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제12장 - 황천부(皇天富) 1
독로무한
25화. 제12장 - 황천부(皇天富) 1
개봉(開封)!
과거 변경(京), 대량(大梁), 변량(梁)으로도 불렸던 개봉은 서안(西安), 낙양(洛陽)과 더불어
중원 삼대고도(三大古都)의 하나로 꼽히는 곳이었다.
서주(西周) 문왕의 아들 필공(畢公)에 의해 성이 세워진 이래로 개봉은 전국 시대의 위와 양, 진, 한, 주, 북송, 금의 칠대왕조가 도읍으로 삼아 대대로 찬란한 영화를 누려 왔다.
개봉은 역대 왕조가 도읍으로 삼았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지리적인 조건이 아주 훌륭한 곳이었다.
위로는 도도히 흐르는 황하의 장대한 물줄기를 이고 있으며 사방으로 하남 대평야를 거느리고 있으니 세워질 때부터
비옥함이 보장된 요충지였다.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도읍지로서의 영화를 다른 곳에 넘겨 준 오늘날에 와서도 개봉은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서 여전히 활기에 차 있었다.
또한, 오랜 역사를 자랑하듯 도처에 널려 있는 개봉의 무수한 명승 고적들도 중원 도처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원인이었다.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용정(龍井)과 상국사(相國寺), 주선진(朱仙鎭).
그리고 명승지는 아니지만 방금 말한 곳들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이름을 날리는 곳이 있으니 그곳은 바로 강남, 강북을 통틀어 제일가는 부호가 산다는 만금장이었다.
그곳에 방이 모두 몇 개인지,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재물이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라는 만금장은 오늘도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에 찬 눈길을 받으며 개봉성의
중심부에 떡 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만금장에 때아닌 폭풍이 몰아 닥친 것은 하루 일과가 거의 끝나 가는 저녁 무렵이었다.
“이곳의 소장주를 만나러 왔으니 어서 안내해라.”
으리으리하단 말밖에 안 나오는 거대한 장원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삼십대의 청의무사는 짜랑짜랑 울리는 난데없는
외침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만금장이 서 있는 태원로(太元路) 한복판에 먼지가 자욱이 일 때도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그는 한 필의 말이
만금장의 육중한 대문 코앞에서 급정거를 할
때조차도 설마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문 앞에 멈춰 선 마상에서 거만하게 소리치는 여인을 올려다보는 청의무사의 눈길은 자연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이곳을 찾아와 저렇게 큰소리를 치는 사람은 머리털 나고, 아니 보초를 선 이래 처음이었다.
그리고 저렇게 예쁜 여자를 가까이서 보는 것도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곳 만금장의 소장주나리를 만나시겠다 하셨습니까? 그런데 뉘신지……?”
청의무사는 ‘만금장’ 소리를 강조하며 여인에게 조심스레 되물었다. 마상에 있는 여인의 얼굴을 보고 나니 대뜸 내뱉는 그녀의 반말도 그리 거슬리지가 않았다.
청의무사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상의 여인은 여전히 오만했다.
“나는 모용세가에서 온 사람이다.”
여인의 음성에서는 당당한 자부심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당금 천하에서 오대세가 중 수위에 꼽히는 모용세가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감히 그런 눈먼 자가 있을 리 없지!
여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청의무사의 얼굴에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이 스쳐 갔다.
역시 강호에서 손꼽히는 무가의 자손이라 얼굴이며 말하는 게 다르긴 다르군!
“소장주는 무슨 일로 만나려 하십니까, 소저?”
재차 묻는 그의 음성은 더욱 공손해져 있었다.
마상의 여인, 혁무빙을 쫓아 개봉까지 쉴새없이 치달려온 모용도도가 귀찮다는 듯이 짧게 끊어서 말했다.
“중요한 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더 자세한 대답을 요구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는 듯 청의무사는 깍듯이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가 나와 모용도도를 위해 말고삐를 잡으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들어가시면 접객관에서 나온 사람이 소저를 안내할 겁니다.”
모용도도는 고삐를 잡은 청의무사의 손을 쳐다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리다가 마지못해 말에서 내려섰다.
대문 너머를 쳐다보며 눈썹을 치켜 올리는 모양이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간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가자 청의무사의 말대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오관이 단정하고 반짝이는 눈이 총명해 보이는 청의소년 하나가 모용도도에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해왔다.
“어서 오십시오, 소저! 단영(端英)이라 합니다. 소저를 귀빈원으로 모실 사람이지요. 저를 따라오십시오.”
“귀빈원? 소장주의 손님은 다 귀빈원에 묵는 것이냐?”
다짜고짜 물어 오는 모용도도의 질문에도 단영이란 소년은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싹싹하게 대답을 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갑작스레 찾아오신 귀빈들의 경우 흔히 귀빈원에 처소를 마련해 드리지요. 보통 친분이 두터우신 경우에는 대개 내원에 있는 별부에 묵으시는데,
가끔 소장주님의 거처인 연금각에 함께 묵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단영의 설명은 비교적 소상해서 모용도도는 쉽사리 마음을 정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단영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더 볼 것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그럼, 소장주의 거처로 안내해라.”
도도하게 명령을 내리는 모용도도의 얼굴을 쳐다보며 단영은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 보였다.
“저…… 소저! 소장주께서 따로 말씀하시지 않는 이상, 제 마음대로 모셔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귀빈원에서 기다리시면 소장주께서 연락을 주실 겁니다.”
“흥! 나더러 소장주의 연락만 기다리고 앉아 있으란 말이냐? 감히 모용세가의 사람을 이렇게 홀대(忽對)하다니……!”
그녀의 속눈썹이 분노로 인해 파르르 떨렸다.
단영은 ‘홀대’란 말에 귀빈원의 호화로운 시설을 떠올리며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소저! 노여움을 푸십시오. 소장주께서는 좀 전에 중요한 손님이 찾아오셨으니 아마도 그분을 접대하고 계실 겁니다. 그러니 잠시만 귀빈원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해 주시면 제가 총관께 말씀드려 가급적 빨리 만나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단영은 최선을 다해 모용도도의 화를 다독거렸다.
비록 강호에 나가 보지는 않았으나, 오랜 시간을 만금장에서 뼈가 굵은 사람답게 그는 무림세가의 사람들을 어찌 대해야 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접객관과 귀빈원의 일을 도운 덕에 척 보기만 해도 대강 그 사람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 모용도도는 한눈에 봐도 성깔이 대단해 보였다.
하기사 엄청난 가문의 위세에 경인(驚人)할 미모까지 있으니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법도 하였다.
아무튼 조리있게 사정을 설명하며 겨우겨우 달랜 끝에 단영은 모용도도를 귀빈원 안으로 들여보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모용도도를 들여보내고 돌아 나오는 단영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밝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근심이 잔뜩 쌓여 있었다.
사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소장주님을 무슨 수로 모시고 오지? 거참, 큰일이네! 찾아온 손님이 여자, 그것도, 성질이 고약하긴 하지만, 얼굴 하나는 정말 예쁜 여자라는 걸 알면 틀림없이 안 만나려 하실 텐데……! 큰일이야, 큰일! 에라, 나도 모르겠다.
총관어른께선 무슨 수가 계시겠지.”
