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제11장 - 출발(出發) 2

등록 2026.10.13 1.1만자 조회 1 좋아요 0 댓글 0 15세 이상 이용가
독로무한
24화. 제11장 - 출발(出發) 2


사천성(四川省).
북으로는 감숙(甘肅), 협서성(陜西省)과 맞닿아 있고 동으로는 호남(湖南), 호북성(湖北省)과 경계를 나누고 있으며 남으로는 귀주(貴州), 운남성(云南省)과 이웃해 있는 곳!
사천성은 구당협, 무협, 서릉협의 장강삼협으로 대표되는 험난한 자연환경과 눈물이 날 정도로 매운 요리로 유명한 곳이다.
이백 년 전만 하더라도 사천성, 하면 아미현(峨眉縣)에 있는 아미산(峨眉山) 금정봉(金貞峰)의 아미파(峨眉派)와
관현(關縣) 경내의 청성산(靑城山) 장인봉(長人峰)에
위치한 청성파(靑城派)가 제일 먼저 떠올랐지만,
세월이 흘러 당당했던 무림 구대문파의 명성이 퇴색하면서 그 생각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
작금에 이르러 아미산이나 청성산 대신 사람들의 머릿속을 차치한 것은 당가타(唐家)라는 이름이었다.
사천성뿐 아니라 다른 성에서도 이 이름은 꽤 유명했다. 당가타라는 지명은 역대 왕조의 지리서에도 나와 있지 않은 것이지만 그 일대를 부르는 공식 명칭인 성도부(成都府) 서주현(余又州縣)이라는 이름보다 더 보편화되어 있었다.
사실 당가타는 사천당문의 터전이 있는 서주현 일대 천여 평에 달하는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보다 상세히 설명하자면 우선 성도부의 오른편으로 호상산(虎象山)이 길게 자리하고 있고, 왼편으로는 장강의 하류인
중강(中江)이 지나간다.
사천성 북부의 민산(岷山)에서 시작되어 남쪽으로 흐르는 민강(岷江)이 성도부 남부를 가로질러 백여 리를 더 흐르면 서주에서 중강과 만나게 되는데, 바로 그곳이 당가타였다.

당가타를 터전으로 한 사천당문의 외관은 그저 한 가문의 장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노을 속으로 보이는 당문의 모습은 그 위대한 저력을
말해 주듯 유난히 위풍당당해 보였다.

사천당문의 내원 깊숙한 곳.
당가의 정통 직계가 아니라면 출입조차 금지된 청조각(靑造閣)!

지난 이십 년간 청조각은 철저한 경계와 비밀 속에 묻혀 있었다.
조용한 사람은 그 존재가 잊혀지기 쉽다.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세월 동안 청조각은 너무나 조용했다. 그리고 이십 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다수 당문인들은 청조각의 이름을 잊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세월이 몇십 년, 아니, 몇백 년이 지나도 그 이름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에게 있어 오늘 저녁은 정말 중요한 날이었다.
지금 당문의 청조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아는 사람은 천하무림을 통틀어 몇 사람 되지 않았지만 그 일의 성공 여부에는 무림뿐 아니라 천하의 향배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노을 속에 묻혀 있는 청조각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거기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가슴을
조이게 하는 무엇을 담고 있었다.

청조각의 지하.
기이한 구조를 가진 실내에는 터질 듯한 긴장감이 팽배해 있었다.
둘로 나누어진 방안.
애초에 하나였던 방을 커다란 유리벽으로 나누어 놓은 그 방의 오른편에는 지금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많다고 해봤자 고작 여섯 명에 불과했지만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방의 크기를 생각한다면 그것도 많은 숫자였다.
그들은 너나할것없이 왼편에 유리벽으로 가로막힌 방안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누구 한 명 소리내어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침 넘어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시작해라.”
