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제11장 - 출발(出發) 1

등록 2026.10.12 1.0만자 조회 1 좋아요 0 댓글 0 15세 이상 이용가
독로무한
23화. 제11장 - 출발(出發) 1


“자네 지금 뭐 하는 겐가, 으응?”
공야선표는 몽뇌산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벌써 세 번째 같은 질문을 하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할 얘기가 있다며 불러다 앉혀 놓고는 침상 위에 턱 하니 앉아 발만 내려다보고 있으니……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던 하후극도 몽뇌산의 기이한 태도에 의문을 표시하고 나섰다.
“자네가 할 얘기라는 게……?”
“가만계세요. 이제 됐습니다!”
하후극의 말은 몽뇌산의 단정적인 외침에 묻혀 버렸다.
몽뇌산이 열쇠에 대해 고집스레 함구(緘口)한 다음부터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공야선표의 얼굴은 이 순간에 이르러 기도 안 찬다는 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되다니, 뭐가 말인가?”
하후극은 공야선표가 행여 안 좋은 소리를 할세라 얼른 묻고 나섰다.
몽뇌산은 의기 양양한 얼굴로 하후극을 돌아보며 손바닥 절반만한 크기의 인피(人皮) 조각 같은 것을 흔들어 보였다.
너무나 뜻밖의 행동에 완전히 할말을 잃은 두 사람을 향해 씨익 웃어보이며 몽뇌산은 발바닥에서 무언가를 떼냈다.
그러더니 뜨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에게 몽뇌산은 주먹을 내밀었다.
“안에 있는 게 뭔지 맞춰 보세요.”
빙글거리는 그를 보며 공야선표는 거의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자네…… 지, 지금 우리하고 장난하자는 겐가? 이 중요한 때에 열쇠 얘기만 나오면 벙어리가 되면서, 응?”
푸들푸들 떠는 공야선표의 다그침에 몽뇌산은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유심히 살피던 하후극이 몽뇌산의 주먹을 직시하며 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맞추면 뭘 해줄 텐가?”
“뭐, 뭐든지요.”
몽뇌산은 진지한 얼굴로 선언했다.
“이젠 자네까지 장단을 맞추나? 허어! 잘들 하는군, 잘들 해!”
공야선표는 진심으로 맞춰 볼 생각이 있는 듯한 하후극의 태도에 기 막혀했다.
몸을 획 돌리고 앉은 그를 힐끔 바라보다 하후극은 몽뇌산의 주먹을 보며 조용히 답을 얘기했다.
“그건…… 열쇠가 아닌가? 자네 사부께서 자네에게 준 옥합 안에 있던 바로 그 열쇠!”
“뭐?”
하후극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야선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침상으로 달려가 거칠게 몽뇌산의 주먹을 폈다.
과연 몽뇌산의 주먹 안에서 나온 것은 하나의 구리열쇠였다.
몽뇌산은 열쇠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부들부들 떠는 공야선표의 감격스런 얼굴을 보며 짐짓 퉁명스럽게 말했다.
“장난에는 관심없으시다면서요?”
그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열쇠만 들여다보던 공야선표가 문득 얼굴을 찌푸리며 몽뇌산을 예리하게 훑어보았다.
“설마 이것도 가짜는 아니겠지?”
“제가 무슨 열쇠장순가요, 줄줄이 열쇠만 갖고 다니게? 걱정이 아니라 의심도 팔자십니다. 자, 빨리 도로 주기나 하세요.”
몽뇌산이 손을 쑥 내밀자 공야선표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가 다가오면 밖으로 아주 나가 버릴 요량인지 문가에 바싹 붙어 있는 공야선표를 보며 몽뇌산은 싱긋 웃었다.
“대단한 신법이시네요. 놀랍기는 하시겠지만 열쇠는 돌려주셔야겠습니다. 사부님께서 꼭 제 손으로 전달하라고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얼른 주세요!”