장원의 총관을 맡고 있는 엽 어른이 계신 곳으로 달려가며 단영은 그저 갔다 오는 동안만이라도 모용도도가 얌전히 있어 주길 바랐다.
그 바람이 얼마나 이루어질지는 미지수(未知數)지만!
“소장주! 나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원에서 굴러다니는 돈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다는 대만금장(大萬金莊)의 총관직을 이십 년 동안 맡고 있는 엽붕(葉崩)은 앞쪽 태사의에 앉아 있는 금의청년에게 약간,
아주 약간 근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이번까지 합하면 그는 벌써 네 번째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북상계의 대부이며 중원제일의 부호로 이름난 만금장주 황금복(皇金福)의 독자이자
앞으로 천하상계를 이끌어 나갈 상술(商術)의 귀재(鬼才)로 일찌감치 상인들의 주목(注目)을 받고 있는 소장주 황천부(皇天富)는 귀머거리인 양
듣고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사실 그의 솔직한 심정을 말하라면 엽 총관의 말을 아예 못 들은 걸로 하고 싶을 정도였다.
“소장주!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은 도리가……”
조심스레 말을 흐리는 엽 총관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는 황천부의 표정은 떫은 감을 씹은 표정이었다.
두툼한 살 속에 파묻히고도 용케 보통 사람보다 커 보이는 두 눈을 끔벅거리며 황천부는 어떻게 하면 이 난관(難關)을 헤쳐 나갈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한편, 엽붕은 좀처럼 일어날 기미를 안 보이는 소장주의 모습에 시간이 지날수록 편치 못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장주가 만나기를 거절했다고 전했을 때 불같이 뛸 모용도도의 모습을 생각하면 엽붕은 눈앞이 다 아찔했다.
소장주가 늦어지는 이유를 설명하러 이미 두 번이나 모용도도를 만나본 엽붕으로서는 가급적이면
그와 같은 사태를 미연(未然)에 방지하고 싶었다.
다시 모용도도에게 가는 일이 생긴다면 세 번째는 절대로 그 혼자 가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게 엽붕의 솔직하고도 간절한
바람이었다.
황천부는 눈빛이 점점 불안해지는 엽붕의 노안(老眼)을 바라보며 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진짜 나가기가 싫은 걸 어쩌란 말인가?
물론 주인 된 자로서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의 나이 약관(弱冠)을 넘긴 지 올해로 사 년이니 그만한 것쯤은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아니, 알고도 남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경우는 아주 도통(道通)해 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자고로 상인의 기본 자세란 친절과 성실 아니던가?
대대로 상업을 이어 와 근 오십 년 이래로 천하제일부호 자리를 놓쳐 본 적이 없는 만금장의 후손으로서 그만한 도리를
모른다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뼛속까지 상인인 그가 이처럼 끈질기게 자리를 뭉개고 있는 데는 정말 그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본래 그는 손님이 왔다는 총관의 얘기에 두말 않고 자동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의 신체 구조상 남들보다 두세 배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주인된 도리와
상인으로서의 기본기를 충실히 실천하기 위해 서둘러 나가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다.
그런데 거의 다 일어서던 그의 몸이 도로 주저앉은 것은 이어진 총관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잠깐 보았는데도 지금 오신 모용 소저라는 분은 그야말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인이시더군요.”
지나가는 말로 던진 엽 총관의 한마디는 황천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내리꽂혔다.
여자라고? 그것도 미인?
게다가 경국지색씩이나?
뜨악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황천부의 얼굴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던 엽붕의 눈동자에 문득
아차 하는 빛이 떠올랐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황천부는 여자, 그것도 아름다운 여자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가 미인을 싫어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도 명료했다.
돈!
미인에겐 자고로 많은 돈이 들게 마련이었다. 미인치고 입맛 까다롭지 않은 여자가 없고, 좋은 옷 마다하는 여자가 없으며, 비싼 보석 탐내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
그 좋은 예는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었다.
당장 그의 아버지만 봐도 그랬다.
근자에 이르러 강남보다 더욱 막강해진 강북상권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상계의 대부이신 그의 아버지는 근검절약(勤儉節約)이라는 말을 신조로 알고 평생을 살아 오신 분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신조에서 예외가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그의 애첩(愛妾)들이었다.
그것도 자그마치 여덟 명!
어려서부터 여덟 명의 작은어머니들이 아버지 개인의 일 년 생활비를, 선뜻 집어 드는 비단옷감 한 필로
날리는 것을 보며 황천부는 여인이야말로 상인에게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다음부터 그는 미인 축에 속하는 여자들은 무조건 멀리하기 시작했다.
행여라도 여인에게 빠져 아버지와 같은 낭비를 하게 될까 봐서……
“소장주! 이렇게 앉아만 계실 게 아니라 잠시 나가 만나 보시지요? 이러시는 건 정말, 정말 예의가 아니십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엽붕이 조금씩 강경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예의가 아닌 건 나도 안다네…… 하지만 그냥 미인도 아니고 경국지색의 미인이라며?’
황천부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궁색(窮塞)한 대안책을 내놓았
“아버님께서 만나시면 안 될까? 아니야! 그 연세에 혹시 보고 반해서 아홉 번째 첩으로 들이시겠다고 하시는 날엔 그야말로 집안 망하는 거지.”
“소장주! 서, 설마 장주께서 그, 그런……?”
관록(貫祿)이 엿보이는 주름진 얼굴에 기겁하는 표정을 떠올리는 엽붕을 보며 황천부는 가벼이 손을 내저었다.
“한번 해본 소리라네. 굉장히 바빠서 앞으로 며칠 동안은 시간을 못 내겠다고 하면? 그럼, 돌아갈 것 같나?”
심각한 눈초리로 돌아보는 황천부를 바라보며 엽붕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림없을 겁니다. 두 번 만나 본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결코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닌 듯했습니다.”
“미인인 데다가 성질까지 대단하단 말이지? 가만! 그런데 대체 그런 여자가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지?”
황천부의 호기심 섞인 눈길이 와 닿자 엽붕은 그가 더 발뺌하는 일이 없길 바라며 신중하게 대답했다.
“소장주님의 친구분이신 혁 공자에 대해 물어 볼 말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엽붕은 나이든 사람답게 소장주가 못 나오면 당장 혁무빙이란 사람을 찾아 데려오라고 명령하던 모용도도의 말을 부드럽게
돌려서 얘기했다.
“혁 공자? 혁무빙, 무빙 말인가? 그 친구에 대한 것을 왜 나에게 묻는담? 별일일세, 쯧쯧……”
황천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글쎄,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나가셔서 직접 알아보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결국 나가 보는 수밖에 없나? 아이고! 그 얼음 같은 녀석 때문에 이게 무슨 낭패람? 아니야. 이건
낭패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재난, 아니 재앙(災殃)이야.”
황천부는 툴툴거리면서도 결국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고야 말았다.
뚱뚱한 몸을 힘겹게 이끌고 있는 대로 뭉그적거리면서 귀빈원으로 향하는 그의 뒤를 따르며
엽붕은 입가에 쓴웃음을 매달았다.
앞으로 어떤 여자랑 혼인하실지, 정말!
아니, 돈 드는데 혼인이나 하시려나?