유리벽 바로 앞줄에 놓인 두 개의 의자 중 왼쪽에 앉은 황의노인의 입을 뚫고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왼쪽 방안에 있던 황의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곤 사방 한 자씩의 네모반듯한 유리상자 앞에 조심스런 동작으로 앉았다.
냉정한 기운이 배어 있는 황의중년인의 뾰족한 턱을 타고 잠시 긴장이 흘렀다.
반질반질한 사슴가죽장갑을 낀 그의 손이 탁자 위에서 작은 갈색 병을 집어 들었다.
그 병 안에 찰랑이는 액체를 바라보는 황의중년인, 당윤평의 눈동자가 격정으로 짧게 흔들렸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땀이 들어갔던가!
장장 이십 년에 걸친 그 피나는 노력이 이제 결과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경혼마독! 드디어 만들고야 말았구나!’
당문의 노가주이자 사십 년 전 암기수법의 일인자였던 천수경혼(千手驚魂) 당진룡(唐眞龍)의
이자(二子)인 당윤평(唐潤平)은 소리없이 한숨을 지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오리라고 감히 기대할 수조차 없었다.
최고의 절독 백 가지로 만들어진 백독천(百毒川)!
이독제독의 원리로 그것을 제압해야 하는 독중지독! 경혼마독!
아무도 앞날의 일을 점칠 수 없었다.
당문은 이 일에 가문의 사활(死活)을 걸었고, 이십 년 동안 극비리에 모든 일을 진행시켜 왔다.
얼마 전에 경혼마독의 마지막 성분으로 들어갈 세 가지 독초인 마화초(麻火草)와 사모초(蛇母草), 황자초(黃子草)가 극적으로 구해짐에 따라 경혼마독을 완성시키기 위한 당문의 마지막
준비는 끝을 맺었다.
이제 그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백 번째, 갈영사독(渴靈寫毒) 차례다. 윤평`─`!”
당윤평은 유리벽 밖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는 걸 느끼고는 가볍게 입술을 축이고 나서 병의 마개를
열었다.
가는 유리세관(琉璃細管)으로 빨아올려진 갈색 병 속의 액체, 경혼마독이 유리상자 안의 접시에 담긴 붉은 액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똑`─`!
눈이 시리도록 파란 액체가 유리관 밖으로 빠져 나와 붉은 액체 속으로 떨어졌다.
뿌연 빛을 뿌리는 작은 접시 안에서 길게 파문이 일며 두 가지 색깔이 서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당윤평의 눈가에 잔경련이 일었다.
어울려 노는 어린아이들처럼 이리저리 뒤엉켜 돌아가던 두 가지 액체는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치지직`─`!
야릇한 소성이 울리는 가운데 접시 안에서 한 줄기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붉고 푸른 색은 모두 어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고 접시 안에 남은 것은 맹물같이 투명한 액체뿐이었다.
당윤평의 어깨가 잘게 떨린다 싶은 순간,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유리벽 쪽을 향해 돌아선 그의 입에서 격동으로 떨리는 음성이 터져 나왔다.
“성공입니다, 아버님! 완전히 중화됐습니다.”
그러자 앞줄의 의자에서 길다란 백염이 인상적인 황의노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의노인, 당가의 노가주인 당진룡의 노안에 무수한 상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잠시 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더니 이내 옆으로 몸을 돌렸다.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장중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그를 마주보았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아 다행이오이다.”
당진룡의 깊은 시선을 받은 금포인(金袍人)이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당 노가주와 당문의 노고에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제 명(明)은 새롭게 태어날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당문 역시 무림인이기 이전에 명의 백성이 아니오? 본 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정말 다행스럽소이다.”
당진룡은 탐스런 백염을 조용히 쓸어 내렸다.
“경혼마독을 필요한 만큼 만들어 내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모든 재료가 준비되어 있으니 대량으로 만드는 데는 사나흘이면 족할 것이외다.”
당진룡의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오십대의 백의중년인, 현가주 금천환수(金天幻手) 당치평(唐治平)이 말을 받았다.
