다 말씀하시는 것 같더군요. 그분들께 계속
완강한 모습을 보이고 계시지만 실은 공자께서 고민 중이시라는
거 알아요. 저라면……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어요. 공자의
결심이 빠를수록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지게 된다면이야…… 더 말씀 안 드려도
무슨 얘긴지 아실 거라 믿어요. 그럼, 쉬세요.”
묘인아의 말마따나 사실 몽뇌산은 적당한 때를 봐서 열쇠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 전에 도대체 자신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기필코 알아야만 했다.
진짜 열쇠가 있는 곳을 말해도 모든 걸 안 다음에 말할 생각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열쇠가 있는 곳’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었다. 진짜 열쇠는 한 번도 그의 품을 떠난 적이 없었으니까.
열쇠는 언제든지 건네질 수 있는 대기 상태에 있었다.
결국 적들은 고생고생해서 가짜만 손에 넣은 셈이었다.
얼마 전 신비무리의 습격을 당하면서 혹시 이런 일이 있을지 몰라 대장간에서 만들어 둔 복제품이
금방 이렇게 소용이 있을 줄은 그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복제품을 만드는 일은 쉬웠다.
그저 조그만 열쇠 하나 만드는 일이 뭐가 어려울 게 있으랴!
옥합에 들어 있던 열쇠는 대부분의 금속들이 서늘한 냉기를 뿌리는 데 반해, 손에 쥐고 있으면 어찌 된 영문인지 좀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저잣거리에 나도는 것들과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그 열쇠가 정말 그 백발노괴가 말한 대로 무슨 무덤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된 것일까? 그 무덤에 뭐가 있기에……”
몽뇌산은 한 손으로 턱을 고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를 둘러싸고 사건은 자꾸 벌어지는데 아는 것은 거의 없으니 정말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나마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무덤’이란 걸 두고 두 집단이 맞서고 있는데 그가 그 한가운데에 끼여들었다는 것이었다.
“좋지 않아, 정말! 사부님 덕에 별 고생을 다 하는군.”
몽뇌산은 혀를 차며 애꿎은 베개만 툭툭 쳐댔다.
“나도 모르겠다. 언젠간 알게 되겠지. 불편해서 이것도 이제 그만 꺼내야 할 것 같고……”
말을 흐리며 몽뇌산은 슬쩍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기묘한 얼굴로 한참 발을 쳐다보던 그는 이내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휘리릭`─`!
검게 펼쳐진 밤하늘에 때아닌 은빛 광채가 피어오르며 사위가 서늘한 기운 속에 잠겨들었다.
마른 낙엽들이 그 은광(銀光)을 따라 올라 미친 듯이 춤을 추다가 빛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만에 조용히 땅으로 내려앉았
달빛에 휘감긴 사람과 검(劍)은 둘 다 가슴이 찡할 정도로 눈부신 허무(虛無)의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몽뇌산은 차갑고 싸늘한 모습이 아니라 어쩐지 고독하고 허허로워 보이는 혁무빙의 뒷모습을 굳은 얼굴로 주시했다.
산책 나왔다가 연검을 하고 있는 혁무빙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 벌써 한 식경 전이었다.
지난번에도 느낀 것이지만 혁무빙의 무위는 진정 놀라웠다.
인정하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혁무빙의 실력은 강호십수의 어떤 자보다도 우위에 있었다.
비록 강호십수 중 겨루어 본 것은 파천권 마운창이 전부였지만 혁무빙은 마운창 따위가 어찌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몽뇌산은 마운창과 무승부를 이룬 자신을 그에게 한번 견주어 보았다.
비록 무승부였으나 몽뇌산은 마운창이 끝까지 대들었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자신의 최고절기인 만청독수를 펼치지도 않았지 않은가?
사람 많은 저잣거리라 손속을 자제했을 뿐이지 마운창의 창술을 꺾을 자신이 없어 물러선 것이 아니었다.
아무튼 강호에서 남의 연무 광경을 훔쳐보는 것은 가장 금기시하는 일이었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몽뇌산은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하긴 검도의 절정에 이른 자가 아니라면 그가 검을 수련하는 모습을 보고도 훔쳐 배울 만한 것은 없을 터였다.
몽뇌산은 검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냥 느낌이 그랬다.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혁무빙의 기도를 감지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혁무빙의 검도는 ‘허’의 경지를 지나 ‘공’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에 웬만한 고수라면
혁무빙이 의도하지 않는 이상 깨닫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은색 무복 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날아올라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은은하면서도 찬란한 빛을 뿌리는 은검으로 하늘을 베어 가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시간이 흐르더라도 쉽사리 잊을 수 없는, 아니 평생 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었다.