* * *
“제아무리 강북제일부호라지만 모용세가의 사람인 나를 이렇게 기다리게 해도 되는 건가요? 흥!”
귀빈원을 책임지고 있는 사원종(史原宗)은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모용도도 앞에서 쩔쩔 매며 속으로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게 되기만을 빌었다.
“당신의 소장주는 도대체 왜 머리카락도 안 비치는 거죠?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게
이름 높은 만금장의 접대법인가요?”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소장주께선 지금 다른 중요한 손님을 만나고 계신 터라…… 잠시만, 잠시만 더
기다리시면 만나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소저!”
사원종은 난생처음 소장주의 괴팍스런 성격을 원망하며 무조건 사정했다.
“흥! 더 기다리라니…… 혹시 일부러 나를 피하는 것이 아닌가요?”
의심이 잔뜩 묻어 나오는 모용도도의 앙칼진 물음에 사원종은 진땀을 흘렸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왜 피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게 바로 정답인데!
“무슨 그런 말씀을! 저희 소장주께서 아니, 왜, 무슨 이유로 소저를 피하시겠습니까?”
“흥! 피할 이유가 전혀 없지도 않을걸요!”
무슨 그런 엄청난 소리를 하시냐는 듯 펄쩍 뛰어오르는 사원종을 거만하게 쳐다보며 모용도도는 코웃음을 쳤다.
바로 그때였다.
“하하하! 피할 이유가 전혀 없지도 않다니…… 소저! 무슨 그런 말씀을……? 이 황 모가 죄인도 아닐진대…… 하하!”
모용도도는 막 문을 열고 들어선 푸짐한 체구의 금의화복청년을 보며 갑자기 숨이 막히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입에서 표독스런 물음이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드디어 뵙게 되는군요. 그런데, 피할 이유가 없단 건가요? 하나도?”
“하하! 물론 그렇고말고요. 모용 소저! 그래, 무슨 일로 소생을 찾아오셨는지……?”
결국 모용도도를 찾아오고 만 황천부는 세 명은 족히 앉을 수 있을 듯한 의자에 힘겹게 앉으며 차분하게 물었다.
모용도도는 황천부의 얼굴 표정 하나 안 놓치려는 듯 그를 뚫어지게 관찰하며 단숨에 말을 쏟아 냈다.
“무빙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어요. 행여 없단 말은 하지 마세요. 이곳으로 왔다는 거 다 알고 찾아왔으니까!”
“헛허! 이런! 이 일을 어쩐다? 없단 소리를 하게 됐으니 말입니다.”
모용도도는 진심으로 안됐다는 듯 혀를 차는 황천부를 추궁(追窮)하고 나섰다.
“무슨 얘기죠? 이리로 온 것을 다 아는데……”
“글쎄, 그게…… 이리로 오기로 한 것은 맞습니다만, 웬일인지 늦는군요. 평소엔 이런 일이 없는 친군데……”
황천부는 자신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모용도도가 속이 뻔히 들여다보인다는 눈빛으로 잔뜩 비꼬았다.
“맞아요. 그런 일이 없는 사람인데, 지금 저한테 무빙 오라버니가 그랬다고 말씀하시는 건 좀 우습지 않나요?”
“하지만 사실이 그런 걸 전들 어쩌겠습니까? 저도 그 친구의 행방을 몰라 안 그래도 궁금하게 여기던 참입니다. 이거 참!”
“황 공자! 당신도 모른단 말인가요? 여기 안 온 게 정말 확실해요?”
아름다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안달을 해대는 모용도도를 보며 황천부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그 친구 앞날이 심히 걱정되는구먼! 거참! 허어, 그 아가씨 성깔 한 번 대단하네……’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을 상상하며 히죽거리던 그는 모용도도가 별안간 다정하게 자신을 부르자 기겁을 하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황천부의 뜨악한 눈초리에 잠시 미간을 좁히던 모용도도는 이내 활짝 웃으며 부드럽게 나오기 시작했다.
“황 공자! 공자의 말씀을 믿지요. 그런데 한 가지 청이 있어요. 무빙 오라버니께서 도착하실 때까지 제가 묵을 곳을 좀 마련해 주시겠어요? 내원에 있다는 별부에다
말이에요. 가능하겠죠? 제가 장차 무빙 오라버니의 아내가
되면 우리의 친분도 가볍지 않은 것이 될 테니, 뭐 그 정도 호의는
베풀어 주실 수 있을 거라 믿어요.”
황천부는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어쩐지 기분이 찜찜해지는 것을 느끼며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그 정도야…… 그럼 무빙 그 친구가 오면 떠나실 겁니까?”
‘여우가 따로 없군그래!’
내심 중얼대며 순진한 얼굴로 물어 오는 황천부를 모용도도는 뾰족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떠난다면 무빙 오라버니와 함께가 되겠지요. 그건 그렇고 하인이나 좀 불러 주세요.”
황천부는 제 집인 양 너무도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혀를 내두르며 그대로 따랐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예`─`! 소장주!”
하인의 긴 대답이 들리고 나서 잠시 후 문이 조용히 열리며 안으로 남루한 마의를 걸친, 육십을 갓 넘긴
것 같은 초로의 인물이 들어섰다.
황천부의 눈썹이 위로 꿈틀 솟으며 그의 육중한 몸이 의자에서 들썩거렸다.
마의노인의 비쩍 마른 몸이 그들 앞으로 다가드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노력하고 있던 황천부의 입이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모용도도가 오만스런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이봐요! 내 말에 있는 짐을 내가 묵게 될 방으로 좀 갖다 놔줘요. 그리고 내가 타고 온 말을 잘 보살피도록 하세요. 곧
원주인이 찾으러 올 거예요. 자, 소장주와 잠시 더 할 얘기가
있으니 그만 물러가세요.”
모용도도는 손짓으로 거만하게 가보라는 표시를 했다.
흐르는 물처럼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던 마의노인의 눈빛에 기묘(奇妙)한 빛이 떠오름과 동시에 황천부의
입이 주먹이 들락날락거릴 정도로 딱 벌어졌다.
한편, 모용도도는 감히 자신의 말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리에 꿋꿋이 버티고 서 있는 늙은 하인을 향해 불쾌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결코 속마음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연히 곧바로 잔소리가 튀어나왔다.
“왜 그러고 서 있죠? 소장주! 이곳 하인들은 정말 형편없군요. 우리 모용세가에서는 정말,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
모용도도는 가뜩이나 큰 눈을 커다랗게 치뜬 채 황당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는 황천부에게 한껏 못마땅한 눈길을 보냈다.
해괴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황천부가 막 뭐라고 말을 꺼내려는 찰나, 마의노인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사죄를 했다.
“용서하십시오, 소저! 당장 분부대로 하지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끝내자마자 마의노인은 뒤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그제서야 모용도도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황천부에게 다시 혁무빙의 얘기를 꺼냈다.
“무빙 오라버니가 무슨 일로 늦는 걸까요? 저보다 먼저 출발했으니 의당 먼저 도착했어야만 옳은데……”
미간을 살포시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에게 황천부가 불쑥 엉뚱한 말을 던졌다.
“소저! 참으로 대단하시군요.”
뜬금없이 튀어나온 황천부의 말을 듣고 모용도도는 그를 이상스레 쳐다보았다.