몽뇌산은 문가에 서서 망설이는 공야선표를 보며 강경하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하시지요. 열쇠는 원래 그가 가져다 주기로 한 것이고 우리는 그의 보호를 맡은 것뿐이니,
그냥 동행하며 그의 신변이나 지켜 주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하후극까지 몽뇌산을 지지하고 나서자 공야선표는 마지못한 듯 머뭇거리며 열쇠를 내놓았다.
몽뇌산이 품안에서 전낭을 꺼내 그 안에 열쇠를 넣는 광경을 지켜보던 하후극이 문득 그에게 말을 건넸다.
“누구도 찾아 내지 못할 곳이군!”
몽뇌산은 하후극의 감탄에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열쇠를 발바닥에 붙이고 다닌 건가, 이제까지?”
몽뇌산은 하후극의 진지한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설마 아까 그게 자네 살점은 아니겠지?”
공야선표가 해괴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자 몽뇌산은 짐짓 펄펄 뛰는 시늉을 했다.
“제가 미쳤습니까? 제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살을 떼었다 붙였다
하겠습니까? 아까 그건 돼지가죽에다가 몇 가지 약물을 써서 인피(人皮)와 흡사하게 만든 거예요. 옥접초(玉接草)란 독초가 있는데, 그것의 진액은 한번
붙으면 잘 안 떨어지죠. 바르면 곧바로 스며들기 때문에 겉으로 보아선 티도 안 나구요.”
“그러니까 돈피(豚皮)와 독초 하나를 이용해서 감쪽같이 모두를 속여넘겼군?”
“속이다니요? 전 말을 안 했을 뿐이지 속인 적은 없습니다.”
몽뇌산이 정색을 하자, 공야선표는 열쇠를 보고 꽁했던 마음이 풀어진 듯 너그러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그래! 그건 그렇고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우린 어서 서둘러 떠나세. 한시라도 빨리 개봉에 열쇠를 갖다 줘야 하네.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 서둘러야 해. 그 동안 지체한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떠나도 시간이 부족할걸세.”
“지금 당장은 곤란한데요?”
공야선표는 금방이라도 나갈 것처럼 문고리를 잡고 서서 몽뇌산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아니, 왜?”
“두 분의 걱정을 덜어 드렸으니 제 궁금증도 좀 덜어 주셔야죠?
이제 설명해 주세요. 설명을 듣기 전엔 한 발짝도 못 움직입니다.”
몽뇌산은 눈썹을 단호하게 치뜨며 말을 마치고 나서 고집스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공야선표가 어쩌면 좋겠느냔 눈빛으로 돌아보자 하후극이 무거운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 얘기해 주지. 단, 공야 선배의 말처럼 우린 시간이 촉박하니 가면서 말해
주겠네. 어차피 자네도 알게 될 일이니 조금 빨리 알아도 상관없겠지. 그럼, 묘
소저에게 말해서 여행할 차비를 하게.”
“자, 자! 자네 소원대로 됐으니 서두르게, 제발! 자네 때문에 가뜩이나 속도가 느릴 텐데, 제 시간에 가자면……”
“마차를 사서 타고 가면 간단한데요, 뭐! 게다가 전 아직 환자 아닙니까?”
시원하게 말하는 몽뇌산을 보며 공야선표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알았네, 그러지. 그러니까 제발 준비나 빨리 하게.”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몽뇌산에게 사정했다.
공야선표가 그러거나 말거나 몽뇌산은 급할 것 없다는 듯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몽뇌산의 굼뜬 동작을 보고 애가 탄 나머지 묘인아를 직접 불러오랴, 객잔 주인에게 마차 부탁하랴, 온갖 부산을 떤 끝에 겨우 여행 준비가 끝나자 공야선표는 십 년은 늙어 버린
것처럼 보였다.
몽뇌산의 상처가 나을 때까지만 동행하겠다는 묘인아와 하후극과 미리 무슨 애기가 있었는지 두말없이 따라 나서는 혁무빙까지 합세하고 나자 일행은 모두 다섯이었다.