몽뇌산은 혁무빙이 연검(練劍)을 마치고 돌아서기 전에 나무 그림자를 벗어나 불쑥 앞으로 나섰다.
“비무 한번 해보자!”
혁무빙의 훤칠한 신형이 천천히 돌려졌다.
그러나 이내 혁무빙은 아무런 대꾸 없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몽뇌산의 눈빛이 딱딱해졌다.
“검도원에서는 싸움을 피하라고 가르치나?”
혁무빙의 걸음이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서늘한 음성이 그의 어깨를 넘었다.
“싸우는 게 그렇게 소원이라면…… 따라와라!”
혁무빙은 뒤도 안 돌아보고 먼저 몸을 날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마을 외곽의 작은 구릉 위에 마주보고 섰.
혁무빙은 양팔을 늘어뜨린 채 몽뇌산을 무심한 시선으로 보았다.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몽뇌산은 양손을 십자로 교차시켜 가슴 앞으로 끌어올렸다.
두 사람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고즈넉한 달빛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몽뇌산의 신형이 먼저 지면을 박차 올랐다.
삼 장 정도 떨어져 있던 거리를 삽시간에 좁혀들며 몽뇌산은 쌍장을 질풍처럼 매서운 기세로 휘둘렀다.
하얀 기류가 번뜩이며 달빛을 받아 유성처럼 빛났다.
동시에 혁무빙의 신형이 희끗하게 번뜩였다.
순간, 그의 허리춤에서 눈부신 은광(銀光)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달빛이 으스러지며 대기가 비명을 질렀다.
퍼엉`─`!
마치 팽팽하게 휘어져 있던 대나무가 땅을 후려치는 것 같은 소리가 울리면서 구릉 전체가 들썩거렸다.
먼지가 달빛을 가리며 자욱이 피어올랐다.
마른 나뭇잎이 우수수 날리는 가운데 두 사람이 끌어안을 듯 꼭 맞붙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몽뇌산의 눈빛이 파랑(波浪)처럼 흔들렸다.
“제기랄!”
그러나 혁무빙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몽뇌산은 목줄기를 서늘하게 하는 검의 감촉을 느끼며 이를 악 물었다.
그런 그를 향해 무심한 시선을 던지며 혁무빙은 몽뇌산의 목에 대어져 있던 자신의 검을 천천히 거둬들였다.

스르릉`─`!
검이 맑은 음향을 토하며 검집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몽뇌산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
“공정한 싸움을 한답시고 독공을 안 쓴 건가? 정말 어리석군. 고생하면서 독공을 익힌 이유가 뭔가? 결국 싸우기 위해서,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었나? 진정한 고수라면 어떤 싸움에서건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내가 오늘
널 죽일 수도 있었다는 것만 알아 둬라.”
보기 드물게 긴말을 하고 나서 혁무빙은 조용히 몸을 돌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서 있던 몽뇌산의 입에서 나직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왜 죽이지 않았지?”
혁무빙은 몽뇌산의 눈동자가 달아오르는 걸 지켜보며 무심하게 답했다.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
참담한 얼굴로 묵묵히 서 있는 그를 남겨 두고 혁무빙은 구릉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달빛을 받아 그의 은색 무복이 환한 빛을 뿌렸다.
혁무빙의 모습이 사라지자 홀로 남은 몽뇌산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옷자락도 건드려 보지 못했다. 몽뇌산, 몽뇌산! 넌 이거밖에 안 되는 놈이었나……?”
독백에 쓰디쓴 자책이 묻어 나왔다.
“독공을 썼어도 질 수밖에 없었다. 절정에 이르지 않는 이상 어떤 무공도 그에게 안 통할 것이다. 절…… 정……!”
독공의 절정!
그건 바로 독중지성(毒中之聖)을 뜻하는 것이었다.
몽뇌산은 어떤 결심이 선 듯 단호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평상시의 얼굴을 회복했다.
“좀 춥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 말고 갑자기 그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윽! 상처가 도로 터졌나 보군. 묘 소저가 한마디하겠는걸.”
피가 배어나오는 가슴을 감싼 채 투덜대며 돌아서는 그의 눈동자는 장난스런 음성과는 달리 깊숙이 침잠(沈潛)되어 있었다.
그의 신형이 구릉 아래로 사라진 후 나무 그림자가 짙은 곳으로부터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패배가 고통스럽겠지만 스스로 이겨 내는 수밖에 없네. 사제의 검도는 이미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어 자네 말대로 절정에 이른 무공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그에겐
소용없어. 패배 의식에서 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나처럼 될 수밖에 없네. 나처럼……!”