“뭐가 말인가요?”
의아한 듯 물어 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뭐가 대단하다는 건지 알 수 없다는 듯 도도한 미소가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요컨대 ‘당신도 내 미모에는 별수없군요’ 하는 뜻을 담은 미소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해답을 쥐고 있는 황천부의 입술이 천천히 달싹거렸다.
“그래, 강북상계의 대부를 손가락으로 부리신 기분이 어떠십니까?”
“무슨 소리죠?”
모용도도는 황천부의 정신 상태를 의심이라도 하는 듯 별일 다 보겠다는 얼굴을 했다.
“소저는 이제껏 누구도 못 한 일을 해냈소. 하긴 아버지의 옷차림을 생각하면 진작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게 놀라울
따름이지만!”
“뭐라구요?”
황천부는 뾰족하게 소리를 높이는 모용도도를 향해 감탄하듯 고개를 저었다.
“소저가 방금 명령을 내린 사람, 그분은 바로 내 아버님이시오. 아`─`! 소저가 시킨 일이 어떻게 됐을지 결과가 정말 기대되는군요.”
그제서야 일의 전후 사정을 깨달은 모용도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가 싶더니 이내 새빨갛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 어머머, 어머! 난 몰라`─`!”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소리치는 모용도도를 지켜보며 황천부는 의자에다 느긋하게 몸을 묻었다.
‘이로써 최소한 그녀에게 반해 돈을 들일 염려는 없어졌군. 그나저나 모용 소저가 아버지께 시킨
일의 결과가 정말 궁금한데?’
황천부는 입가에 살짝 웃음기를 흘렸다.
아무튼 오늘은 정말 재미있는 하루였다.
황천부는 새침한 얼굴로 그의 아버님에 대한 실수를 사과한 뒤, 언제 민망해 했냐는 듯이 지칠 줄
모르고 혁무빙 얘기를 늘어놓는 모용도도에게서 간신히 빠져 나와 처소로 돌아왔다.
그나마도 그가 모용도도에게 여자의 미묘한 심리를 자극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혁무빙에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려면 충분히 자둬야 하지 않겠느냔 그의 말에 모용도도는 못마땅한 눈초리를 보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별부에 마련된 숙소로 안내했을 때, 황천부는 치미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숙소에 얌전히 놓인 자신의 짐을 보고 얼굴을 붉히는 모용도도를 보자, 그는 그 순간 자기의 행동이
장차 만금장의 일상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리란 걸 깨달았다.
창피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술을 깨무는 모용도도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와, 다시 서재의 푹신한 태사의에 몸을 묻고 나자 그제서야 좀 살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여자가 모용도도와 같이 피곤한 성격을 지녔다면 이제부터 미인을 가까이 해도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가 볼살이 떨릴 정도로 크게 숨을 내쉴 때, 밖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공자! 속하, 성혼(星魂)이옵니다.”
“아, 들어오게.”
황천부는 자세를 바로하며 안으로 들어서는 작달막한 체구의 청의무복청년을 바라보았다.
다부져 보이는 청년의 얼굴을 믿음직스런 눈으로 쳐다보며 황천부는 예를 취하려는 그에게 자리를 가리켰다.
“자, 앉아서 얘기하지. 무슨 소식이 있었나 보군.”
성혼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곧 품에서 손가락 굵기만한 원통을 하나 꺼냈다.
그가 원통을 열자 그 안에서 돌돌 말린 작은 서찰 하나가 나왔.
성혼이 건네 주는 서찰을 받아 들며 황천부는 두 눈에 강렬한 빛을 담았다.
그가 서찰을 훑어보는 동안 방안은 소리없는 침묵에 잠겨들었.
잠시 후, 황천부가 손가락으로 의자의 손잡이를 톡톡 치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무빙, 그 녀석도 그 일행에 합류해서 온단 말이지? 햐아! 모용세가의 말괄량이가 만금장으로 쳐들어와 그 난리를 쳐대며
나를 쪼아대는 동안, 그 녀석은 우리 일에 엉뚱하게 휘말려들어 발길이 지체되었었군. 쯧쯧! 어쩌다
또 그 일에는 휘말려서! 이걸 잘됐다고 해야 할지 어떨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데? 아,
그건 그렇고, 입성(入城)이 모레 아침쯤 될 것
같다고 적어 보냈는데, 그렇담 우리도 슬슬 준비를 해야지?”
“안 그래도 장원 내에 은밀히 처소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어…… 예?”
성혼은 차분하게 말하다 말고 고개와 손을 한꺼번에 내젓는 황천부의 모습에 의아한 기색을 떠올렸다.
“왜 그러십니까?”
“안 될 말이야. 무빙 그 녀석도 이번 일과 무관하지 않게 되었으니 앞으로 행동을 함께해야 할 것이고,
그러자면 당분간 좀 갑갑하게 지내라고 꼬셔야 하는데, 그럼 장원 내에서는 곤란하지. 만금장이 넓다지만 장원 내에 은밀한 곳이래
봤자 뻔한데, 거기에 그들을 두었다가 그야말로 재수에 옴이 붙어 그 말썽쟁이
아가씨와 부딪치기라도 하는 날엔……? 어휴! 암, 안 되고말고!”
황천부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성혼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장원 내에 모시는 것이 만약의 사태를 위해 더 낫지 않을까요? 모용 소저의 일이 걱정되시면 적당히 말씀드려 내일이라도 당장 돌려보내심이……?”
황천부는 성혼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한 자씩 또박또박 물었다.
“돌려보내? 그 얘길 누가 하지? 자네가 할 텐가? 정말 대단한 용기군. 자네가 하겠다면 그녀가 묵고 있는 방쯤은 내가 가르쳐 주지.”
황천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성혼의 반응에도 변화가 왔다. 황천부는 그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며 씨익 웃었다.
“자자, 쓸데없는 생각일랑 관두고, 당장 그들이 묵을 곳부터 구하게. 음! 그렇지. 성 외곽 쪽에 있는 고관들의 여름 별장을 하나 빌리면 되겠군. 조용하고
의심 사지 않을 만한 적당한 곳을 골라 보게. 소문나지 않게 각별히 조심하고!”
“예! 당장 착수하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공자!”
돌아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내리던 황천부는 책 한 권을 펼치다 말고 문을 여는 성혼을 불러 세웠다.
“가만! 성에 들어서자마자 변경된 우리 계획이 차질없이 전해지게끔 개봉전장(開封錢場)에 단단히 일러 놓게. 연락이 잘못
전해진다든지 하여 그들이
만금장 정문으로 들이닥치기라도 하는 날엔 천지번복(天地飜覆), 아니, 내가 모용 소저의
손 아래 고혼(孤魂)이 되는 걸 보게 될 테니!”
성혼은 황천부의 실감나는 표정에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허리를 깊숙이 접어 보인 뒤 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서재에 다시 혼자가 된 황천부는 턱을 괴며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이제 모용도도 때문에 정신없어진 그의 머리가 냉철함을 회복해서 민활하게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게 드디어 온단 말이지! 도로 찾아오는 데 이십 년, 이십 년씩이나 걸렸군그래. 자, 아버님께 아뢰러 가야겠지?”
서재의 촛불도 꺼지고 달빛만이 문을 나서는 그를 배웅했다.