공야선표가 송래객잔의 주인인 만인송을 통해 구해 온 마차에 올라타며 몽뇌산은 속으로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쨌든 개봉까지는 고생 않고 편하게 가겠군. 게다가 묘 소저와도 함께 있을 수 있고……’
몽뇌산은 묘인아를 슬쩍 바라보며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일행을 모두 태운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송래객잔 주인 만인송의 말마따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들 일행이 소담스레 내리는 그 해 첫눈을 맞으며 동화현을 떠난 것은, 만력 사십년 정월 스무하루였다.

* * *
장봉황은 지친 몸을 이끌고 건물 자체보다 현판이 더 그럴싸한 금성루(金星樓)란 주루로 발길을 옮겼다.
무창부(武昌府) 경내의 무창성 외곽에 위치한 금성루는 성 중심에 자리잡은 주루들에 비하면 한참 떨어졌지만 떨어져 가고 있는 건 장봉황의 전낭(錢囊) 속 역시 마찬가지였다.
울적한 심사로 주루 안에 들어서자 가느다란 눈매에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점소이 하나가 쪼르르 달려나왔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장봉황의 기운없는 모습에 잠시 멈칫하던 점소이는 그를 한차례 훑어보고는
나름대로 계산이 끝난 듯 얼굴 전체에 상냥한 미소를 매달았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 저희 금성루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지칠 대로 지친 장봉황은 점소이의 아양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귀찮은 듯 손을 내저으며 빨리 자리나 안내하라는 시늉을 했다.
전망 좋은 주루 이층의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일단 차로 목을 축이고 나자 장봉황은 그제서야
기운이 좀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좀 생기가 돌기 시작한 그에게서는 입맛 까탈스럽기로 소문났었던 귀공자 장봉황의 모습이 살아나고 있었다.
“이 차는 맛이 좀 별로군. 청명(淸明) 때 딴 찻잎을 쓴 게 틀림없어. 그처럼 이른 시기에 찻잎을 따면 맛이 깊지 못하지. 모름지기 찻잎은 곡우(穀雨) 전후에 따야 제 맛이 나는 법이거든.
가장 상품으로 치는
것은 그 중에서도 곡우 바로 전날 딴 것이지.”
장봉황은 점소이의 가느다란 눈이 감탄으로 휘둥그래지는 것을 보며 만족스런 표정으로 목을 꼿꼿이 세웠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공자! 강남에서 오신 모양이군요. 강남의 귀공자분들은 취향이 고상하시어 차맛에 까다로우시단 얘긴 많이 들어서 알고 있습지요. 이렇듯 훌륭하신 귀공자를 모시게 되다니 본 주루의 영광입니다.”
점소이는 한껏 장봉황을 치켜세워 주었지만 그의 내심은 좀 달랐다.
‘쳇! 돈은 좀 있어 보이지만 먼지나 잔뜩 뒤집어쓰고서 되게 재는군! 하는 짓으로 봐선 오늘 주방장이 고생 좀 하겠는데?’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야 어떻든지 간에 점소이의 표정은 간이라도 빼어 줄 듯 곰살궂었다.
장봉황은 점소이의 감동을 오래 지속시켜 주리라 마음먹고 지식을 한껏 뽐내며 아주 우아하게 주문을 했다.
“옥미죽은 되나? 송화피단(松花皮蛋)은?”
둘 다 미식가들을 즐겁게 하는 고급요리에 속하는 것이었다.
주루를 훑어보며 미심쩍어하는 장봉황의 눈빛에 점소이는 난처한 기색을 가득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옥미죽은 어떻게 해보겠지만 그 송, 아! 송화피단은 안 될 것 같은데…… 뭐, 다른 것으로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걔? 좋아! 뭐, 할 수
없지. 그럼 오향리어(五香鯉魚)로 하지. 그건 되겠지? 아, 잉어는 반드시 파와 생강, 오향분(五香粉), 팔각회향(八角茴香)에 하룻밤 동안 담가 놓은 것을 써야 하네. 안
그러면 참맛을 내기 힘들거든.”