금포인은 살집 좋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나흘이라…… 좋습니다. 그럼 그때 다시 뵙기로 하지요. 그리고 마지막까지 경계를 늦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적들의 움직임이 급박해지고 있는 만큼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전 이
일을 북경에 알리러 가보겠습니다.”
“알겠소. 그럼, 멀리 나가지 못함을 이해해 주시오.”
당진룡은 당치평과 함께 문 앞까지 금포인을 따라 나갔다.
금포인은 문을 열고 방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어두운 복도를 따라 빨리듯이 사라졌다.
금포인이 사라진 복도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당진룡, 당치평 부자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방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완전히 어둠 속에 잠긴 청조각에서 나오는 기운은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 * *
마차의 흔들림은 심했다.
그래도 몽뇌산은 유쾌했다.
개봉부와 인접한 여주부(汝宙府)까지 오는 동안 몽뇌산은 묘인아와 많은 얘기들을 나누며 꽤 가까워질 수 있었다.
본래 여행은 사람 사이를 더 돈독히 해준다지 않는가!
물론 마차 안에 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행 중 하후극과 혁무빙은 별로 할말도 없어 보이는 사이 같았는데 그래도 동문
사형제(師兄弟)라고 둘이 나란히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결국 남은 사람은 하나였다.
몽뇌산은 강호의 노련한 노고수답게 모르는 척 잠자는 시늉을 하고 있는 공야선표를 힐끔 바라보았다.
능구렁이 같은 저 노친네는 겉보기엔 세상 모르게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 귀를 활짝 열어
놓고 두 사람의 말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게 뻔했다.
공야선표가 이십 년 전 선법의 일인자라 칭해졌던 선풍대협이라니!
몽뇌산은 속으로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눈으로 직접 매화십팔선(梅花十八扇)인지 뭔지 하는 부채춤을 보기 전엔 절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몽뇌산은 묘인아를 바라보며 힐끔 공야선표를 눈짓해 보였다.
“그냥 부채에 대한 생각 좀 하느라구요.”
“부채요?”
의아한 얼굴로 되묻던 묘인아가 잠든 척하고 있는 공야선표를 보며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자 문득 공야선표의 입에서 잠꼬대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월하노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저럴까?”

무슨 뜻인지 뻔한 얘기였다.
몽뇌산은 묘인아가 소리없이 얼굴을 붉히는 걸 보며 공야선표를 향해 인상을 썼다.
그가 막 공야선표와 설전을 벌이려 할 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크아아악`─`!”
히히히이잉`─`!
거친 말울음 소리와 함께 마차가 갑자기 급정거를 했다.
그러나 마차 안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구도 몸이 앞으로 쏠리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밖에서 비명 소리가 나자마자 공력을 돋우어 몸의 중심을 잡으면서 바짝 긴장한 채로 마차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웬 비명 소리지?”
의아해 하는 몽뇌산의 목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별안간 정적(靜寂)이 찾아왔다.
답답하리만치 무거운 침묵!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온 것은 다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었다.
“도, 도와 주시오`─`! 사, 사리`─`임, 커억!”
마차 바로 코앞에서 나는 듯 너무나 선명한 그 소리에 마차 안에 있던 세 사람은 다들 몸을 움찔거렸다.
도와 달란 말을 외치고 쓰러진 그 사람이 불러들인 것일까?
별안간 주변에 자욱한 살기가 깔리기 시작했다.
공야선표는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로 예리(銳利) 무비(無比)한 살기가 느껴지자 주름진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몽뇌산과의 툭탁거리는 장난은 이미 생각 밖이었다.
“우리를 노리는 자들인가? 뭔가 기운이 다른데……!”
“전문적인 살수, 그것도 사검(死劍)을 익힌 고도의 살수들만이 이런 기운을 낸다고 들었어요.”
묘인아의 음성은 여전히 차분했다.