25화. 제12장 - 황천부(皇天富) 1
개봉(開封)!
과거 변경(京), 대량(大梁), 변량(梁)으로도 불렸던 개봉은 서안(西安), 낙양(洛陽)과 더불어
중원 삼대고도(三大古都)의 하나로 꼽히는 곳이었다.
서주(西周) 문왕의 아들 필공(畢公)에 의해 성이 세워진 이래로 개봉은 전국 시대의 위와 양, 진, 한, 주, 북송, 금의 칠대왕조가 도읍으로 삼아 대대로 찬란한 영화를 누려 왔다.
개봉은 역대 왕조가 도읍으로 삼았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지리적인 조건이 아주 훌륭한 곳이었다.
위로는 도도히 흐르는 황하의 장대한 물줄기를 이고 있으며 사방으로 하남 대평야를 거느리고 있으니 세워질 때부터
비옥함이 보장된 요충지였다.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도읍지로서의 영화를 다른 곳에 넘겨 준 오늘날에 와서도 개봉은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서 여전히 활기에 차 있었다.
또한, 오랜 역사를 자랑하듯 도처에 널려 있는 개봉의 무수한 명승 고적들도 중원 도처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원인이었다.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용정(龍井)과 상국사(相國寺), 주선진(朱仙鎭).
그리고 명승지는 아니지만 방금 말한 곳들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이름을 날리는 곳이 있으니 그곳은 바로 강남, 강북을 통틀어 제일가는 부호가 산다는 만금장이었다.
그곳에 방이 모두 몇 개인지,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재물이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라는 만금장은 오늘도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에 찬 눈길을 받으며 개봉성의
중심부에 떡 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만금장에 때아닌 폭풍이 몰아 닥친 것은 하루 일과가 거의 끝나 가는 저녁 무렵이었다.
“이곳의 소장주를 만나러 왔으니 어서 안내해라.”
으리으리하단 말밖에 안 나오는 거대한 장원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삼십대의 청의무사는 짜랑짜랑 울리는 난데없는
외침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만금장이 서 있는 태원로(太元路) 한복판에 먼지가 자욱이 일 때도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그는 한 필의 말이
만금장의 육중한 대문 코앞에서 급정거를 할
때조차도 설마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문 앞에 멈춰 선 마상에서 거만하게 소리치는 여인을 올려다보는 청의무사의 눈길은 자연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이곳을 찾아와 저렇게 큰소리를 치는 사람은 머리털 나고, 아니 보초를 선 이래 처음이었다.
그리고 저렇게 예쁜 여자를 가까이서 보는 것도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곳 만금장의 소장주나리를 만나시겠다 하셨습니까? 그런데 뉘신지……?”
청의무사는 ‘만금장’ 소리를 강조하며 여인에게 조심스레 되물었다. 마상에 있는 여인의 얼굴을 보고 나니 대뜸 내뱉는 그녀의 반말도 그리 거슬리지가 않았다.
청의무사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상의 여인은 여전히 오만했다.
“나는 모용세가에서 온 사람이다.”
여인의 음성에서는 당당한 자부심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당금 천하에서 오대세가 중 수위에 꼽히는 모용세가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감히 그런 눈먼 자가 있을 리 없지!
여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청의무사의 얼굴에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이 스쳐 갔다.
역시 강호에서 손꼽히는 무가의 자손이라 얼굴이며 말하는 게 다르긴 다르군!
“소장주는 무슨 일로 만나려 하십니까, 소저?”
재차 묻는 그의 음성은 더욱 공손해져 있었다.
마상의 여인, 혁무빙을 쫓아 개봉까지 쉴새없이 치달려온 모용도도가 귀찮다는 듯이 짧게 끊어서 말했다.
“중요한 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더 자세한 대답을 요구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는 듯 청의무사는 깍듯이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가 나와 모용도도를 위해 말고삐를 잡으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들어가시면 접객관에서 나온 사람이 소저를 안내할 겁니다.”
모용도도는 고삐를 잡은 청의무사의 손을 쳐다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리다가 마지못해 말에서 내려섰다.
대문 너머를 쳐다보며 눈썹을 치켜 올리는 모양이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간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가자 청의무사의 말대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오관이 단정하고 반짝이는 눈이 총명해 보이는 청의소년 하나가 모용도도에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해왔다.
“어서 오십시오, 소저! 단영(端英)이라 합니다. 소저를 귀빈원으로 모실 사람이지요. 저를 따라오십시오.”
“귀빈원? 소장주의 손님은 다 귀빈원에 묵는 것이냐?”
다짜고짜 물어 오는 모용도도의 질문에도 단영이란 소년은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싹싹하게 대답을 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갑작스레 찾아오신 귀빈들의 경우 흔히 귀빈원에 처소를 마련해 드리지요. 보통 친분이 두터우신 경우에는 대개 내원에 있는 별부에 묵으시는데,
가끔 소장주님의 거처인 연금각에 함께 묵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단영의 설명은 비교적 소상해서 모용도도는 쉽사리 마음을 정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단영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더 볼 것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그럼, 소장주의 거처로 안내해라.”
도도하게 명령을 내리는 모용도도의 얼굴을 쳐다보며 단영은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 보였다.
“저…… 소저! 소장주께서 따로 말씀하시지 않는 이상, 제 마음대로 모셔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귀빈원에서 기다리시면 소장주께서 연락을 주실 겁니다.”
“흥! 나더러 소장주의 연락만 기다리고 앉아 있으란 말이냐? 감히 모용세가의 사람을 이렇게 홀대(忽對)하다니……!”
그녀의 속눈썹이 분노로 인해 파르르 떨렸다.
단영은 ‘홀대’란 말에 귀빈원의 호화로운 시설을 떠올리며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소저! 노여움을 푸십시오. 소장주께서는 좀 전에 중요한 손님이 찾아오셨으니 아마도 그분을 접대하고 계실 겁니다. 그러니 잠시만 귀빈원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해 주시면 제가 총관께 말씀드려 가급적 빨리 만나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단영은 최선을 다해 모용도도의 화를 다독거렸다.
비록 강호에 나가 보지는 않았으나, 오랜 시간을 만금장에서 뼈가 굵은 사람답게 그는 무림세가의 사람들을 어찌 대해야 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접객관과 귀빈원의 일을 도운 덕에 척 보기만 해도 대강 그 사람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 모용도도는 한눈에 봐도 성깔이 대단해 보였다.
하기사 엄청난 가문의 위세에 경인(驚人)할 미모까지 있으니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법도 하였다.
아무튼 조리있게 사정을 설명하며 겨우겨우 달랜 끝에 단영은 모용도도를 귀빈원 안으로 들여보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모용도도를 들여보내고 돌아 나오는 단영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밝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근심이 잔뜩 쌓여 있었다.
사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소장주님을 무슨 수로 모시고 오지? 거참, 큰일이네! 찾아온 손님이 여자, 그것도, 성질이 고약하긴 하지만, 얼굴 하나는 정말 예쁜 여자라는 걸 알면 틀림없이 안 만나려 하실 텐데……! 큰일이야, 큰일! 에라, 나도 모르겠다.
총관어른께선 무슨 수가 계시겠지.”