점소이는 요리법에까지 참견을 하고 나서는 장봉황에게 아예 ‘주방장을 불러올까요?’ 하고 말하려다가 손님의 체면을
존중해 주는 의미에서 혀끝까지 치민 말을 도로 밀어 넣었다.
사실 성의 중심가도 아니고 변두리에 있는 주루에서 최고급 음식을 찾는 것은 좀 문제가 있었다.
그나마도 주변 마을 유지의 식도락(食道樂)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 금성루 주방장이 얼마 전에 특별히 조리법을 배워 온
옥미죽과 오향리어마저 없었다면 장봉황은 정말 실망할 뻔하였다.
먹고 싶은 걸 못 먹는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장봉황은 평소 그가 즐기던 홍소백채마저 얘기 꺼내기 무섭게 점소이가 고개를 흔들자 서글픈 한숨을 내쉬었다.
처량맞은 생각이 드는 것을 밀어 내며 장봉황은 손을 내저었다.

“그럼 그것만 하지.”
“예? 예!”
점소이는 장봉황이 어려운 음식을 더 생각해 내기 전에 재빨리 대답하고 물러났다.
점소이는 주문을 듣고 부르르 떨 주방장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친 발걸음을 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장봉황은 음식이 나올 동안 기품있게 찻물을 홀짝거리며 바깥 구경을 했다.
“호오! 눈이잖아?”
그리 춥지 않은 곳에 사는 덕에 겨울에도 눈을 볼 일이 별로 없었던 장봉황은 소담스러운 눈송이를 보며 감상에 흠뻑
젖어들었다.
“아! 시상(詩想)이, 시상이 떠오르려 하는구나!”
그러나 막 떠오르려던 시상은 저편에서부터 주루 쪽으로 걸어오며 지나는 사람들을 유심히 훑어보던 작달막한 현의노인과
우연히 시선이 마주치는 바람에 팍삭 꺼지고 말았다.
장봉황은 놓쳐 버린 시상에 대한 안타까움을 꾸욱 누르며 연장자에 대한 예의로 가볍게 목례(目禮)를 해 보였다.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노인의 주름진 눈가에 짧게 희색(喜色)이 스치는가 싶더니 노인의 모습은
이내 장봉황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노인의 모습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 일은 곧 장봉황의 머릿속에서도 지워졌다.
시상도 사라져 버린 터라, 아무 일도 안 하고 한가롭게 음식을 기다리고 있다 보니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
‘도 산적! 내 이, 이놈을……!’
도곤의 ‘도’ 자만 떠올려도 이가 갈리는 게 장봉황으로선 너무나 당연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그 악질적인 산적 놈을 잡아서 분풀이를 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이내 생각을 조금 다른 데로
돌렸다.
바로, 할 수 있는 가장 지독한 복수 방법을 생각해 내려는 것이었다.
“지금보다 백배는 추울 때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서 한 사나흘간 묶어 둬? 아니면 여자들이
보는 앞에서 홀랑 벗겨 뜀박질을 하게 할까? 아니야, 그건 너무 쉬워. 그놈은 뻔뻔해서 그런
일쯤은 쉽게 해낼 거야. 아, 그렇지! 방에 가두고서
한 달 동안 목욕도 못 하게 하고 옷도 못 갈아입게 하는 거야. 그놈은 원래 지저분하기 때문에 금방 이가 바글바글 들끓을
거야. 으으…… 더러워라! 얼마나 오랫동안 기분이 찜찜할까?”

장봉황은 마치 자기가 그런 일을 당한 것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로서는 생각만으로도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 싫은 일이었지만 과연 도곤의 생각도 같을는지……?
그가 한창 염두(念頭)를 굴리고 있을 때 느닷없이 그를 부르는 음성이 들려 왔다.