공야선표의 눈동자에 적이 감탄하는 빛이 어렸다. 비록 들은 거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그녀 자신도 무시 못 할 한 명의 강호고수라는 얘기였다.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몽뇌산은 생각을 더듬고 있었다.
‘비슷한 기운! 또 그자들인가? 하지만……!’
몽뇌산은 고개를 들어 공야선표와 묘인아를 바라보았다.
“우리를 노리는 자들은 아닌 것 같은데…… 확실하게 알 방법이 하나 있죠.”
“잉? 그게 뭔가?”
“직접 나가 보는 것!”
몽뇌산은 자리에서 기운차게 일어나며 공야선표가 채 말리기도 전에 마차 문을 확 열어제쳤다.
문을 열고 나간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태산 같은 기운을 뿌리며 마차 앞에 서서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하후극의 뒷모습과 저만치 앞에서 바닥으로 몸을 숙이고 있는 혁무빙의 옷자락이었다.
적들의 모습은 사방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몽뇌산은 그들이 관도변의 숲 어딘가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살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몽뇌산은 하후극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움직여도 괜찮겠나?”
“다치면 묘 소저가 또 치료해 주겠죠, 뭐.”
태연히 대답하는 몽뇌산의 시선은 하후극을 지나쳐 소리없이 몸을 일으키고 있는 혁무빙에게로 가 있었다.
몽뇌산의 눈빛을 따라가며 하후극이 묵직한 음성을 토했다.
“다행이군. 한바탕 시끄러움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웬만하면 그냥 지나갈 수 없겠나?”
몽뇌산을 뒤따라 나온 공야선표가 누구에게랄 것 없이 초조한 어조로 물어 왔다.
내키지 않는 얼굴로 발을 구르는 그를 보며 몽뇌산이 태연히 말했다.
“대명이 자자한 선풍대협께서 싸움을 피하시다니, 말이 됩니까?”
발끈하는 공야선표의 뒤에서 묘인아의 음성이 들려 왔다.
“이 살기(殺氣)는 그냥 지나쳐 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아무래도 우리가 저들의 행사를 방해한 듯싶군요.”
“우리가 뭘 어쨌기에?”
지금의 상황이 영 못마땅한 듯, 공야선표의 음성에는 불편한 그의 심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비명 소리를 들었고 사람 하나가 도와 달라며 쓰러진 걸 봤죠.”
몽뇌산은 말을 마치며 일정한 보폭으로 조용히 다가오는 혁무빙을 주시했다.
“죽었나요?”
혁무빙은 의원다운 관심을 드러내는 묘인아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묘인아가 지그시 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혹시 아는 사람이던가?”
“안면은 없지만 저쪽 숲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고, 저기 있는 검수도 호남(湖南) 악록산(岳麓山)에
있는 벽하산장(碧河山莊)의 표식이 그려진 검을 들고 있었습니다.”
“벽하산장? 사림(蛇林)이 왜 그들을……?”
공야선표가 의아한 얼굴로 질문을 내뱉었다.
“사림요?”
몽뇌산이 날카로운 어조로 묻자, 묘인아가 나직이 개략적(槪略的)인 설명를 해주었다.
사림(蛇林)!
강호에서 최근 들어 급부상하고 있는 신흥 세력의 하나!
즉 의황곡, 검도원과 더불어 삼성(三星), 달리 강호삼신세(江湖三新勢)라고 불려지는 곳이 바로 사림이었다.

검도원이야 오로지 끝없이 검도를 추구하는 은자적인 성격을 띤 집단인만큼 강호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고, 의황곡은 강호에서 삼대세력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편에 속했다.
사림은 행사가 가장 은밀했고, 그래서 강호제일비(江湖第一秘)라고도 불리는 곳이었다.
“그 동안 사림에 대해 강호에선 의문이 많았었는데, 이제 보니 일종의 살수 집단이었던가 봐요.”
죽어 있는 벽하산장의 인물을 보며 묘인아가 나직하게 말하자, 몽뇌산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났다.
‘살수 집단이라…… 그럼 전에 날 공격했던 자들도 역시……?’