장원의 총관을 맡고 있는 엽 어른이 계신 곳으로 달려가며 단영은 그저 갔다 오는 동안만이라도 모용도도가 얌전히 있어 주길 바랐다.
그 바람이 얼마나 이루어질지는 미지수(未知數)지만!
“소장주! 나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원에서 굴러다니는 돈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다는 대만금장(大萬金莊)의 총관직을 이십 년 동안 맡고 있는 엽붕(葉崩)은 앞쪽 태사의에 앉아 있는 금의청년에게 약간,
아주 약간 근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이번까지 합하면 그는 벌써 네 번째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북상계의 대부이며 중원제일의 부호로 이름난 만금장주 황금복(皇金福)의 독자이자
앞으로 천하상계를 이끌어 나갈 상술(商術)의 귀재(鬼才)로 일찌감치 상인들의 주목(注目)을 받고 있는 소장주 황천부(皇天富)는 귀머거리인 양
듣고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사실 그의 솔직한 심정을 말하라면 엽 총관의 말을 아예 못 들은 걸로 하고 싶을 정도였다.
“소장주!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은 도리가……”
조심스레 말을 흐리는 엽 총관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는 황천부의 표정은 떫은 감을 씹은 표정이었다.
두툼한 살 속에 파묻히고도 용케 보통 사람보다 커 보이는 두 눈을 끔벅거리며 황천부는 어떻게 하면 이 난관(難關)을 헤쳐 나갈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한편, 엽붕은 좀처럼 일어날 기미를 안 보이는 소장주의 모습에 시간이 지날수록 편치 못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장주가 만나기를 거절했다고 전했을 때 불같이 뛸 모용도도의 모습을 생각하면 엽붕은 눈앞이 다 아찔했다.
소장주가 늦어지는 이유를 설명하러 이미 두 번이나 모용도도를 만나본 엽붕으로서는 가급적이면
그와 같은 사태를 미연(未然)에 방지하고 싶었다.
다시 모용도도에게 가는 일이 생긴다면 세 번째는 절대로 그 혼자 가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게 엽붕의 솔직하고도 간절한
바람이었다.
황천부는 눈빛이 점점 불안해지는 엽붕의 노안(老眼)을 바라보며 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진짜 나가기가 싫은 걸 어쩌란 말인가?
물론 주인 된 자로서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의 나이 약관(弱冠)을 넘긴 지 올해로 사 년이니 그만한 것쯤은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아니, 알고도 남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경우는 아주 도통(道通)해 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자고로 상인의 기본 자세란 친절과 성실 아니던가?
대대로 상업을 이어 와 근 오십 년 이래로 천하제일부호 자리를 놓쳐 본 적이 없는 만금장의 후손으로서 그만한 도리를
모른다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뼛속까지 상인인 그가 이처럼 끈질기게 자리를 뭉개고 있는 데는 정말 그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본래 그는 손님이 왔다는 총관의 얘기에 두말 않고 자동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의 신체 구조상 남들보다 두세 배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주인된 도리와
상인으로서의 기본기를 충실히 실천하기 위해 서둘러 나가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다.
그런데 거의 다 일어서던 그의 몸이 도로 주저앉은 것은 이어진 총관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잠깐 보았는데도 지금 오신 모용 소저라는 분은 그야말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인이시더군요.”
지나가는 말로 던진 엽 총관의 한마디는 황천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내리꽂혔다.
여자라고? 그것도 미인?
게다가 경국지색씩이나?
뜨악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황천부의 얼굴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던 엽붕의 눈동자에 문득
아차 하는 빛이 떠올랐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황천부는 여자, 그것도 아름다운 여자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가 미인을 싫어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도 명료했다.
돈!
미인에겐 자고로 많은 돈이 들게 마련이었다. 미인치고 입맛 까다롭지 않은 여자가 없고, 좋은 옷 마다하는 여자가 없으며, 비싼 보석 탐내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
그 좋은 예는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었다.
당장 그의 아버지만 봐도 그랬다.
근자에 이르러 강남보다 더욱 막강해진 강북상권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상계의 대부이신 그의 아버지는 근검절약(勤儉節約)이라는 말을 신조로 알고 평생을 살아 오신 분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신조에서 예외가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그의 애첩(愛妾)들이었다.
그것도 자그마치 여덟 명!
어려서부터 여덟 명의 작은어머니들이 아버지 개인의 일 년 생활비를, 선뜻 집어 드는 비단옷감 한 필로
날리는 것을 보며 황천부는 여인이야말로 상인에게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다음부터 그는 미인 축에 속하는 여자들은 무조건 멀리하기 시작했다.
행여라도 여인에게 빠져 아버지와 같은 낭비를 하게 될까 봐서……
“소장주! 이렇게 앉아만 계실 게 아니라 잠시 나가 만나 보시지요? 이러시는 건 정말, 정말 예의가 아니십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엽붕이 조금씩 강경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예의가 아닌 건 나도 안다네…… 하지만 그냥 미인도 아니고 경국지색의 미인이라며?’
황천부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궁색(窮塞)한 대안책을 내놓았
“아버님께서 만나시면 안 될까? 아니야! 그 연세에 혹시 보고 반해서 아홉 번째 첩으로 들이시겠다고 하시는 날엔 그야말로 집안 망하는 거지.”
“소장주! 서, 설마 장주께서 그, 그런……?”
관록(貫祿)이 엿보이는 주름진 얼굴에 기겁하는 표정을 떠올리는 엽붕을 보며 황천부는 가벼이 손을 내저었다.
“한번 해본 소리라네. 굉장히 바빠서 앞으로 며칠 동안은 시간을 못 내겠다고 하면? 그럼, 돌아갈 것 같나?”
심각한 눈초리로 돌아보는 황천부를 바라보며 엽붕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림없을 겁니다. 두 번 만나 본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결코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닌 듯했습니다.”
“미인인 데다가 성질까지 대단하단 말이지? 가만! 그런데 대체 그런 여자가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지?”
황천부의 호기심 섞인 눈길이 와 닿자 엽붕은 그가 더 발뺌하는 일이 없길 바라며 신중하게 대답했다.
“소장주님의 친구분이신 혁 공자에 대해 물어 볼 말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엽붕은 나이든 사람답게 소장주가 못 나오면 당장 혁무빙이란 사람을 찾아 데려오라고 명령하던 모용도도의 말을 부드럽게
돌려서 얘기했다.
“혁 공자? 혁무빙, 무빙 말인가? 그 친구에 대한 것을 왜 나에게 묻는담? 별일일세, 쯧쯧……”
황천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글쎄,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나가셔서 직접 알아보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결국 나가 보는 수밖에 없나? 아이고! 그 얼음 같은 녀석 때문에 이게 무슨 낭패람? 아니야. 이건
낭패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재난, 아니 재앙(災殃)이야.”
황천부는 툴툴거리면서도 결국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고야 말았다.
뚱뚱한 몸을 힘겹게 이끌고 있는 대로 뭉그적거리면서 귀빈원으로 향하는 그의 뒤를 따르며
엽붕은 입가에 쓴웃음을 매달았다.
앞으로 어떤 여자랑 혼인하실지, 정말!
아니, 돈 드는데 혼인이나 하시려나?