“아이야! 합석을 해도 되겠느냐? 이 자리가 좋아 보이는구나. 앞이 훤히 트여 눈 내리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고개를 돌린 장봉황은 눈앞에 서 있는 작달막한 현의노인을 떨떠름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밖엔 눈이 제법
심상치 않게 오고 있는데도 노인의 어깨에는 한 송이의 눈도 붙어 있지 않았다.
‘뛰어와서 그런가?’
장봉황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노인의 모습을 가만히 살폈다.
가까이서 보니 노인은 더 작아 보였다. 뒤로 동여맨 허연 백발과는 달리 얼굴만은 불그스레하니 동안(童顔)이었다.
그 때문인지 보면 볼수록 노인의 나이는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노인은 여전히 빙글거리며 그를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장봉황은 노인의 청을 거절할 명분이 없자 몸을 일으키며 몸에 밴 예절로 정중히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지요. 소생은 항주에서 온 장봉황이라 합니다.”
“봉황이라…… 좋은 이름이구나, 아이야! 이 늙은이는 남효(南曉)라 한다. 너는 어디로 가는 길이냐?”
“소생은 개봉으로 가는 길입니다. 견문을 넓히려 천하 유람을 나왔지요.”
장봉황은 조금도 귀찮은 기색 없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남효란 현의노인은 그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계속 싱글거렸다.
“그래, 보고 배운 것은 많으냐? 따르는 하인도 없어 보이는데 혼자 다니자면 고생이 많겠구나. 하긴,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
“어르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비록 고생은 많았지만 배운 것도 적지 않지요.”
‘특히 산에서는 산적을 조심하라는……!’
장봉황은 못다 한 말을 속으로 뇌까렸다.
“그래, 너같이 귀한 집안의 자제로 보이는 아이들은 종종 산적을 만나 재물을 모두 털리기도 하지.”
“아, 아니, 그걸 어떻게……?”
장봉황은 눈가의 주름마다 웃음을 알알이 매단 현의노인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토끼눈을 하고 물었다.
놀람을 표시하던 그의 눈동자는 점점 의심으로 바뀌어 갔다.
현의노인은 짐짓 동그라니 어린아이 같아 보이는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도둑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내 나이가 몇인데 산적질이나 하고 있겠느냐?”
“죄, 죄송합니다, 어르신! 그때 워낙 큰 고생을 한지라……! 어르신, 정말 죄……”
당혹스러워하며 허겁지겁 사죄의 말을 늘어놓는 장봉황을 노인은 고갯짓으로 간단히 가로막았다.
“아니, 아니, 그 얘긴 그만 하고 우리 이렇게 하기로 하자!”
“예?”
장봉황은 뭔가 즐거운 계획이 있는 듯 다시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노인의 얼굴을 눈을 끔벅거리며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이러한 표정은 자칫 멍청하게 보일 수가 있어 그가 가장 꺼리는 표정이었지만, 이 상황에선 달리 지을 표정이 없었다.
“네 이름이 장봉황이랬지? 누가 지어 준 거냐?”
“하, 할아버님께서……”
“으음! 나랑 잘 맞으실 것 같구나. 물론 돌아가셨겠지?”
“예? 예! 오, 오 년 전에……”
얼떨떨한 기색이 역력한 장봉황의 더듬대는 대답에 노인은 혀를 찼다.
“쯧쯧! 물론 네 할아버지라면 나보다 한참 어릴 테지만 그래도 내 나이또래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 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야. 그렇지 않느냐?”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기에……
“예? 물론 그렇지요.”
장봉황은 귀신에게 홀린 듯한 표정이면서도 예절 교육에 유달리 철저했던 선조부(先祖夫) 덕에 꼬박꼬박
대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 그건 그렇고 너는 이제부터 나를 할아버지라고 불러라! 나는 너를 봉황이라 부르마.”
노인의 얼굴에는 장봉황이 예뻐 죽겠다는 표정이 그득했다.
“그, 그게……?”
장봉황은 얘기가 이상한 쪽으로 치달려가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거렸다.