사그라지는 그의 음성은 그가 입고 있는 회의만큼이나 우울한 여운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모습도 어느새 구릉 위에서 사라졌고, 남은 것은 달빛뿐.
밤은 점점 깊어만 가고 있었다.
“달빛이 참 곱죠?”
몽뇌산은 자신의 객방이 있는 후원에 발을 디디다 말고 느닷없이 들려 온 목소리에 발길을 멈췄다.
그가 멈추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연못가 바위에 앉아 있던 백의여인, 묘인아가 고개를 돌렸다.
‘묘 소저?’
그녀는 몽뇌산을 보며 말없이 손으로 옆에 놓인 바위를 가리켰
몽뇌산은 그녀의 손끝을 따라가다 말고 뜨끔하는 눈빛이 되었
‘눈치챘나?’
잠시 머뭇거리던 몽뇌산은 피가 배어나온 가슴 앞에 단단히 팔짱을 끼고는 이내 입가에 장난스런
웃음을 띄우며 냉큼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묘 소저! 왜 주무시지 않고……?”
“몽 공자! 제가 뭐 하나 물어 봐도 괜찮을까요?”
백의여인, 묘인아의 입에서 차분하고 맑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몽뇌산은 우선 다 아물어 가던 상처가 도로 터진 것을 그녀가 모르고 지나간 데 대해 안심하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언제부터 무공을 익히셨나요?”
고요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빛을 마주보며 몽뇌산은 생각을 더듬었다.
“가만있자, 음…… 오 년 전이군요.”
“의외로 시작이 늦으셨군요. 놀라워요. 오 년 만에 그와 같은 성취를 이루시다니! 독공은 연마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묘인아는 진심으로 감탄한 듯 눈을 크게 뜨고 몽뇌산을 바라보았다.
몽뇌산은 좀 전의 일이 생각나 내심 쓴웃음을 지었으나 겉으론 환한 표정을 지었다.
“천재이기 때문일까요?”
장난스러운 그의 얼굴을 보며 묘인아는 정색을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몽 공자를 치료하면서 느낀 건데 몽 공자께선 골격이 좀 좋을
뿐, 사실 무공을 익히는 데 조건이 최상이라곤 할 수 없어요.”
“……?”
몽뇌산은 묘인아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묘인아는 그의
눈빛을 직시하며 분명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몽 공자의 성취는 몽 공자의 자질 때문이 아니라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아닌가요?”
되물어 오는 묘인아의 시선은 그윽하기만 했다.
몽뇌산은 갑자기 당황스런 기분이 들었다.
“우리 사부님을 만나시게 되면 그 말씀 좀 꼭 해주세요. 절대 동의는 안 하시겠지만요.”
몽뇌산은 묘인아의 눈빛을 피하며 그녀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소녀의 말은 진심이에요. 그런데 어디, 불편하신가요?”
묘인아가 거북한 듯 몸을 뒤척이는 몽뇌산을 빤히 들여다보자, 몽뇌산은 깜짝 놀랐다.
“아니오. 불편하기는요. 밤이 늦었으니 그만 일어나는 게……?”
“네, 그러죠.”
조심스럽게 말꼬리를 늘어뜨리는 그를 향해 묘인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몽뇌산은 객방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문득 몸을 돌려 묘인아를 불렀다.
“묘 소저!”
“네?”
그를 바라보는 묘인아의 눈빛은 맑고 따뜻했다.
몽뇌산은 마음이 푸근해지는 걸 느꼈다.
“고마워요.”
“뭐가요?”
“그냥…… 전부 다요. 그럼!”
쑥스러운 얼굴로 서둘러 돌아서는 그에게 묘인아가 잊을 뻔했다는 듯이 살짝 한마디를 던졌다.
“아! 그러고 보니 저도 같이 가야겠네요. 도로 도진 상처를 살펴보자면.”
몽뇌산은 옆에 와서 나란히 선 묘인아를 머쓱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묘인아의 부드러운 웃음 소리와 함께 그들의 신형이 점점 멀어져 갔다.
* * *
동파달(董派達)은 ‘빌어먹을’이란 소리를 벌써 세 번째 내뱉고 있었다.
술잔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와 더불어 그의 손목 안쪽에 자리한 흑점도 같이 떨림을 보였다.
애초에 산중에서 야숙을 하고 있던 으스스한 분위기의 적포인의 품에서 옥합을 탈취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 기분 나쁜 자의 물건은 건드리는 게 아니었는데 저절로 나가는 손이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던 것이다.