* * *
“제아무리 강북제일부호라지만 모용세가의 사람인 나를 이렇게 기다리게 해도 되는 건가요? 흥!”
귀빈원을 책임지고 있는 사원종(史原宗)은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모용도도 앞에서 쩔쩔 매며 속으로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게 되기만을 빌었다.
“당신의 소장주는 도대체 왜 머리카락도 안 비치는 거죠?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게
이름 높은 만금장의 접대법인가요?”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소장주께선 지금 다른 중요한 손님을 만나고 계신 터라…… 잠시만, 잠시만 더
기다리시면 만나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소저!”
사원종은 난생처음 소장주의 괴팍스런 성격을 원망하며 무조건 사정했다.
“흥! 더 기다리라니…… 혹시 일부러 나를 피하는 것이 아닌가요?”
의심이 잔뜩 묻어 나오는 모용도도의 앙칼진 물음에 사원종은 진땀을 흘렸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왜 피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게 바로 정답인데!
“무슨 그런 말씀을! 저희 소장주께서 아니, 왜, 무슨 이유로 소저를 피하시겠습니까?”
“흥! 피할 이유가 전혀 없지도 않을걸요!”
무슨 그런 엄청난 소리를 하시냐는 듯 펄쩍 뛰어오르는 사원종을 거만하게 쳐다보며 모용도도는 코웃음을 쳤다.
바로 그때였다.
“하하하! 피할 이유가 전혀 없지도 않다니…… 소저! 무슨 그런 말씀을……? 이 황 모가 죄인도 아닐진대…… 하하!”
모용도도는 막 문을 열고 들어선 푸짐한 체구의 금의화복청년을 보며 갑자기 숨이 막히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입에서 표독스런 물음이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드디어 뵙게 되는군요. 그런데, 피할 이유가 없단 건가요? 하나도?”
“하하! 물론 그렇고말고요. 모용 소저! 그래, 무슨 일로 소생을 찾아오셨는지……?”
결국 모용도도를 찾아오고 만 황천부는 세 명은 족히 앉을 수 있을 듯한 의자에 힘겹게 앉으며 차분하게 물었다.
모용도도는 황천부의 얼굴 표정 하나 안 놓치려는 듯 그를 뚫어지게 관찰하며 단숨에 말을 쏟아 냈다.
“무빙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어요. 행여 없단 말은 하지 마세요. 이곳으로 왔다는 거 다 알고 찾아왔으니까!”
“헛허! 이런! 이 일을 어쩐다? 없단 소리를 하게 됐으니 말입니다.”
모용도도는 진심으로 안됐다는 듯 혀를 차는 황천부를 추궁(追窮)하고 나섰다.
“무슨 얘기죠? 이리로 온 것을 다 아는데……”
“글쎄, 그게…… 이리로 오기로 한 것은 맞습니다만, 웬일인지 늦는군요. 평소엔 이런 일이 없는 친군데……”
황천부는 자신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모용도도가 속이 뻔히 들여다보인다는 눈빛으로 잔뜩 비꼬았다.
“맞아요. 그런 일이 없는 사람인데, 지금 저한테 무빙 오라버니가 그랬다고 말씀하시는 건 좀 우습지 않나요?”
“하지만 사실이 그런 걸 전들 어쩌겠습니까? 저도 그 친구의 행방을 몰라 안 그래도 궁금하게 여기던 참입니다. 이거 참!”
“황 공자! 당신도 모른단 말인가요? 여기 안 온 게 정말 확실해요?”
아름다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안달을 해대는 모용도도를 보며 황천부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그 친구 앞날이 심히 걱정되는구먼! 거참! 허어, 그 아가씨 성깔 한 번 대단하네……’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을 상상하며 히죽거리던 그는 모용도도가 별안간 다정하게 자신을 부르자 기겁을 하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황천부의 뜨악한 눈초리에 잠시 미간을 좁히던 모용도도는 이내 활짝 웃으며 부드럽게 나오기 시작했다.
“황 공자! 공자의 말씀을 믿지요. 그런데 한 가지 청이 있어요. 무빙 오라버니께서 도착하실 때까지 제가 묵을 곳을 좀 마련해 주시겠어요? 내원에 있다는 별부에다
말이에요. 가능하겠죠? 제가 장차 무빙 오라버니의 아내가
되면 우리의 친분도 가볍지 않은 것이 될 테니, 뭐 그 정도 호의는
베풀어 주실 수 있을 거라 믿어요.”
황천부는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어쩐지 기분이 찜찜해지는 것을 느끼며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그 정도야…… 그럼 무빙 그 친구가 오면 떠나실 겁니까?”
‘여우가 따로 없군그래!’
내심 중얼대며 순진한 얼굴로 물어 오는 황천부를 모용도도는 뾰족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떠난다면 무빙 오라버니와 함께가 되겠지요. 그건 그렇고 하인이나 좀 불러 주세요.”
황천부는 제 집인 양 너무도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혀를 내두르며 그대로 따랐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예`─`! 소장주!”
하인의 긴 대답이 들리고 나서 잠시 후 문이 조용히 열리며 안으로 남루한 마의를 걸친, 육십을 갓 넘긴
것 같은 초로의 인물이 들어섰다.
황천부의 눈썹이 위로 꿈틀 솟으며 그의 육중한 몸이 의자에서 들썩거렸다.
마의노인의 비쩍 마른 몸이 그들 앞으로 다가드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노력하고 있던 황천부의 입이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모용도도가 오만스런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이봐요! 내 말에 있는 짐을 내가 묵게 될 방으로 좀 갖다 놔줘요. 그리고 내가 타고 온 말을 잘 보살피도록 하세요. 곧
원주인이 찾으러 올 거예요. 자, 소장주와 잠시 더 할 얘기가
있으니 그만 물러가세요.”
모용도도는 손짓으로 거만하게 가보라는 표시를 했다.
흐르는 물처럼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던 마의노인의 눈빛에 기묘(奇妙)한 빛이 떠오름과 동시에 황천부의
입이 주먹이 들락날락거릴 정도로 딱 벌어졌다.
한편, 모용도도는 감히 자신의 말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리에 꿋꿋이 버티고 서 있는 늙은 하인을 향해 불쾌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결코 속마음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연히 곧바로 잔소리가 튀어나왔다.
“왜 그러고 서 있죠? 소장주! 이곳 하인들은 정말 형편없군요. 우리 모용세가에서는 정말,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
모용도도는 가뜩이나 큰 눈을 커다랗게 치뜬 채 황당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는 황천부에게 한껏 못마땅한 눈길을 보냈다.
해괴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황천부가 막 뭐라고 말을 꺼내려는 찰나, 마의노인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사죄를 했다.
“용서하십시오, 소저! 당장 분부대로 하지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끝내자마자 마의노인은 뒤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그제서야 모용도도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황천부에게 다시 혁무빙의 얘기를 꺼냈다.
“무빙 오라버니가 무슨 일로 늦는 걸까요? 저보다 먼저 출발했으니 의당 먼저 도착했어야만 옳은데……”
미간을 살포시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에게 황천부가 불쑥 엉뚱한 말을 던졌다.
“소저! 참으로 대단하시군요.”
뜬금없이 튀어나온 황천부의 말을 듣고 모용도도는 그를 이상스레 쳐다보았다.