몽뇌산이 생각에 열중하고 있을 때 공야선표의 편치 않은 음성이 들려 왔다.
“오늘 이 외진 관도에서 삼신세가 한데 얽혀드는 걸 보겠군.”
몽뇌산은 생각을 멈추고 그의 말에 불쑥 끼여들었다.
“그것도 지금 당장요.”
말 그대로 주위를 둘러싼 살기는 점점 더 강해져서 이제 실질적인 위협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살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령처럼 백포를 입고 백색 복면까지 뒤집어쓴, 사림의 살수 스무 명!
장내는 순식간에 일촉즉발(一促卽發)의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어느 순간, 몽뇌산 일행을 빙 둘러싼 그들의 허연 신형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일행 중 제일 먼저 몸을 날린 것은 놀랍게도 공야선표였다. 못마땅한 얼굴로 살수들을 향해 짓쳐 가는 그의 모습은 과거
선법과 더불어 신법의 일절이라고 불렸던 선풍대협다웠다.
그런 공야선표를 어이없는 얼굴로 보다 말고 몽뇌산은 묘인아의 모습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내심 걱정스러워하는 그의 마음과는 달리 묘인아는 차분하게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몽뇌산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가뿐하게 지면을 박찼다.
살수 하나를 단숨에 가로막은 그의 눈빛은 이미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의 손에서 독기가 뭉쳐 오르며 파르스름한 빛을 발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살수의 검에서 칙칙한 빛이 뿜어졌다.
몽뇌산은 검극이 공간을 일직선으로 가르는 모습을 차갑게 빛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일체의 허식을 배제한 사검!
빠르게 다가오는 검세의 정점을 후려치며 몽뇌산은 망설임없이 검세속으로 뛰어들었다.
일 대 일로 벌어지는 고수들의 싸움에선 지루하리만치 길고 긴 탐색전 끝에 때로는 대붕처럼, 때로는 매처럼
몸을 날려 단숨에 승부를 내는 게 보통이었다.
반대로 여럿이 얽혀 싸우는 혼전(混戰)의 경우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어떤 싸움이건 간에 끝나지 않는 싸움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쪽의 압도적인 승리이든 양패구상이든, 아니면 치열한 싸움이든 그저 그런 싱거운
싸움이든, 결국 모든 싸움은 끝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들의 싸움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다만 싸움을 끝내는 방식이 사람마다 달랐을 뿐이었다.
몽뇌산은 독기에 마비된 적의 팔을 비틀며 줄줄 딸려 오는 백포살수의 미심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무색투명한 기운이 손가락 끝에 뭉친다 싶은 순간, 살수의 미심혈에 뚜렷한 지인이 찍혔다.
치이익`─`!
한 줄기 푸른 기운을 머금은 연기가 소리없이 피어오르며 살수의 몸이 비명도 없이 뻣뻣하게 뒤로 넘어갔다.
진천독기에 희생된 여섯 번째 살수였다.
몽뇌산은 살수가 한줌 독수로 화하기 전 뭔가를 주워 들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독수 속으로 내던졌다.
그때, 막 유문혈에 내리꽂은 위맹한 일장으로 또 한 명의 적을 바닥에 눕힌 공야선표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건 뭔가? 그리고 평소엔 독공을 잘 안 쓴다고 들었는데…… 이상하네, 오늘은?”
“싸울 때마다 최선을 다해라. 누가 저한테 그러더군요. 아, 그리고 아까 그건
저자의 영패였어요. 뭐 좀 확인해 볼 게 있어서……”
몽뇌산은 별것 아니라는 얼굴로 답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주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공야선표는 호흡 하나 흐트러짐없이 마차 옆으로 돌아와 있는 혁무빙의
모습을 보고는 슬쩍 몽뇌산을 곁눈질했다.
둘 사이에 뭔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무엇이든 상당히 심각한 게 틀림없었다.
그사이 싸움은 이미 끝나 가고 있었다.