“봉황아`─`!”
“예? 예, 할아버지!”
장봉황은 노인의 우렁찬 부름에 놀라 저도 모르게 할아버지 소리를 입에 담고 말았다.
그가 뭔가 찜찜한 기분에 떨떠름한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자 이제 막 그의 할아버지가 된 현의노인은 껄껄 웃으며 대단히
기꺼워했다.
“좋구나, 좋아! 자, 봉황아! 할아버지로서 너에게 몇 마디 물으마. 무공을 익힌 적이 있느냐?”
“무공이요? 아니요, 한 번도 없습니다.”
탕!
노인은 싱글거리며 손바닥으로 탁자를 소리나게 쳤다.
“좋아, 좋아! 하늘이 이 늙은이를 어여삐 봐주시는구나.”
뒤에 이르러서 혼자말하듯 중얼거리던 현의노인은 다시 장봉황을 바라보았다.
“호신무공조차 익힌 적이 없단 말이지?”
“예!”
“왜?”
문득 노인이 눈빛을 빛냄과 동시에 몸을 내밀며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예?”
“왜 호신무공조차 익히지 않았냔 말이다. 혹, 무슨 결함이라도……?”
‘결함’ 운운하는 노인의 의미 심장한 표정에 장봉황은 펄쩍 뛰었다.
그에게 결함이 있다니,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
인간으로서는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자신하는 장봉황의 입장에선 절대 그냥 웃어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결함이라니요?”
정색을 하고 따지는 장봉황에게 노인은 장난스런 얼굴로 히죽 웃어 보였다.
“아니면 됐다. 그럼 왜 안 익힌 거냐?”
“그거야…… 그, 그거야……”
“그거야, 뭐?”
노인은 말끝을 흐리는 장봉황에게 더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장봉황은 난처한 얼굴로 노인의 눈빛을 피했다.
땀으로 범벅이 돼가며 무공을 익힐 경우, 그의 소중한 품위와 늘씬한 몸매가 망가질까 봐 그랬다고 어떻게 대답한단 말인가?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는 것은 그리 기분좋은 일은 아니지. 그러나 검을 빼 들어 악당을 한 칼에 물리치는 네 모습을 상상해 보아라! 그 어떤 모습도 그보다 더 멋있지는 않을 거다.”
장봉황은 한번 상상해 보라며 눈을 지그시 감는 노인의 말 속에 빠져 드느라 노인이 다시 한 번 귀신같이 자신의 속마음을 꼬집어 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가 눈을 감고 미인들을 괴롭히는 수많은 악당들을 혼자서 물리치는 장면을 그려 보고 있을 때, 그의 상상을 깨버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공자! 음식 나왔습니다. 좀 늦었지요? 죄송합니다. 주방장이 최선을 다하느라…… 헤헤!”
장봉황은 멋쩍은 얼굴로 눈을 뜨곤 짐짓 단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점소이에게 물러가도 좋다는 손짓을 했다.
점소이가 음식도 확인하지 않고 그냥 보내 주는 장봉황의 행동에 ‘살았구나’ 하는 표정으로 물러가려 할
때, 느닷없이 그의 발길을 붙잡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오향리어가 이게 뭐야? 그래, 이 주루에선 이렇게밖에 못 하나?”
장봉황은 누군가가 무척 귀에 익은 목소리로 자신이 미처 살펴보지 못한 음식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나서자 얼른 요리가
담긴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방금 얘기한 사람의 말대로 접시에 담긴 오향리어는 잉어살이 너무 익어 군데군데 으스러져 있었다.
장봉황은 제대로 지적해 준 그 사람을 찾아 눈길을 돌렸다.
점소이 옆에서 머쓱한 얼굴로 서 있는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깍듯하게 사의(謝意)를 표하려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엇? 너, 너…… 으으…… 도 산적! 네, 네 이놈`─`!”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상황을 주시하는 현의노인을 뒤로한 채 장봉황은 싹싹 빌어대는 도곤을 향해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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