“뭐가 말인가요?”
의아한 듯 물어 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뭐가 대단하다는 건지 알 수 없다는 듯 도도한 미소가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요컨대 ‘당신도 내 미모에는 별수없군요’ 하는 뜻을 담은 미소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해답을 쥐고 있는 황천부의 입술이 천천히 달싹거렸다.
“그래, 강북상계의 대부를 손가락으로 부리신 기분이 어떠십니까?”
“무슨 소리죠?”
모용도도는 황천부의 정신 상태를 의심이라도 하는 듯 별일 다 보겠다는 얼굴을 했다.
“소저는 이제껏 누구도 못 한 일을 해냈소. 하긴 아버지의 옷차림을 생각하면 진작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게 놀라울
따름이지만!”
“뭐라구요?”
황천부는 뾰족하게 소리를 높이는 모용도도를 향해 감탄하듯 고개를 저었다.
“소저가 방금 명령을 내린 사람, 그분은 바로 내 아버님이시오. 아`─`! 소저가 시킨 일이 어떻게 됐을지 결과가 정말 기대되는군요.”
그제서야 일의 전후 사정을 깨달은 모용도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가 싶더니 이내 새빨갛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 어머머, 어머! 난 몰라`─`!”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소리치는 모용도도를 지켜보며 황천부는 의자에다 느긋하게 몸을 묻었다.
‘이로써 최소한 그녀에게 반해 돈을 들일 염려는 없어졌군. 그나저나 모용 소저가 아버지께 시킨
일의 결과가 정말 궁금한데?’
황천부는 입가에 살짝 웃음기를 흘렸다.
아무튼 오늘은 정말 재미있는 하루였다.
황천부는 새침한 얼굴로 그의 아버님에 대한 실수를 사과한 뒤, 언제 민망해 했냐는 듯이 지칠 줄
모르고 혁무빙 얘기를 늘어놓는 모용도도에게서 간신히 빠져 나와 처소로 돌아왔다.
그나마도 그가 모용도도에게 여자의 미묘한 심리를 자극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혁무빙에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려면 충분히 자둬야 하지 않겠느냔 그의 말에 모용도도는 못마땅한 눈초리를 보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별부에 마련된 숙소로 안내했을 때, 황천부는 치미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숙소에 얌전히 놓인 자신의 짐을 보고 얼굴을 붉히는 모용도도를 보자, 그는 그 순간 자기의 행동이
장차 만금장의 일상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리란 걸 깨달았다.
창피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술을 깨무는 모용도도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와, 다시 서재의 푹신한 태사의에 몸을 묻고 나자 그제서야 좀 살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여자가 모용도도와 같이 피곤한 성격을 지녔다면 이제부터 미인을 가까이 해도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가 볼살이 떨릴 정도로 크게 숨을 내쉴 때, 밖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공자! 속하, 성혼(星魂)이옵니다.”
“아, 들어오게.”
황천부는 자세를 바로하며 안으로 들어서는 작달막한 체구의 청의무복청년을 바라보았다.
다부져 보이는 청년의 얼굴을 믿음직스런 눈으로 쳐다보며 황천부는 예를 취하려는 그에게 자리를 가리켰다.
“자, 앉아서 얘기하지. 무슨 소식이 있었나 보군.”
성혼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곧 품에서 손가락 굵기만한 원통을 하나 꺼냈다.
그가 원통을 열자 그 안에서 돌돌 말린 작은 서찰 하나가 나왔.
성혼이 건네 주는 서찰을 받아 들며 황천부는 두 눈에 강렬한 빛을 담았다.
그가 서찰을 훑어보는 동안 방안은 소리없는 침묵에 잠겨들었.
잠시 후, 황천부가 손가락으로 의자의 손잡이를 톡톡 치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무빙, 그 녀석도 그 일행에 합류해서 온단 말이지? 햐아! 모용세가의 말괄량이가 만금장으로 쳐들어와 그 난리를 쳐대며
나를 쪼아대는 동안, 그 녀석은 우리 일에 엉뚱하게 휘말려들어 발길이 지체되었었군. 쯧쯧! 어쩌다
또 그 일에는 휘말려서! 이걸 잘됐다고 해야 할지 어떨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데? 아,
그건 그렇고, 입성(入城)이 모레 아침쯤 될 것
같다고 적어 보냈는데, 그렇담 우리도 슬슬 준비를 해야지?”
“안 그래도 장원 내에 은밀히 처소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어…… 예?”
성혼은 차분하게 말하다 말고 고개와 손을 한꺼번에 내젓는 황천부의 모습에 의아한 기색을 떠올렸다.
“왜 그러십니까?”
“안 될 말이야. 무빙 그 녀석도 이번 일과 무관하지 않게 되었으니 앞으로 행동을 함께해야 할 것이고,
그러자면 당분간 좀 갑갑하게 지내라고 꼬셔야 하는데, 그럼 장원 내에서는 곤란하지. 만금장이 넓다지만 장원 내에 은밀한 곳이래
봤자 뻔한데, 거기에 그들을 두었다가 그야말로 재수에 옴이 붙어 그 말썽쟁이
아가씨와 부딪치기라도 하는 날엔……? 어휴! 암, 안 되고말고!”
황천부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성혼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장원 내에 모시는 것이 만약의 사태를 위해 더 낫지 않을까요? 모용 소저의 일이 걱정되시면 적당히 말씀드려 내일이라도 당장 돌려보내심이……?”
황천부는 성혼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한 자씩 또박또박 물었다.
“돌려보내? 그 얘길 누가 하지? 자네가 할 텐가? 정말 대단한 용기군. 자네가 하겠다면 그녀가 묵고 있는 방쯤은 내가 가르쳐 주지.”
황천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성혼의 반응에도 변화가 왔다. 황천부는 그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며 씨익 웃었다.
“자자, 쓸데없는 생각일랑 관두고, 당장 그들이 묵을 곳부터 구하게. 음! 그렇지. 성 외곽 쪽에 있는 고관들의 여름 별장을 하나 빌리면 되겠군. 조용하고
의심 사지 않을 만한 적당한 곳을 골라 보게. 소문나지 않게 각별히 조심하고!”
“예! 당장 착수하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공자!”
돌아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내리던 황천부는 책 한 권을 펼치다 말고 문을 여는 성혼을 불러 세웠다.
“가만! 성에 들어서자마자 변경된 우리 계획이 차질없이 전해지게끔 개봉전장(開封錢場)에 단단히 일러 놓게. 연락이 잘못
전해진다든지 하여 그들이
만금장 정문으로 들이닥치기라도 하는 날엔 천지번복(天地飜覆), 아니, 내가 모용 소저의
손 아래 고혼(孤魂)이 되는 걸 보게 될 테니!”
성혼은 황천부의 실감나는 표정에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허리를 깊숙이 접어 보인 뒤 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서재에 다시 혼자가 된 황천부는 턱을 괴며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이제 모용도도 때문에 정신없어진 그의 머리가 냉철함을 회복해서 민활하게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게 드디어 온단 말이지! 도로 찾아오는 데 이십 년, 이십 년씩이나 걸렸군그래. 자, 아버님께 아뢰러 가야겠지?”
서재의 촛불도 꺼지고 달빛만이 문을 나서는 그를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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