그들을 공격해 온 살수 스무 명 중 몽뇌산이 여섯, 그리고 혁무빙이 여섯을 처리하고 나자 다른 사람은 한결 일이 수월했다.
몽뇌산은 혁무빙에게서 눈길을 돌리곤 호흡을 가다듬으며 묘인아의 모습을 찾았다.
그녀도 이제 막 자신이 상대하던 살수에게 가느다란 침들을 날려 저 세상으로 보내려 하고 있었다.
몽뇌산은 흔들림없이 담담한 얼굴로 적을 죽이는 묘인아를 보며 눈가에 이채를 띠었다.
아까 벽하산장 사람이 죽어 갈 때는 그처럼 언짢은 마음을
드러내더니 살수들을 죽이면서는 생명에 대한 조금의 동정심도 엿보이지 않았다.
“의황곡 사람들이 악인들을 상대할 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양 매정하게 군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구먼! 이제 보니 소저도 꽤나 손이 매섭군!”
쓰러지는 살수를 뒤로하고 천천히 마차로 걸어오는 묘인아에게 공야선표가 직설적으로 말하며 감탄을 해댔다.
주위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힐끔 쳐다보는 묘인아의 눈동자에 씁쓰름한 빛이 떠올랐다.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기왕지사(旣往之事) 하는 일이라면 확실한 게 좋겠지요.”
“자! 그만 출발하는 게 좋겠습니다. 사림과 벽하산장 사이에 얽힌 일은 가면서 생각해 보지요.”
하후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몽뇌산은 마차 문을 열어 보이며 묘인아를 향해 손짓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묘인아는 그 자리에 서서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아니, 왜요?”
몽뇌산이 궁금한 얼굴로 다가가자 묘인아가 손으로 뒤에 널린 시체들을 가리켰다.
“……?”
“명색이 의술을 배운 사람으로서 죽은 사람들을 길에 버려 두고 가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요. 생전에는 악인들이었지만 이미 우리들의 손에 죽음을 맞았으니 이젠 그저 불쌍한
육신만 남은 셈이지요. 여기 남아 시신을 수습한
뒤 그만 곡으로 돌아가려고 해요. 다행히 몽 공자의 상처도 다 회복되었으니 제 마음이 좀 홀가분하네요.”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몽뇌산이 작은 목소리로 항의하자, 묘인아가 소리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언제 한번 의황곡으로 놀러 오세요. 부모님께서도 반갑게 맞아 주실 거예요. 자, 이미 많이
지체되었으니 어서 출발하세요.”
묘인아는 고개를 숙여 보이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자신이 남는 것을 기정사실(旣定事實)로 못박아 버리는 묘인아의 모습에 하후극이
천천히 마부석으로 오르자, 다른 일행들도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가볍게 목례를 해보인 혁무빙과 고마웠다는 눈길을 보내는 공야선표마저 마차에 오르고 나자 남은 사람은 몽뇌산뿐이었다.
“어서 타세요.”
몽뇌산은 묘인아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 많은 시체들을 혼자서 다 수습할 수 있겠어요? 힘들 것 같으면 제가 같이……”
“안 돼! 자네, 도대체 제정신이야? 지금 상황이 얼마나 급한지 알면서…… 얼른 타지 못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소리를 빽 지르며 두 사람 사이로 끼여드는 공야선표를 몽뇌산은 곱지 않은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런 그를 향해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며 묘인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에 제가 말씀드린 것, 기억하시죠? 이번 일 마치고 꼭 한번 의황곡으로 오세요. 기다릴게요.”
말을 하면서도 묘인아는 눈빛으로 계속 몽뇌산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눈빛과 몽뇌산의 우울한 눈빛이 한데 얽혀들었다.
“자네, 정말……!”
“가요!”
마차에서 빠끔히 고개를 내민 채 닦달을 해대는 공야선표에게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몽뇌산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묘인아를 뒤로한 채 마차는 개봉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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