동파달은 귀한 것이 들어 있을 것 같았던 옥합에서 사향 냄새가 진동하는 서찰 한 장만이 달랑 나오자 뭔가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그러나 남들보다 유달리 강한 그의 호기심은 서찰을 읽어 보라고 그를 유혹했다. 서찰에 쓰인 이상한
글을 보자마자 동파달은 일생일대의 실수를 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건드려선 안 되는 것을 건드렸다는 것을!
서둘러 실수를 만회하려 했지만 적포인에게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동파달은 자신이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위기에 직면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강호에는 본시 세상에 드러난 것 외에도 여러 부류의 집단과 인물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
중 어떤 부류는 아예 있는 줄도 모르고 사는 편이 만수무강(萬壽無疆)을 위해 바람직했다.
그런데 동파달은 손대서는 안 되는 물건을 건드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당장 살 길을 찾는 것이었다.
동파달은 길을 가던 겉만 멀쩡해 보이는 자식의 보따리에다가 그 옥합을 슬쩍 밀어 넣은 것으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부터 동파달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그를 아주 끈적끈적하게 휘감았다.

그가 이십 년 동안 강호를 종횡(縱橫)하며 남의 물건을 내 것같이 내 물건도 내 것같이 지내 오면서 누군가에게 쫓김을
당한다는 것은 평생 꿈꿔 보지도 않은 일이었다.

도둑에게 뒤쫓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큼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도둑!
그렇다. 동파달은 도둑이었다. 그것도 아주 실력(實力)있는 도둑이었다.
오죽하면 그의 별호가 무영괴도(無影怪盜)일까!
그림자조차 없을 정도로 빠른 신법과 강호인의 물건만 훔치는 기이한 행적(行績)!
그래서 무영괴도였다.
그는 평생 한 번도 남에게 뒤를 밟혀 본 적이 없었고, 한 번도 훔친 물건을 포기(抛棄)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 그 두 가지 일이 모두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었다.
‘그놈의 물건!’
동파달은 속으로 치를 떨었다.
술을 입 안에 발작적(發作的)으로 털어 넣으며 동파달은 그 일을 머리에서 지우려고 노력했다.
그는 술을 한 잔 더 따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 놈들도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선 자신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다년간 축적된 경험으로 이런 복잡한 곳에서 사라지는 거야말로 식은죽 먹기가 아닌가!
그래, 몇 년 동안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은거(隱居)라도 해 있자.
내가 감쪽같이 사라져서 몇 년 동안 꼼짝하지 않는다면 그자들이 나를 어떻게 찾아 내겠는가!
동파달은 눈빛을 빛냈다.
술잔을 비우고 그는 천천히 일어났다.
계산을 치르고 주루 밖으로 나와 동파달은 자연스럽게 군중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의 모습은 태평스러워 보였다.
느긋하게 걷던 동파달의 모습이 어느 순간부터 흐릿해지더니 이내 군중들 속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자신했던 게 과연 허풍은 아닌 듯 정말 감쪽같이 사라져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번화한 마을 대로변에서 동파달은 그렇게 신비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삼경이 훨씬 넘은 시각.
번화한 중심가를 벗어난 마을의 외곽, 옹기종기 몰려 있는 자그마한 장원들 중 해가 지자마자 일찌감치 불이 꺼진 어느
장원에선 지금 은밀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그 움직임의 근원지는 장원 안쪽 깊숙이 자리한 여인의 침실이었다.
달빛을 받아 희끄무레하게 형체를 드러낸 분홍빛 휘장이 곱게 드리워진 널따란 침상에서 문득 누군가가 소리없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불을 살짝 젖히며 침상에 일어나 앉은 그 사람은 한참 동안 미동조차 없었다.
그 사람, 동파달은 밤고양이보다 더 예리하게 주위를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가 찾는 기운은 어디에서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제서야 겨우 동파달은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을 느꼈다.
여기 며칠간만 숨어 있는 거다. 놈들의 이목이 사라지고 나서 그때 장소를 옮기는 게 좋겠지.
동파달은 자신이 있는 방안을 둘러보다 옆에 누워 자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과부(寡婦)의 집에 숨어 있다니, 이 얼마나 기발(奇拔)한 생각인가!’
동파달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자를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는 문득 생리적인 욕구(慾求)를 느꼈다.
여자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측간에 대한 욕구였다.
동파달은 다시 한 번 주위의 기척을 살피고는 만약의 사태(事態)에 대비하며 조심스레 측간으로 향했다.
그가 막 측간의 문을 열려고 할 때, 그 목소리가 들렸다.
“동파달! 이젠 얘기를 좀 나눠 볼까?”
동파달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음(音)의 고저(高低)가 전혀 없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동파달은 더 이상 측간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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